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염철현 Nov 09. 2021

과거사 화해의 조건

상대방이 좋다고 할 때까지 사과하는 것

개인도 그렇지만 국가 역시 과거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미래의 밝은 관계를 맺기는 어렵다. 과거의 문제를 방지한 채 외형적으로는 관계를 맺을 수 있겠지만, 진정한 우의를 나누는 진실된 친구로 발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개인이나 국가도 잘못할 수 있다. 문제는 그 잘못에 대해 어떻게 용서를 구하고 그 잘못을 반복하지 않느냐가 중요한 관건이다. 독일은, 물론 완벽하지는 않지만, 과거사를 어떻게 풀어나가고 과거와 어떻게 화해할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전형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경계해야 할 점은 일본의 미온적인 과거청산을 의식해 독일의 과거청산을 일방적으로 모범적 사례로 추켜세우려는 경향은 위험한 태도라는 것이다. 독일 역시 1960년대 초만해도 과거청산에 항상 모범적이지 않았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안병직 외 2005, 43).


독일(1990년 10월 3일 통독 이전의 경우 필요에 따라 동독 또는 서독으로 표기한다)은 2차 세계대전(1939-1945)을 일으킨 전범국가라는 오명에 그치지 않는다. 독일의 경우에는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하고 잔악무도한 반인류적 범죄행위로 비난을 받고 있다. 20세기 최대의 대학살로 기록된, 독일 나치 정권에 의해 저질러진 유대인 대학살(홀로코스트) 때문이다. 나치는 '국가의 적'이라는 이름으로 천만 명을 학살했는데 이중 600만 명이 유대인이었다. 그중 여성과 어린이 희생자만 해도 각 200만 명과 100만 명에 달했다. 종전 후 독일은 이처럼 끔찍한 과거사 문제를 어떻게 풀고 갈지가 국가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어젠다가 되었다. 전 세계가 독일의 행보를  지켜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독일 정부는 과거사 문제를 어떻게 했을까? 종전 후 독일은 이스라엘 정부와 유대인 생존자들에게 한결같이 사과와 애도를 표하는 동시에 후속 조치를 실천에 옮겼다. 정신적, 물질적 보상을 하거나 배상을 하고 있다. 1951년 이스라엘과 협정을 맺고 유대인 박해에 대한 배상을 실시했다. 1952년부터 700억 달러를 지원해왔는데, 이 기금은 나치 피해자에게 식량과 복지서비스 제공 등에 쓰인다. 2014년부터 세계 46개국에 흩어져있는 나치 피해자 5만 6천여 명에게 자택 요양 비용으로 4년 동안 10억 달러를 지급하고 있다. 이와 함께 학살 당시 어린이였던 생존자를 위한 별도의 방안도 추가로 논의하기로 했다. 이는 나치 정부의 만행과 관련해 직접 피해는 물론, 정신적 피해와 간접 피해에 대해서도 배상하겠다는 독일 정부의 의지로 풀이된다(홍서희 2013).


과거사 문제를 물질적인 피해 배상으로 끝날 수 있을까? 독일 정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독일 정부는 종전 후 전쟁과 잔혹행위에 대해 한결같이 사죄와 반성을 하였다. 결정적인 장면은 1970년 12월 7일 빌리 브란트 총리(재임 1969-1974)가 제2차 세계대전의 최대 피해국인 폴란드를 방문했을 때, '바르샤바 게토 봉기 영웅 기념물' 앞에서 헌화를 마치고 무릎을 꿇은 사건이었다. 개인 간에도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할 때 무릎을 꿇게 되면 진정성이 와닿고 얼었던 마음이 녹는 법이다. 하물며 한 나라를 대표하는 총리가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 서독의 유력 일간지 <슈피겔>의 조사에 따르면, 총리의 무릎 꿇기가 적절했다고 답한 비율은 41%였으며, 48%는 지나쳤다고 응답하고, 11%는 무응답을 나타냈다(채인택 2020). 총리의 무릎 꿇기에 대한 서독 국민들의 찬성률은 낮았지만, 국민들은 1972년 치러진 선거에서 브란트 총리에게 대승을 안겨주었다. 정치인들이 현실 논리에 집착하여 인기 몰이에 전념할 필요가 없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정치인은 미래에 대한 확고한 비전과 실행에 옮길 담대한 용기를 갖추어야 함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브란트 총리가 무릎 꿇고 추모한 장면을 기념해 세운 조형물>


독일의 한결같은 사죄와 반성에 대해 나치에 의해 최대로 많은 인명 피해를 입었던 이슬라엘의 반응이 궁금하다. 독일과 이스라엘은 1965년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정부 차원의 관계와 시민의 밑바닥 정서는 다르다. 주 이스라엘 독일대사로 임명된 롤프 프리데만 파울스 대사가 부임할 때 이스라엘 시민들은 돌과 물병과 토마토를 던지며 '나치는 물러가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격렬하게 반대 시위를 했다. 양국이 외교 관계를 수립하면서 이를 반대하는 이스라엘 내에서 강한 저항을 초래했고, 당시 11개 중동 국가가 독일과 외교 관계를 단절하였다. 1972년 뮌헨 올림픽 때 팔레스타인 테러로 이스라엘 대표팀 전원이 희생되는 등 큰 위기를 불러오기도 했다(고형규 2017). 정치는 '가능성의 예술이다'라고 하지만, 그 가능성이 언제 현실로 나타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가슴 한복판에 자리 잡은 바윗덩어리와 같이 단단한 독일에 대한 증오 감정을 녹이는 데는 가해자의 한 두 번 사죄 표현만으로는 턱 없이 부족하다. 바위를 녹일 정도의 시간과 정성이 필요한 법이다. 독일 정부는 정파를 초월하여 과거사에 대해서만큼은 지속적으로 사과하고 용서를 빌며 물질적으로도 피해 배상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1973년 브란트 총리가 처음으로 이스라엘을 방문하고, 1985년 바이츠제커 대통령(재임 1984-1994)은 2차 세계대전 종전일을 '나치로부터 해방된 날'로 규정하여 일관되게 화해의 제스처를 보냈다. 1996년 1월 독일 로만 헤어초크 대통령(재임 1994-1999)은 1월 27일을 ‘나치 피해자 추모의 날’로 지정하고 국가기념일로 제정했다. 2007년 9월 앙겔라 메르켈 총리(재임 2005-2021)는 "자신 이전의 모든 독일 총리가 이스라엘에 대한 독일의 특별한 역사적 책임을 의무로 여겼다"라고 전제하면서, "나 역시 이런 특별한 역사적 책임을 명확하게 인정한다"며 국제사회에서 독일의 잘못을 사과했다. 2008년 3월에는 독일 총리로서는 처음 이스라엘 의회에서 한 연설에서 메르켈은 "쇼아(홀로코스트의 히브리어)는 독일인에게 가장 큰 수치"라고 하면서 "독일인의 이름으로 유대인 600만 명을 대량 학살한 일은 많은 유대인과 유럽, 전 세계인들을 고통스럽게 했다"라고 지적하면서 희생자와 생존자 모두에게 머리를 숙여 사죄하고 용서를 구했다. 2013년 8월 다하우 나치 수용서를 찾아가서는 "수감자들의 운명을 떠올리며 깊은 슬픔과 부끄러움을 느낀다. 대다수 독일인이 당시 대학살에 눈 감았고, 나치 희생자들을 도우려 하지 않았다"라고 사죄했다(고형규 2015).


독일이 국제사회에 지속적, 반복적으로 과거 나치에 의한 전쟁과 학살에 대해 사죄하고 용서를 구하고 있는데, 실질적인 배상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싶다. 독일 정부의 피해배상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 전쟁배상, 나치 피해자 개인에 대한 배상, 외국인 강제노역자에 대한 보상이다. 먼저 전쟁배상의 경우에는 1차 세계대전 종전 후 베르사유 조약을 통한 독일에 대한 과도한 배상금 문제가 초래한 문제, 소련의 급부상에 따른 민주진영과 공산진영의 냉전 대결, 국가 간의 이해관계 충돌 등의 문제로 제대로 배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소련의 경우에는 배상금과 나치 귀속재산을 처분하여 얻은 자금을 합하면 원래 예상했던 액수 이상을 받아냈다. 나치 피해 배상은 국가배상과 개인배상으로 구분한다. 국가배상에서 서독은 1959년부터 1964년에 걸쳐 서유럽 12개국과 나치 피해보상과 관련된 포괄협정을 체결하여 약 10억 마르크를 제공했다. 1960년대 이후에는 동구권 국가들과 나치 패해 배상 협약을 맺어 약 10억 마르크를 제공했다. 개인배상의 대상은 인종, 종교, 사상을 이유로 박해를 받았던 나치 희생자들이었다. 나중에는 대상 범위가 법인과 예술가 및 학자, 그리고 희생된 피해자의 가족, 그리고 피해자를 도운 사람이나 잘못 오인되어 피해받은 사람들까지 확대되었다. 강제노동자에 대한 보상은 주로 외국인 강제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다. 나치는 점령지역에서 수백만 명에 달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동원하여 강제노역에 종사하도록 했다. 1944년 기준으로 대략 8백만 명의 외국인 노동자(민간 570만 명, 전쟁포로 190만 명, 강제수용소 수감자 50만 명)가 강제노역으로 고통을 당했다. 강제노동자에 대한 보상은 법적인 책임보다는 인도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송춘기). 외국인 강제노동자에 대한 보상문제는 2000년 독일정부와 기업이 공동으로 기금을 출연하여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 재단을 설치하면서 돌파구를 찾게 되었다(안병직 외 2005, 73). 독일은 원상회복과 금원 배상, 사회보장적 금원의 지급, 사과, 교육, 재발방지 등을 통해 물질적, 상징적 배상을 모두 제공하는 복합적인 배상을 통해 피해자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있다. 그러나 독일의 배상은 엄밀한 의미의 '법적 배상'으로 파악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으며, 독일 정부는 정치적, 도덕적 배상임을 강조하고 있다(송 에스더 2001).


국제사회도 독일이 보여준 과거사 화해를 위한 노력에 힘을 보탰다. 2005년 유엔총회 결의를 통해 1월 27일을 '국제 홀로코스트 추모일(The International Holocaust Remembrance Day)'로 제정했다. 하임 호센 주한 이스라엘 대사는 "브란트 총리와 같이 국가 정상이 기념탑 앞에서 용서를 구하기 위해 무릎을 꿇는 등의 행동이 피해국과 피해자들과의 화해에 도움이 되는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화해는 감정의 문제입니다. 양국의 젊은이들이 교류하고, 이스라엘과 학자들이 함께 연구하고 있습니다. 1952년 독일이 배상을 약속한 협약이 오늘날 꽃을 피우고 있는 셈입니다. 모든 것은 과거를 기억할 때 가능합니다."(조진형 2018). "과거를 기억할 때 가능하다"라는 호센 대사의 발언은 매우 중요하다. 어느 국가나 자국에 불편하고 부끄러운 과거를 망각하고 싶을 것이다. 독일은 망각이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방식이 아님을 보여준다. 과거의 잘못을 직시하고 그 잘못이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역사적 책임 의식과 실천이야말로 독일 정부가 국제사회에서 추구하는 핵심 원칙으로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 '용서하지만 잊지는 않는다'라는 단호한 역사 인식이야말로 과거사와 진정으로 화해하고 잘못된 역사를 반복하지 않은 처방이 될 수 있다. 이스라엘과 독일은 과거 어둠의 장막을 걷어내고 친구 관계로 발전하여 우방국이 되었다.


'사과는 상대방이 좋다고 할 때까지 하는 것'이라는 말은 일본의 하토야마 유키오(鳩山 由紀夫 재임 2009-2010) 전 총리가 한 말이다. 하토야마 총리는 대표적인 지한파로 그는 틈만 나면 일본의 과거 만행에 대해 용서를 빌고 사죄하는 인물이다. 독일과 일본이 과거사를 인식하고 이를 해결하는 방식에는 대척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독일은 정부 차원에서 과거사에 대한 잘못을 사죄하고 용서를 빈다. 일본은 개인 차원에서 일부 인사들이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하지만, 일본 정부는 사과를 거부하거나 잘못이 없다고 잡아뗀다. 양국의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한 인식의 차이가 오늘날 독일과 일본의 현재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지렛대가 된다.


                 <2015년 서대문형무소 추모비에 무릎 꿇고 사과하는 일본의 하토야마 전 총리>


고형규. (2015). <연합뉴스>. <과거사 화해 조건...독일, 이스라엘 외교수립 50돌>. 5월 11일.

안병직 외. (2005). <세계의 과거사 청산>. 푸른역사.

송에스더. (2021). <독일 전후 배상 정책의 평가 및 시사점>. 법과 정책. 27권 2호.

송춘기. <독일의 전후 나치피해 배상> .

송충기. (2005). <독일의 뒤늦은 과거청산>. 역비논단.

조진형. (2018). <중앙일보>. <친구가 된 독일과 이스라엘...양국 대사가 밝힌 화해의 길>. 1월 23일.

채인택. (2020). <중앙일보>. <초강대국 독일, 50년 전 '바르샤바 무릎꿇기'가 시작되었다>. 12월 7일.

홍서희. (2013). <KTV>. <독일, 나치 피해자에 1조원 배상···일본과 대조적>. 5월 30일.

작가의 이전글 16세기를 이해하는 세 가지 키워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