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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Nov 12. 2021

11월 11일 11시

대한민국은 유엔이 잘 키운 자식이다.

매년 11월 11일은 일명 '빼빼로 데이'라고 한다. 직선 모양의 초코 스틱이 숫자 1과 닮은 모양에서 힌트를 얻어 만든 상술이다. 빼빼로 데이에는 연인들이나 직장의 동료들이 빼빼로를 주고받으면서 서로에 대한 관심과 친밀감을 확인하곤 한다. 이날을 전후해 빼빼로 한 해 판매량의 절반이 나간다고 하니 이름은 잘 짓고 볼 일이다. 제품의 이름은 마케팅의 알파요 오메가가 아닌가 싶다.


11월 11일은 빼빼로 데이지만, 11월 11일 11시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숫자 1이 무려 여섯 개가 겹치고 숫자 11은 세 개가 겹친다. 이번에도 상술과 관련된 뭔가 있겠지 하고 생각하면 틀렸다. 예부터 반복되는 숫자를 사용하여 사악한 기운을 막고자 하는 관행은 있었다. 삼인검(三寅劒)도 하나의 사례다. 인년(寅年)의 인월(寅月), 인일(寅日)에 만든 검을 ‘삼인검'이라고 한다. 이 검은 사악한 기운을 끊고 재앙을 막는 도구로 인식되어 되어 왔으며 호랑이를 뜻하는 ‘인(寅)’ 자는 나쁜 기운을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다. 숫자 11이 세 번 반복되는 이날의 이 시간은 삼인검처럼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기복적 신앙도 아니다. 무엇을 의미하고 무엇을 하는 날이란 말인가?


11월 11일 11시는 전 세계의 이목이 부산으로 향하는 날이다. 이날 이 시간이 되면 6.25 전쟁 참전 22개국(16개국은 전투를 지원했고, 6국은 의료를 지원했다. 전쟁 당시 병력, 의료, 물자를 지원해 준 나라는 총 63개국에 이른다.) 195만 명 중 살아있는 용사들이 세계 어느 곳에 있든 부산을 향해 거수경례를 하고 1분간 묵념을 한다. '부산을 향하여(Turn Toward Busan)'라는 추모행사다. 왜 참전용사들이 부산을 향해 경례와 묵념을 할까? 11월 11일은 제1차 세계대전 종전일, 1차, 2차 세계대전 전사자 추도일, 미국의 재향군인의 날이기도 하다. 2007년 캐나다 참전용사 빈센트 커트니시가 제안해 매년 11월 11일 11시(한국시간)에 맞춰 2,314명의 전몰장병의 유해가 안장돼 있는 부산 유엔기념공원을 향해 경례와 묵념을 한다(윤희영 2021). 시간은 물질도 마음도 모든 것을 변화시키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변치 않은 전우애이고 연대의식이다. 노병들의 경례와 묵념에는 살아있는 자들도 묻혀있는 전우들을 잊지 않고 있으니 편안하게 영면하기를 바라는 마음과 함께, 다시는 6.25 전쟁과 같은 비극이 재발하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도 담아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처럼 UN(국제연합)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도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나라와 유엔과의 관계는 유엔의 탄생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긴밀하게 이어지고 있다. 우리나라는 1945년 해방을 맞이하지만 그 기쁨과 환희를 충분히 맛볼 틈도 없이 해방정국의 혼돈 속에 빠져든다. 한민족은 남과 북으로 갈라지고 한반도의 영토 역시 38도선을 기준으로 양분되고 말았다. 극도의 혼란 속에 1948년 5월 10일 총선을 실시하고, 8월 15일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한다.


정부 수립 후에는 국제사회에서 승인을 절차가 남았는데 유엔총회에서 승인 결의안이 통과되어야 주권국으로서 국제사회의 당당한 일원이 되는 것이다. 1945년 12월 12일, 유엔은 총회에서 "대한민국 정부는 유엔의 선거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 수립된 유일한 합법 정부'라는 내용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이 국가로서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종전 후 민주진영과 공산진영 간의 세 대결이 팽팽했던 상황에서 찬성 48표, 반대 6표, 기권 1표의 압도적 지지로 가결되었다. 국가로서 승인을 받은 것이지 아직 유엔 회원국이 된 것은 아니다. 유엔 회원국은 1991년에야 성사된다. 이전에도 유엔 가입을 신청했지만 상임이사국인 소련의 거부로 번번이 부결됐다. 북한 역시 유엔 가입을 신청했지만, 소련 이외엔 협조해주는 나라가 별로 없었다. 국제 사회의 역학 관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6.25 전쟁은 유엔의 필요성과 존재감을 확연하게 드러나게 한 세계사적 사례가 되었다. 1945년 10월 24일 유엔이 창설된 후 처음으로 유엔군이 탄생하였다. 전쟁 발발과 함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이하 '안보리')는 유엔헌장에 의거하여 즉각적으로 신속하게 대응 조치를 취했다. 유엔은 안보리를 즉각 소집하여 결의문 제82호를 채택하였다. "북한군의 대한민국에 대한 무력 공격에 대하여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고 (...) 이러한 행동이 평화의 파기임을 결정하였다. (...) 적대행위의 즉각적인 중지를 촉구하고 (...) 북한 당국이 그 군대를 38선 이북으로 철수할 것으로 촉구하였다." 유엔은 결의문에 대한 북한의 반응이 없자 6월 27일에는 결의문 제83호를 채택하여 유엔 헌장에 따른 집단안보체제를 발동하였다. 7월 7일에는 결의문 제84호를 채택하고 "유엔 안보리 결의에 따라 군대와 지원을 제공하는 국가들이 (...) 미국 지휘하의 통합사령부에 그러한 군대와 지원할 것을 권고"하였다. 또한 "유엔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승인"하였다(국가기록원). 유엔군이 창설하게 된 배경이다.


유엔 안보리가 6.25 전쟁에 유엔군의 참전을 승인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원인은 상임이사국 소련의 불참으로 가능했다. 상임이사국 중 한 국가라도 반대하면 안보리 안건이 통과되지 못하는 규정 때문에 만약 소련이 참석하여 참전에 반대하였다면 유엔군은 결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소련은 6.25 전쟁을 위해 북한에 군사고문단을 주둔시키는 것은 물론 군수물자까지 지원한 마당에 왜 안보리에 불참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더구나 1950년 5월 모택동은 김일성에게 "미군이 참전하면 소련의 공군 지원을 전제로 북한을 돕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소련은 공군 지원도 하지 않고 안보리에도 불참했다(신경진 2021). 소련이 중국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불참하게 된 표면적인 이유 중 하나는 대만이 중국의 정통 정부로 인정받아 상임 이사국 자리에 앉아 있는 것에 항의하기 위해 1950년 1월부터 안보리 회의에 불참하였다고 한다. 2005년 소련이 유엔 안보리 이사회 불참은 훨씬 더 전략적이고 장기적인 이유에서 비롯되었음을 시사하는 문서가 발견되었다.  


2005년 안드레 레도프스키라는 러시아 학자가 러시아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견한 스탈린의 편지가 발단이 되었다. 이 편지는 1950년 8월 27일 자로 스탈린이 체코슬로바키아의 클레멘트 고트발트 대통령에게 보냈다(유용원 2020). 스탈린은 네 가지 이유로 유엔 안보리에 불참한다는 뜻을 밝혔다. 첫째, 새로운 중국과 소련의 단결을 과시하기 위하여, 둘째, 미국이 안보리 상임이사국에서 국민당 괴뢰 정권을 중국의 대표로 인정하고 모택동이 이끄는 중국의 진정한 대표성을 인정하지 않는 정책의 바보스러움과 어리석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셋째, 두 강대국의 불참 때문에 안보리 결의는 정당성이 없음을 드러내기 위하여, 넷째, 미국 정부가 안보리 다수결을 이용, '프리 핸드'를 갖고 어리석은 짓을 마음대로 저지르도록 함으로써 여론이 미국 정부의 진면목을 알도록 하는 것이다. 여기까지의 내용들은 일반적으로 추측이 가능하거나 알려진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스탈린의 편지 내용 중 다음의 두 가지 이유는 스탈린이 6.25 전쟁을 유럽과 극동 지역의 공산화를 위한 장기 포석으로 이용하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스탈린의 큰 그림을 계속 옮겨본다.


"미국 정부가 극동에 계속해서 묶여 있고, 조선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투쟁에 중국을 끌어들인다고 가정하여 보자. 이로부터 무슨 일이 생길 것인가? 첫째, 미국은 그 어떤 나라도 마찬가지이지만 방대한 병력을 보유한 중국과 싸워 이길 수 없다. 미국은 이 투쟁에서 전선을 지나치게 넓히게 될 것이다. 둘째, 그렇게 함으로써 미국은 가까운 장래엔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수 없을 것이고, 이는 유럽에서 사회주의를 강화하는 시간을 줄 것이며, 더구나 미국과 중국의 투쟁이 극동의 전 지역을 혁명화할 것임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이런 모든 것들이 세계의 세력 균형에 있어서 우리를 유리하게 만들지 않는가? 의심의 여지없이 그렇다. (...) 우리가 안보리에 복귀한 것은, 미국 정부의 침략적 정책을 폭로하고, 그들이 안보리의 깃발을 이용하여 침략성을 은폐하려는 책동을 저지하기 위함이다. 미국이 한국에 침략적으로 개입하였으므로 안보리에 참여하여 이를 폭로하기가 매우 쉬워진 것이다. 이는 너무나 명백하므로 더 설명할 필요도 없는 사안이라고 생각한다." 미군을 전쟁에 끌어들이려는 스탈린의 전략이 주효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스탈린의 편지를 통해 소련이 6.25 전쟁 발발 당시 유엔 안보리에 불참한 이유는 국제정세에 대한 스탈린의 다각적인 분석과 장기적인 지역 공산화 전략이 작동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실제 스탈린의 장기 전략은 상당 부분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동유럽 국가들이 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하여 사회주의 노선을 걷게 되었고, 동아시아에서도 많은 국가들이 공산화되었다. 6.25 전쟁도 중공군의 참전으로 교착 상태에 빠져 종국에는 휴전협정으로 끝이 났다. 6.25 전쟁은 소련과 중공 그리고 미국이란 강대국이 2차 세계대전 후 세계 제패를 위한 전략적 이해관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 이유다. 그 과정에서 한반도는 전쟁의 화약고가 되었고 막대한 인적 물적 손실과 희생을 치렀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하지만, 가정을 하지 않으면 공허한 것이 역사다. 역사를 흥미롭게 하는 것은 가정을 세우고 시나리오를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6.25 전쟁 이 발발했을 때 유엔군의 참전이 아니었다면 우리나라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상상하기 쉬운 일이다. 소련의 안보리 불참에는 스탈린의 심층적이고 장기적인 전략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우리나라에는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유엔은 전쟁에서 우리나라를 지켜주었지만, 전쟁 후 복구와 경제원조에도 절대적 기여를 했다. 유엔 한국재건단(UNKRA)이 설립될 정도였다. 재건단은 피난민과 집 없는 사람들을 구호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런 한국이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하였고 유엔 평화유지군(PKO)으로 활동하고 안보리 비상임이사국이 되기고 했다. 무엇보다 원조를 받는 최빈국에서 원조를 하는 중견국가로 탈바꿈했다. 2020년 국제기구 분담금 현황을 보면 한국은 2019~2021년 납부 순위가 11위다. 우리나라는 유엔의 기여를 높이 평가하여 1950년부터 1975년까지 매년 10월 24일을 '유엔의 날'로 법정공휴일로 지정했다. 지금도 법정기념일로 제정되었다. 이러니 우리나라를 국제사회에서 '유엔의 자식'이라고 부를 만하지 않겠는가. 개천에서 용이 났다. 유엔은 대한민국이란 자식을 잘 키웠으며 성공신화를 썼다.


11월 11일 11일의 '부산을 향하여' 추모 기념행사를 설명하기 위해 모두가 아는(?) 사실을 이야기한 것 같지만 6.25 전쟁의 배경을 강조할 필요는 충분하다. 유엔군 사령부는 1951년 1월, 전사자 매장을 위하여 유엔기념공원을 조성하였다. 같은 해 4월 묘지가 완공됨에 따라 개성, 인천, 대전, 대구, 밀양, 마산 등지에 가매장되어 있던 유엔군 전몰장병들의 유해가 안장되기 시작하였다. 1955년 11월 대한민국 국회는 유엔군의 희생에 보답하기 위해 이곳 토지를 유엔에 영구히 기증하고, 아울러 묘지를 성지로 지정할 것을 결의하였다. 1955년 12월 15일, 한국 정부로부터 국회의 결의사항을 전달받은 유엔은 이 묘지를 유엔이 영구적으로 관리하기로 유엔총회에서 결의문 제977(X) 호를 채택하였다. 11월 11일 11시에 전 세계에서 살아있는 전우들이 영면하고 있는 전우들을 향해 경례하고 묵념하는 '부산을 향하여' 추모 행사는 특별하다.


여기에서 현대의 창업주 정주영과 유엔기념공원에 얽힌 사연을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미 8군 사령부는 6.25 전쟁에 참전한 각국 유엔 사절들이 내한, 참배한다는 계획을 통보받았다. 사령부에서는 엄동설한에 묘지를 파랗게 단장해 줄 적임자로 정주영을 찾았다. 유엔군 묘지 녹화 공사다. 미군에게 '정주영은 남이 못하는 기발한 착상으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다'라는 정평이 나있었다고 한다. 정주영은 트럭을 그러모아 낙동강 연안의 모래 벌판의 보리밭을 통째 사서 파란 보리 포기들을 떠다 묘지에 심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고, 미군 관계자들은 '원더풀, 원더풀, 굿 아이디어!'를 연발하며 감탄했다고 한다(정주영 1992, 81-83).


신경진. (2021).  <중앙일보 >.  <김일성  "적군 이 38선 이북 침공하면 중국 인민군 반드시 출동해야>. 11월  15일.

유용원. (2020). <조선일보>. <한국 6.25 전쟁 당시 UN 소련대사 야콥 말리크의 불참>. 10월 9일.

윤희영. (2021). <조선일보>. <11월 11일 11시 당신은 어디서 무엇을 할 건가요?>. 11월 11일.

이상돈. (2014). <美 해병대, 한국을 구하다>. 기파랑.

이영종. (2008). <중앙일보>. <스탈린이 '미국 6.25 참전' 유도>. 6월 25일.

정주영. (1992).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현대문화신문사.

국가기록원

유엔기념공원 https://www.unmck.or.kr/kor/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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