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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Nov 17. 2021

역사의 진실은 묻을 수 없다

명성황후 시해 추정 편지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상호작용의 부단한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이기도 하다."(카 1992, 28). E. H. 카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현재와 과거는 끊임없이 대화를 할 것인가? 현재의 역사가가 과거의 역사적 사실과 대화할 수 있는 방법은 당대 사람들이 쓴 기록에 의존한다. 그래서 역사란 씌어지는 것, 즉 기록의 산물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조실록은 기록의 진수다. 실록은 반드시 해당 왕의 사후에 작성되었으며, 임금이라도 실록을 열람할 수 없었다. 기록의 공정성과 객관성을 생명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우리 선조들처럼 역사 정신에 투철한 민족도 드물 것이다.


최근 1895년 10월 8일 조선의 명성황후(1851-1895) 시해에 직접 가담했던 일본 외교관 호리구치 구마이치(堀口九万一 1865-1945)가 고향 친구 다케이시 사다마스(武石貞松)에게 보낸 편지가 발견되었다. 발견된 편지는 1894년 11일 17일과 1895년 10월 18일 사이에 작성된 총 8통인데, 이 중 시해 다음 날인 1895년 10월 9일 작성된 여섯 번째 편지에 당시 현장 상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일본 아사히 신문은 호리구치 편지에서 "우리가 왕비를 죽였다"며 황후 시해 사건에 대해 상세히 적었다고 보도했다(조기원 2021). 또 편지에서 "나는 진입을 담당했다. 담을 넘어 (중략) 간신히 오쿠고텐(奧御殿 저택 뒤쪽의 침전과 여성 공간을 가리키는 일본어)에 이르러 왕비를 시해했다. 생각보다 간단해 오히려 놀랐다."(이영희, 박형수 2021). 이 편지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관련하여 일본 정부의 관여를 확인해줄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일본 정부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흥선대원군의 뜻에 따라 일본인이 도운 것이며, 실행단은 낭인 등 민간이었다고 주장해왔다.


왕조 국가의 왕비(시해 당시는 왕비였으며 1897년 황후로 추존함)를 시해한 행위는 엄청난 사건이다. 정상적인 국가였다면 전쟁도 불사했을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말 조선의 형편은 사건의 진상을 제대로 조사할 수도 '일본의 짓이다'라고 따져 물을 수도 없는 몰락한 왕조의 냄새를 풍겼다. 시해당한 왕비의 장례식도 바로 열리지 못하고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897년 11월 21~22일에 거행되었을 정도다(헐버트 2019). 을미년(1895) 10월에 일어난 이 시해 사건은 일본 정부와 일본 군부의 사전 계획과 비호 아래 주한 일본전권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櫻)의 지휘로 일본 군대, 공사관 및 영사관 직원, 순사, '장사'라 자칭하는 민간인들이 경복궁을 습격해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시신을 불태우고 훼손한 사건이다. 전형적인 국가주도 범죄다. 당시 주한영사 우치다 사다쓰치가 기록으로 남긴 증언이다.


"그 유해는 왕궁 안의 우물에 던져졌는데, 그렇게 하면 즉시 범죄의 흔적이 발견될 것으로 염려가 되어 다시 유해를 꺼내 왕궁 안의 소나무 숲에서 석유를 붓고 태웠다. 그래도 여전히 걱정이돼서 이번에는 연못 속에 던졌지만 가라앉지 않아서 다시 그 다음날인가 연못에서 건져내어 소나무 숲에 묻었다."(김문자 2011, 306)   


왕비 시해 사건은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동아시아 침략 정책과 관련된다. 청일전쟁(1894-1895)은 일본이 오랫동안 준비한 대륙침략전쟁이었다. 한반도를 거점으로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차지하려는 야욕을 드러낸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나라와 강화조약(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여 막대한 배상금은 물론 요동반도와 대만 등을 할양받았다. 중국은 아편전쟁(1840-1842, 1856-1860)에서 유럽에 패배하고,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연달아 패배함에 따라 동아시아 패권국으로서 지위를 완전히 상실했다.


청일전쟁 후 일본은 그동안 중국이 지배해 온 동아시아에서의 패권을 장악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일본은 기고만장하여 중국을 조선에서 몰아내고 조선의 내정에 더 적극적으로 간섭할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러시아, 독일, 프랑스가 일본의 급부상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유럽 삼국의 간섭이 시작되었다. 수세에 몰리게 된 일본은 조선 침략 전략에 차질을 빚게 되었다. 이때 조선은 친러 배일 정책으로 전환하려고 하였다. 궁지에 몰린 일본은 친러배일 정책의 핵심 인물로 지목한 명성황후 민씨를 제거하고자 하였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왕비 민씨가 일본의 최대 장애물이었다. 일본 수상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직업군인 미우라 고로를 주한 일본 공사로 임명하고 민씨 제거 임무를 부여하였다(서기원 1997).


일본 정부와 미우라 공사가 얼마나 흉악하고 잔인무도한지에 대해서는 왕비 시해 사건을 은폐한 뒤 친일 세력을 조종하여 왕비를 폐비해 서인으로 강등하도록 요구했다. 그들은 왕비의 시신을 불에 태워 소각한 사실을 은폐하고 태연하게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왕비에게 죄명을 씌었다. 왕비의 죄명은 조정의 기강을 문란하게 하고 왕실을 위험에 빠뜨리게 하였다는 것이다. 조선 조정에서는 이런 극악무도하고 파렴치한 흉계를 눈치채지 못하고 일본과 친일 세력이 의도한 바대로 왕비 폐위를 허락하는 칙령을 발표하기도 했다. 조정에서는 왕비 시해 사건 후 한참 후에야 폐위 칙령을 철회하고 사건을 조사하도록 하였다(헐버트 2019, 163-186). 당시 조선 조정의 사정이 이러했다.


인간은 기록하는 본능이 있다. 기록 본능은 인간을 다른 동물과 차별되게 하는 것으로 이 본능이야말로 오늘날 인류의 문명과 문화를 고도화시킨 일등 공신이다. 기록은 인류 역사를 선사와 유사를 가르는 기준이다. 기록은 벽면, 죽간, 비단, 비석, 파피루스, 종이 등에 기록하는 아날로그 방식에서부터 첨단기술을 이용한 디지털 방식 등의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과거 역사와 현재와의 대화를 가능케 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기록물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각각의 기록은 한 편의 이야기이다. 한 편의 이야기는 다른 것들과 엮여 하나의 기록의 역사를 형성한다(크리스텐슨 2016). 호리구치가 고향 친구에게 보낸 편지는 조선 왕비의 시해 사건을 밝히는 매우 중요한 기록이다. 이 기록을 두고 일본의 반응이 궁금하다. 이제까지 그랬듯이 시해 당시 외교관이었던 호리구치를 일개 민간인으로 유체 이탈시켜 변명할 것인가.


사실 일본의 역사 날조와 왜곡은 유명하다. 영어 격언에도 'One lie makes many.'라는 말이 있다. 거짓말을 한번하기 시작하면 계속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1981년 고고학자 후지무라 신이치(藤村新一)는 유적 발굴 현장 근처에서 주워 온 돌을 4만년 전의 석기로 둔갑시켜 일본 열도의 역사가 종전의 학설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다고 주장했다. 일본 열도는 이 유물의 발굴로 열광했지만, 유물을 날조했다는 것이 드러났다(채명석 2001). 이러니 국제사회에서 일본 고고학회를 신뢰하지 못한다고 한다. 2000년 일본의 모 신문사가 유물 발굴 현장에 몰래 카메라를 설치하여 후지무라가 유물을 땅에 파묻는 모습을 잡다. 그는 유물을 묻어뒀다 다시 캐내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속이면서 역사를 왜곡했다(고은별 2019). 인류 역사를 상대로 벌인 희대의 사기극이지만 이러한 풍토는 역사를 날조하거나 왜곡, 미화하는 일본의 문화와 관련성이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다. 일본이 우리나라 역사를 왜곡하고 자신의 역사를 미화하는 것도 우연히 아닐 것이다. '거짓말을 퍼트린다'고 한다. 전염병보다 더 무서운 병이 거짓말하는 것이다.


오늘날 일본은 과거 역사와의 진정한 대화를 거부하고 있다. 역사 정신의 철저한 결여다. 거짓의 단추를 잘못 끼우게 되면 결국 거짓과 위선의 역사가 되고 만다. 역사는 국가의 정체성이고 민족의 혼이다. 일본이 계속하여 과거 역사와의 대화를 거부한다면 일본이란 나라는 거짓과 허위가 채워진 유령 공간이 되고 말 것이다. 개인이나 국가 모두 잘못할 수 있다. 문제는 그 잘못을 잘못이 아니라고 우기거나 곡해할 때다. 부끄러운 역사를 덮는 순간 더 큰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국가의 자존감을 세우려다 오히려 모든 것이 무너져버린다. 역사의 진실을 묻을 수는 없다. 120여 년 전 조선 왕비 시해 사건에 가담한 일본 정부 외교관의 기록이 말해준다. 과거와 화해해야 미래가 있다. 화해의 손길을 내밀 때 용서도 있는 법이다. 역사란 돌을 땅에 묻고 캐내는 사기극의 들러리가 아니라 사실의 토대 위에 진실이란 돌을 하나하나 쌓는 것이다.


김동진. (2019).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 참좋은 친구.

김문자. (2011).  <명성황후 시해와 일본인>. 김승일 옮김. 파주: 태학사.

서기원. (1997). <대하역사소설 광화문 권7>. 대교.

카, E. H. (1992). <역사란 무엇인가>. 서정일 옮김. 열음사.

크리스텐슨, 스콧. (2016). <세상을 바꾼 100가지 문서> 김지혜 옮김. 라의눈.

헐버트, 호머. (2019). <대한제국멸망사>. 신복룡 옮김. 집문당.

고은별. (2019). <동아사이언스>. <[주말 고고학산책] 고고학자들도 속아 넘어간 희대의 사기극>. 8월 17일.

 永井靖二. (2021). <아사히신문>. <外交官「王妃殺した」と手紙に 126年前の閔妃暗殺事件で新資料>. 11월 16일.

이영희, 박형수. (2021). <중앙일보>. <"조선 왕비 죽였다" 시해 가담 일본 외교관 추정 편지 발견>. 11월 17일.

조기원. (2021). <한겨레>. <"왕비 시해, 간단했다" 일 외교관 가담 적힌 편지 발견>. 11월 17일.

채명석. (2001). <시사저널>. <속속 드러나는 유적 날조…"4만년 전 일본은 없다">. 10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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