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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Nov 24. 2021

어느 정치군인의 죽음에 부쳐

용서를 구하지 않는 자의 죽음

1980년 5월 난 광주에 소재한 고등학교의 3학년이었다. 여느 때 같으면 대학입시를 준비하느라 학업에 열중하던 시기였으리라. 1979년 10월 박정희가 죽은 이후 정국은 혼란스러웠고 학교 분위기도 어수선했다. 대학에서는 휴교령으로 강의실이 닫혔고 연일 시위가 열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대학생들은 전남 도청이 있던 금남로에서 가두 시위를 했고 호응하는 시민들의 숫자도 점점 늘어났다. "계엄령 철폐" "합수부 해체" "전두환 퇴진" 등을 외치는 시위대의 함성과 함께 신군부가 광주에 보낸 진압군의 소식도 교실에 전달되었다. 내가 다니는 학교 교문 바로 옆에는 1929년 11월 3일 '학생의 날'을 기념하는 학생독립운동기념탑이 솟아 있다. 탑 위에 세로 글로 새겨진 "우리는 피끊는 학생이다. 오직 바른 길만이 우리의 생명이다"라는 문장은 유독 강렬하게 다가왔다.  


당시 대학생들의 정국에 대한 정보력과 분석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그들은 정국의 흐름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신군부의 실세는 전두환 장군이었고 그는 불법으로 폭력을 동원하여 국가 권력을 손에 넣었다. 최규하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박정희의 총애를 받으면서 승승장구했던 전두환은 박정희의 나쁜 짓만 배웠다. 수세에 몰린 신군부의 진압은 더 폭력적이 되어갔다. 대학생의 시위에 시민들이 가세하였다. 시민이 학생들의 시위에 가세한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법이다. 정의감에 불타는 학생들의 시위와는 양상이 달라지고 민심이 돌아섰음을 의미한다. 1987년 6.29 선언도 시민들이 시위에 가세하여 쟁취한 것이 아니던가.


5월 20일 광주의 중고등학교에는 휴교 조치가 내려졌다. 휴교령은 쉽게 풀리지 않았고 그해 9월 신학기가 되어서야 교문이 열렸다. 요즘 정신적 피해보상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데 당시 어린 학생들이 겪었던 정신적 피해보상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광주의 학생들은 3, 4개월의 시간을 공부하지 못했다. 아니 공부할 수가 없었다.


전두환이 어제 11월 23일 죽었다. 전두환이란 이름 석자는 광주의 아픔과 서러움과 분노와 함께 해왔다. 그가 죽었다고 해서 그 아픔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유한한 존재지만 그 사람이 남긴 유무형의 족적은 영원히 함께 하는 법이다. 누구의 생명도 소중한 법이다. 한 번뿐인 삶이고 하나밖에 없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음 앞에서 경건해지고 명복을 빌어주는 것이 인지상례가 아니겠는가.


노태우나 전두환은 내란음모와 정권찬탈의 주동자들이다. 죽음을 맞이하는 두 공모자의 자세는 달랐다. 노태우는 유언으로 5.18 민주화운동에서 자신이 했던 과오에 대해 사죄하고 용서를 구했다. 그 자녀들도 몇 차례 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국립묘지를 참배하고 용서를 구했다. 전두환과 자녀들은 노태우와 자녀들이 했던 행동과는 다르게 행동했다. 일말의 기대에도 어긋나지 않았다. 전두환의 유언은 "북녘 땅이 내려다보이는 전방의 어느 고지에 백골로도 남아 있으면서 기어이 통일의 그날을 맞고 싶다"라고 했단다. 자신이 생전에 했던 과오에 대해 용서를 구하지 않았고 용서받지도 못한 사람이 남긴 유언으로는 앞뒤가 맞지 않다.


사람이 태어날 때는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어떤 이는 금수저로 태어나지만 또 다른 이는 흙수저로 태어난다.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사람의 능력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운명이라고 에둘러 말한다. 사람이 어디에서 태어날 것에 대해서는 선택할 수 없지만,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선택할 수 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광주의 한과 응어리를 풀지 않았다. 그는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하였지만 대통령직에 있으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배포가 크고 선이 굵은 리더십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런 리더십도 그가 선택한 죽음으로 다 희석되고 말았다. 한때 권력을 찬탈하고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한 주범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진면목을 보여줄 마지막 기회가 있었다. 그 마지막 한 번의 기회조차 날려버렸다. 사실 그에게는 광주시민에게 용서를 구할 기회가 몇 번 있었다. 법원의 재판정에 나타날 때도 그 기회였다. 하기야 용서를 구하고 사죄할 사람이었다면 진즉 했을 것이다.


전두환은 광주 시민들에게 용서를 구하지도 사죄를 하지도 않고 죽음을 맞이하면서 광주와 광주 시민들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었다. 피해자는 가해자가 용서를 구할 것이라는 기대가 물거품이 되는 순간 그 아픔과 분노는 더 커지기 마련이다. 그는 과거와 화해하지 않고 삶을 마감함으로써 우리 현대사에도 굴곡진 역사의 주인공으로 남게 되었다. 그는 영원히 역사의 죄인, 역사의 피고가 되었다. 역사의 평가에 맡긴다는 것은 무책임한 자세이다.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역사에 대한 평가를 회피하는 것은 주체성의 결여이고 심하게 말하면 비겁한 일이다.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데스몬드 투투 주교는 과거사 청산은 철저한 진상조사와 함께 가해자가 진심으로 죄를 고백하고 뉘우칠 때 용서가 뒤따른다고 하였다. 전두환은 죽는 순간까지 국민들 특히 광주 시민들이 용서를 실천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참 독하고 모진 고인이다.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할 용기는 있었어도 명백한 잘못에 용서를 구하고 사죄할 용기는 없었더라 말인가. 전두환의 신군부에게 사형 선고를 받고 무수한 탄압을 받은 김대중은 전두환과 노태우를 사면하지 않았던가. 우리나라 현대사를 질곡의 자물쇠로 잠겨놓은 채 유명을 달리한 정치 군인의 죽음에 대해 "죽음은 삶의 절정이자 마지막에 피는 가장 아름다운 꽃"이라는 라즈니쉬의 말을 인용하는 것조차 어색하다. 정치 군인 전두환의 죽음을 통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삶을 마무리할 것인가에 대해 깊이 성찰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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