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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Sep 23. 2020

역사의 흐름을 바꾼 사건 ①

미국 연방대법원의 브라운(Brown)  판결

브라운 판결은 미국 역사의 흐름을 바꾼 기념비적 사건이다. 사회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 사건에 대해 '기념비적(landmark)'이란 수식어를 붙이는 데 브라운 판결이야말로 이 조건에 부합한다. 1954년 5월 17일은 미국 역사, 특히 교육사에 특별한 날이다. 연방대법원은 만장일치로 초중등학교에서 '분리 평등 원칙(separate but equal docrine)'의 위헌을 선언했다. "공교육에서 분리 평등원칙은 위헌이다. 분리된 교육시설은 본래 불평등하다." We conclude that, in the field of public education, the doctrine of "separate but equal" has no place. Separate educational facilities are inherently unequal.  역사학자 Pollak은 "남북전쟁과 세계 양차 대전의 승리를 제외하였을  때, 브라운 판결은 노예해방선언 이후 미국 정부의 가장 중요한 행동이다"라고 역설했다.      


이 판결 이전에 공립 초중등학교에서 '흑과 백을 분리하지만 동등하다'는 해괴한 원칙을 적용하는 데 익숙했다. 사회 저변에 스며들어 공고해진 해괴한 논리는 구성원들로 하여금 해괴한 행동을 하게 한다. 유색인 학교와 백인 학교는 분리되어 운영되었다. 심지어 대학에서도 흑인의 입학을 거부했다. 학교뿐 아니다. 모든 공공시설은 물론이고 화장실, 식수대, 열차와 버스 등 교통, 영화관, 심지어 교회에서도 흑과 백은 분리되었다. 물과 기름처럼 영원히 섞일 수 없었다.      


브라운 대 캔자스 토피카시교육위원회 소송(Brown v. Board of Eduation of Topeka, Kansas)은 부성애(父性愛)에서 시작했다. 올리버 브라운은  딸 린다 브라운(8세)이 집 근처의 학교를 놔두고 멀리 떨어진 흑인 학교를 가야 하는 안타까움과 분노감에 소장을 제출하였다. 그는 교회 부목사이면서 철공소 노동자였다. 1950년대 미국 사회에서 흑백분리는 대법원이 합헌 판결(1896년 Plessy case)을 내렸다는 점에서 법률적으로 불법이 아니었다. 브라운 목사는 '분리 평등 원칙'을 합법적이고 보편적 상식으로 생각하던 시대에 침묵하지 않고 변화를 위한 거보(巨步)를 내디뎠다.       

 

브라운 측 변호인은 서굿 마셜(Thurgood Marshall)이었다. 그는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NAACP) 소속 수석 변호사다. 대표적인 인권변호사다. NAACP는 인종(race)으로 피해를 본 소송 사건에 대해 소속 변호사를 파견한다. 그 자신도 메릴랜드 로스쿨에 지원했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입학이 거부된 경험이 있었다. 그는 메릴랜드 로스쿨을 상대로 소송을 걸어 흑인 입학 거부 정책을 바뀌게 했다. 마셜은 브라운 판결을 이끌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다. 변론의 핵심은 인종을 기준으로 분리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강조했다. 1967년 존슨 대통령은 마셜을 연방대법관으로 지명했다. 9명의 대법관 중 유일한 흑인이었다.     

 

브라운 판결로 미국 공립학교는 흑백 분리에서 흑백 통합으로 바뀌었을까? 오랜 관행에 익숙한 사람들의 의식을 바꾸고 행동으로 옮기게 하는 데 예상 밖으로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특히 전통적으로 인종 차별이 심했던 남부에서는 더 많은 시간과 비용을 치루어야 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흑백 통합 학교에 다니는 흑인 학생들의 등하교를 보호하기 위해 아칸소 리틀록에 주방위군을 파견할 정도였다. 법치 국가에서 법은 질서를 유지하고 사회 변화를 선도하는 역할을 하지만 곧바로 실행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브라운 판결이 이 경우다. 흑인 노예를 기반으로 대농장을 경영하던 남부 주(Deep South)의 경우 연방정부보다 주정부 권리가 우선한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연방과 주가 동거하는 미국 거버넌스의 복잡성이다. 70년대에 이르러 공립학교에서 명시적인 흑백 통합은 실현되었다.        


브라운 판결의 핵심은 '분리하되 평등하면 된다'는 백인 기득권의 논리가 위헌임을 천명했다. 분리와 평등은 전혀 별개의 것이다. 오히려 분리는 불평등과 연결된다. 이 판결은 20세기 중반 이후 흑인 민권 신장을 위한 법률적 토대를 놓았을 뿐 아니라 흑인은 물론 백인까지도 사회 개혁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결정적 도화선이 되었다. 60년대 민권법, 투표권법 제정이나 소수민족 우대정책(Affirmative Action) 역시 브라운 판결의 정신을 실천한 결과이다. 기념비적이란 수식어를 붙인 이유다. 차별과 분리는 어느 사회나 존재한다. 차별이 없는 완벽한 사회가 어디 있겠는가? 명시적 차별은 법으로 금할 수 있지만, 마음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잠재적 차별까지 퇴치할 수는 없다. 최소화시키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우리나라도 다문화사회로 급격히 이행되고 있다. 단일 민족이란 이데올로기에 강한 집착을 보이는 한국인의 의식 구조는 다양한 구성원 간의 갈등 요인이 될 수 있다. 브라운 판결을 통해 우리나라 다문화사회의 바람직한 미래를 조망해보는 기회가 되면 좋겠다.            


염철현(2014). 브라운 판결 60년의 유산과 과제. 교육법학연구, 제26권 제3호.

Anderson, Terry H. (2004). The pursuit of fairness: A history of affirmative action. New York: Oxford.

Brown v. Board of Education, 347 U.S. 483(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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