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염철현 Sep 23. 2020

역사의 흐름을 바꾼 사건 ②

토르테시야스 조약(Treaty of Tordesillas)

콜럼버스가 네 차례에 걸쳐 시도한 항해는 세계사적으로 큰 획을 그었다. 콜럼버스 항해 이전의 유럽인들이 알고 있는 세계는 선교사들과 여행가들이 전해주는 정보에 의존했다. 이븐 바투나 마르코폴로의 여행기의 내용도 부정확하거나 과대 포장된 경우가 많았다. 과대 포장된 정보는 유럽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당시 낮은 수준의 항해술과 부정확한 지도를 가지고 대서양을 건너는 것은 목숨을 건 일이었다. 오늘날 콜럼버스의 동상이 수난을 당하고 있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미지의 세계로의 탐험을 시도한 콜럼버스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다.     

 

유럽 국가 중 해외에 눈을 가장 일찍 뜬 나라는 포르투갈이었다. 일찍이 국내 정치가 안정되고 지리적으로 대서양에 위치한 포르투갈은 바다로 진출하는 데 유리했다. 실제 포르투갈은 1415년 북아프카의 세우타를 점령하고 대서양의 카나리아, 아조레스, 마데이라 제도를 손에 넣었다. 1433년부터 아프리카 노예를 수입하여 노동 착취를 시작하였다. 포르투갈은 유럽 밖의 미지의 땅을 발견하고 자국의 영토로 편입시켰지만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싶었다. 1480년 포르투갈은 스페인과 알카코바스 조약(Treaty of Alcáçovas)을 체결하여 교황으로부터 아프리카의 기니와 카보 보자도르(당시 유럽에서 가장 떨어져 있던 땅) 남쪽에서 발견되는 땅은 모두 포르투갈의 영토라는 칙서를 받았다. 교황의 권위가 절대적이었던 당시 교황은 교회의 중심일 뿐 아니라 국가 간의 세속적인 문제의 중재자 또는 경기자의 심판 역할을 했다.     


선도적으로 해양으로 진출한 포르투갈이 선점 효과를 거두고 있는 듯이 보였지만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귀환한 후 사태는 복잡해졌다. 콜럼버스는 바하마 제도, 쿠바, 히스파니올라(아이티) 등을 발견하고 돌아왔다. 이 지역은 포르투갈이 이미 확보한 카보 보자도르(북아프리카 섬) 선보다 아래에 있었다. 교황의 칙서대로라면 그 지역은 포르투갈 땅이 되어야 하는데 스페인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만약 포르투갈이 콜럼버스의 대서양 항해 프로젝트를 수용했다면 세계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스페인은 성공 확률이 매우 낮은 고위험의 프로젝트에 투자하여 대박을 터트렸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세계 지도를 바꿔야 했고 유럽의 대항해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발견한 땅에 대한 소유권을 명확히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상황은 스페인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우선 스페인 왕이 자금을 댄 콜럼버스가 땅을 발견했고 강력한 중재자인 교황 알렉산데르 6세도 스페인 출신이었다. 더욱이나 교황은 선거에서 뿌린 막대한 돈도 스페인에서 빌렸다. 1493년 교황은 "카보베르데 제도 서쪽에서 약 550킬로 떨어진 지점을 분기점으로 서쪽은 스페인이 관리한다"라는 칙서를 발표했다. 콜럼버스가 발견한 땅을 스페인이 관리하도록 하였다. 이전의 포르투갈과의 약속은 휴지 조각이 되었다.    

 

포르투갈은 전쟁 불사를 마지노선으로 스페인과 협상을 했다. 당시 스페인은 장기간 레콘키스타(Reconquista 718~1492)를 벌여 이슬람 세력을 축출하고 옛 국토를 회복했지만 포르투갈과 전쟁까지 할 여력은 없었다. 양국은 1494년 6월 7일 스페인에서 토르데시야스에서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체결하여 기하학적으로 영토를 분할하였다. 두 나라가 지구를 반반씩 나눠 먹었다. 컴퍼스를 어디에 놓느냐에 따라 소유권이 갈렸다. 이 조약의 핵심 내용은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이에서 아메리카 땅의 새로운 경계선을 카보 베르데(Cabo Verde) 제도의 서쪽으로 1,786 km 떨어진 지역에 남북으로 선을 긋고 선의 서쪽은 에스파냐에 속하고 선의 동쪽은 포르투갈에 속한다'이다. 오늘날 브라질이 포르투갈어를 사용하게 된 것도 이 조약의 결과다.      


토르데시야스 조약은 국제 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조약이지만 나쁜 선례를 남겼다. 이후 유럽 제국주의자들은 이 조약을 모방하여 아프리카, 중동, 아시아에서 기하학적인 지리적 경계선을 긋고 식민 체제를 작동시켰다. 토르데시야스 조약은 제국주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도구가 되었다. 현대에도 이런 유형의 경계선이 당사국 간의 분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조약문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함규진(2014). 조약의 세계사. 미래의 창.

작가의 이전글 역사의 흐름을 바꾼 사건 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