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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Sep 23. 2020

미국 메이저 리그의 혼혈 파워

선수와 단장이 함께 만든 '평평한 운동장’

2020년 8월 28 마블 영화 '블랙 팬서'에서 열연한 배우 채드윅 보즈먼(Chadwick Boseman 1976 ~ 2020)이 암 투병 끝에 사망했다.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도 보즈먼이 사상 첫 흑인 메이저 리거 재키 로빈슨(Jackie Robinson 1919~1972)을 연기한 뒤 백악관을 방문했던 일을 회상하면서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 흑인 대통령이 탄생하고 스포츠는 말할 것도 없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법조계 등 사회 전 분야에서 흑인들이 활약하고 있지만 6, 70년대만 해도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은 대단했다. 지금도 인종 간의 갈등은 미국 사회를 분열시킬 뇌관이다.       


2013년 재키 로빈슨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가 <42>다. 로빈슨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준 브렌치 리키(Wesly Branch Rickey 1881~1965) 단장 역으로 해리슨 포드가 열연했다. '42'는 로빈슨의 유니폼 번호다. '42'는 미국 프로 야구 전 구단에서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다. 전 구단에서 이 번호를 사용할 수 없다. 로빈슨의 명성이 얼마나 대단하고, 스포츠 영웅으로 그를 기리는 마음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대변한다. 그는 흑인으로 최초의 메이저 리거가 되었다. 1994년 박찬호 선수가 한국인으로서 처음 메이저 리거로 활약한 LA 다저스(전 브루클린 다저스) 소속이었다.     


로빈슨이 메이저 리그에서 활약했던 1947년부터 1956년은 미국 사회에서 인종차별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다. 흑인은 사람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공공시설은 물론이고 수도꼭지도 유색인용과 백인용이 따로 설치되었다.  '흑인과 백인을 분리하지만 평등하다'(separate but equal doctrine)'는 해괴한 원칙이 상식으로 통했다. 법원도 이 기준에 따라 판결했다. 모든 영역에서 흑과 백은 분리되었다. 야구도 니그로 리그가 따로 있었다.  하물며 영혼을 구제하는 교회에서도 커튼을 치고 따로 예배를 드렸다. 영화 <Hidden Figures>의 주인공 흑인 여성 캐서린 존슨과 <Green Book>의 흑인 피아니스트 돈 셜리가 바로 옆 화장실을 놔두고 멀리 떨어진 곳의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해 발을 동동 굴리는 모습을 떠올리면 된다.     


로빈슨을 생각하면 다저스 구단장 브렌치 리키를 떠올리게 된다. 리키와 로빈슨의 만남으로부터 미국 야구계는 새로운 바람이 불게 된다. 두 사람은 사회에 만연한 인종 편견과 차별을 극복하고 사람들의 의식에 변화를 일으키는 감동의 드라마를 연출했다. 리키는 능력을 보고 선수를 스카우트하였다. 리키 단장은 재키를 영입하면서 다짐을 받아 둔다. "훌륭한 흑인 선수를 찾고 있네. 경기만 잘하는 선수가 아니야. 남들이 모욕을 줘도, 비난을 해도,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여유와 배짱을 가진 선수라야 하네. 한마디로 흑인의 기수가 될 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라야 해. 만약 어떤 녀석이 2루로 슬라이딩을 들어오면서 "이 빌어먹을 깜둥이 놈아" 하고 욕을 했다고 치세. 자네 같으면 당연히 주먹을 휘두르겠지. 솔직하게 말하면 나도 그런 대응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러나 잘 생각해보라고. 자네가 맞서 싸운다면 이 문제는 20년은 더 후퇴하는 거야. 이것을 참아낼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 필요해. 자네가 그걸 해낼 수 있겠나?" 한참 침묵한 후에 로빈슨은 이렇게 말했다. "그런 도박을 벌일 계획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고 약속드립니다." 리키와 로빈슨은 이렇게 의기투합하였다. 미국 야구 역사, 더 나아가 스포츠 역사와 인종차별 종식을 대장정을 시작한 순간이다.     


예상대로 로빈슨에 대한 거부감은 대단했다. 언론에서도 리키가 잘못 알고 있는 자유주의를 실천하기 위해 그의 재주를 희생한다는 비난을 쏟아냈다. 로빈슨의 재능을 모르는 비판가들은 그의 다저스팀 입단을 '특혜'라고 비난했다. 1946년만 해도 16개 프로야구팀 선수 400명 전원이 백인이었다. 로빈슨 1명만이 유일하게 유색인이었다. 살해 위협 편지를 보내는가 하면 같은 팀의 백인 선수들은 탄원서에 서명하여 보이콧을 선언했다. 영화 <42>에서 브루클린 다저스의 감독 레오 두로셔 (Leo Durocher 1905~1991)는 백인 선수들의 청원에 대해 이런 식으로 일축한다. "나는 너희들이 노랗든 까맣든 얼룩말처럼 줄무늬가 있든 상관하지 않는다. 우리 팀의 승리에 도움이 되고 내가 원하는 걸 할 수 있다면 누구든 우리 구단에서 뛸 수 있다." 단장과 감독이 하나 된 마음으로 팀원들의 인종 차별을 일축하고 그들을 설득시켰다. 로빈슨도 집행부의 격려와 지지에 성적으로 보답했다.       


리키는 스포츠계의 링컨으로 불린다.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의 업적을 쌓았듯이 그가 처음으로 스포츠계에서 흑인 선수를 영입하였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최초'의 수식어를 쉽게 달 수는 없다. 야구 선수 출신이기도 한 리키는 선수에게 헬멧을 착용하게 하고 스프링 캠프와 피칭 머신 등 체계적인 야구를 도입하였다. 그는 선수 스카우트의 기준을 인종이 아닌 실력으로 삼았고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다. 혼혈 파워다.     


유명한 홈런왕 헨리 루이스 행크 에런(Henry Louis Hank Aaron 1934~)을 비롯한 미국 스포츠계의 영웅들은 리키와 로빈슨이 다져 놓은 평평한 운동장(level playing ground)에서 재능을 펼칠 수 있었다. 리키 단장의 어록이다. '운은 계획에서 비롯된다(Luck is the residue of design).' 재키 로빈슨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하고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리키는 야구계를 변화시킬 치밀하고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이를 하나하나 실천에 옮겼다. 요즘 말로 '그는 다 계획이 있었다.' 미국 야구계는 1997년 4월 15일, 로빈슨의 입단 50주년을 기념하여 그의 등번호 42번을 전 구단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다. 입단 일을 'Jackie Robinson Day'로 기념하고 이날 선수들은 42번 등번호를 달고 시합한다. 이 퍼포먼스는 피부색이 노랗든 까맣든 하얗든 모두가 같은 사람이니 차별하지 말라는 메시지다. 리키와 재키가 남긴 유산이다.     


미국 야구계는 흑백 분리가 아니라 흑백 통합으로 변화와 발전의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사회가 변화하고 앞으로 나아가려면 차별과 편견을 뛰어넘어야 하고, 서로 다른 생각과 관점을 섞어야 한다. 다양성(diversity)이다. 동종이식은 폐쇄성을 상징한다. 오늘날 실력을 보고 선수를 스카우트하고 구단을 운영하는 미국 프로 야구가 스포츠 중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이유다. 로빈슨과 리키가 초석을 놓은 그 운동장에서 한국인 메이저 리거들이 활약하고 있다. 소회가 새로운 이유다.    

 

Crosby, Faye J. (2004). Affirmative action is dead. 염철현 역(2009). 끝나지 않은 논쟁, 차별철폐정책. 한울.

영화 '42'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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