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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Jul 13. 2022

부러운 형제

② 이회영과 다섯 형제

  1910년 일본이 조선을 강제병합하면서 많은 조선인들은 조국을 등지고 해외로 이주해갔다. 나라를 빼앗긴 백성들이 삶의 터전을 스스로 포기하고 타국으로 옮겨갔다. 억장이 무너지고 피눈물나는 슬픈 망명이다. 어떤 이는 일제가 지배하는 식민지에서 손주를 보지 않겠다고 이주한 경우도 있었다. 이들 중에는 조국을 기필코 되찾겠다는 다물(多勿, 고향 땅을 회복한다는 뜻의 고구려어)의 신념으로 똘똘 뭉친 망명객들도 있었다. 이 망명객 중에 전 가족이 재산을 처분하고 삶의 터전을 만주로 옮겨간 사람들이 있었다. 이회영(1867~1932)을 비롯한 5형제와 가족 40여 명이다. 동서양을 통틀어 나라를 잃은 민족이 강제 추방되거나 이주되는 경우는 보았지만, 자발적으로 가족 모두가 집단으로 이주하는 경우는 흔치 않은 사례일 것이다.


  6형제(이건영, 석영, 철영, 회영, 시영, 호영)는 조선 선조대 재상을 지내면서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데 앞장선 백사(白沙) 이항복의 후손으로 명동성당 앞 YMCA 자리에 살았다. 삼한갑족의 명문가였다. 형제가 재산을 처분해 마련한 자금은 40만 원 정도였다. 근래 학자들이 추산한 바에 의하면 1969년 물가 기준으로 약 600억 원, 2013년 기준으로 약 2조 원에 해당된다고 한다. 어마어마한 거금이다. 이 자금은 우리나라 최초의 독립군 양성학교인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운영하고, 독립운동가들의 활동 밑천으로 쓰여졌다(이주홍, 2018). 당시 형제가 소유한 전답은 일시에 제값을 받고 팔 수가 없었다. 일제의 감시가 심해 헐값에 받고 판 재산이 그 정도였으니 정상적으로 값을 받았으면 훨씬 큰 재산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형제에게 많은 재산도 빼앗긴 나라에서는 의미가 없었다. 나라를 되찾는 일이 급선무였다. 만주로의 집단이주를 주도한 사람은 넷째 이회영이었다. 이렇게 형제를 설득했다고 한다. "일제와 싸우는 것은 대한 민족된 신분이며, 또 왜적과 혈투하시던 백사 공의 후손된 도리라고 생각한다. 여러 형님들과 아우님들은 나의 뜻을 따라주시기를 바란다." 대단한 형제의 대단한 결기다.


   만주로 이주한 형제의 활동상이 궁금하다. 나라가 강제 합병된 뒤 조선인의 독립운동의 열기는 뜨거웠다. 독립운동의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군사를 길러 일본군을 조선 반도에서 몰아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교육으로 후세를 길러 독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두 가지가 양자택일의 방법이라면, 군사를 기르면서 교육으로 미래를 준비하는 양자 결합의 방법도 있었다. 이회영과 형제는 바로 교육과 군사를 기르는 양자 결합의 방법, 즉 교육사업과 무장투쟁을 택했고 그것은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의 개교로 이어졌다. 신흥무관학교는 신민회의 신(新)과 다시 일어나는 구국투쟁이라는 뜻의 흥(興)을 붙여지었다고 한다(이덕일, 2017). 신흥무관학교는 1911년부터 10년간 3,500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졸업생들은 봉오동과 청산리전투에서 활약했을 뿐 아니라 훗날 광복군 중심 인물로 활동했다.  


  모든 재산을 독립운동에 쾌척한 후 빈손이 된 형제는 가난과 질병으로 큰 고초를 겼었다. 첫째 건영은 만주 땅에서 얻은 질병으로 광복 전 일찍 타계하였고, 둘째 석영은 조선 10대 갑부 소리를 들으며 신흥무관학교 운영자금의 대부분을 감당하였으나 전 재산과 함께 두 아들마저 독립 전선에서 전사하여 대(代)가 끊어진 채 중국 상하이의 빈민가에서 국수와 비지로 연명하다가 영양실조로 외롭게 별세하였다. 셋째 철영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풍토병으로 광복 전에 사망하였다. 그리고 형제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던 넷째 회영은 독립운동 지도자로 활동하다가 왜경에 체포되어 1932년 11월 17일 뤼순 감옥에서 재판도 없이 모진 고문을 받다가 순국하였다. 다섯째 시영은 임시정부 시절부터 같이한 김구 선생과 함께 귀국하여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역임하였고 신흥대학(현 경희대학교)을 설립한 후 1953년 한국전쟁 중에 별세하였다. 여섯째 호영은 만주에서 의병으로 활약하던 중 일본군의 습격으로 가족 전체가 함께 몰살당하여 시신도 찾지 못했다고 한다(이주홍, 2018).


  6형제 중 유일하게 광복의 기쁨을 누린 이는 이시영이었다. 이시영과 관련하여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형제는 만주 이주를 위해 재산을 처분했지만, 일본의 감시망에 발각될 것을 염려하여  6형제가 태어난 명동의  99칸 저택은 처분하지 않았다. 강점기에 총독부에 접수되어 해방 후 적산(敵産, 1945 8ㆍ15 광복 이전까지 한국 내에 있던 일제 일본인 소유의 재산을 광복 후에 이르는 말)으로 있었는데, 정부 수립 후 이승만 대통령이 이시영 부통령에게 명동의 생가터와 재산을 환원하겠다고 제안하였으나, 이시영 선생이 “한번 민족에 바친 것이니 되받을 수 없다”며 사양했다고 한다(이주홍, 2018). 형제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이시영도 다른 형제들의 유지를 끝까지 지켰고 재산에 초연했다. 이시영은 광복된 조국에서 초대 부통령에 당선됐지만, 국민방위군사건과 거창 양민학살사건을 거치면서 이승만 정부에 실망해 부통령직에서 사퇴한다. 그가 초지일관으로 지향하는 삶이 무엇인가를 짐작케 한다.


  후손과 후대는 6형제를 기리고 추모하고 있다. 서울 명동 YWCA 옆 거리 한쪽에는 형제의 생가터임을 알리는 표지석과 이회영 흉상이 있다. 여기에 머물지 않고 서울시에서는 2021년 남산예장공원에〈이회영 기념관〉을 열고 6형제의 독립에 대한 염원과 애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6월 10일 개관했는데 신흥무관학교 개교에 맞췄다고 한다. 조선의 최대 갑부였지만 나라를 빼앗기고 이국땅에서 영양실조로 굶어 죽은 이석영을 기리는 기념관은 경기 남양주시에서 조성한〈이석영 광장 및 역사박물관 Remember 1910〉이라는 역사체험관으로 명명되었다. 이석영은 수도권 일대에 882만㎡의 땅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 남양주 땅이 833만㎡를 차지했다. 이회영이 5형제와 전 가족이 만주로 이주해 독립운동에 헌신하자고 설득하였다면, 이석영은 거금을 모아 만주로 이주하여 독립운동을 할 수 있는 재정을 책임졌다(박정호, 2021). 요즘 지자체에서 다양한 역사문화콘텐츠를 발굴, 조성하는 데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지만, 남양주시에서 조선 최대 갑부 이석영의 땅이 남양주에 있었고 그 땅의 매각대금이 독립운동의 초석이 되었다는 점에 콘셉트를 두고 그의 이름을 딴 광장을 조성한 것은 탁월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한다.


  6형제가 기득권을 포기하고 자신들이 가진 모든 것을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쾌척한 것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월남 이상재는 6형제의 집단 이주 소식을 듣고 이렇게 평가했다고 한다. "동서 역사상 나라가 망한 때 나라를 떠난 충신 의사가 수백, 수천에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우당 일가족처럼 6형제와 가족 40여 명이 한마음으로 결의하고 나라를 떠난 일은 전무후무한 것이다. 장하다! 우당 형제는 참으로 그 형에 그 동생이라 할 만하다. 6형제의 절의는 참의 백세청풍(百世淸風)이 될 것이니 우리 동포의 가장 좋은 모범이 되리라."(이덕일, 2017: 65).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델이 되고도 남는 일이다. 저자는 6형제의 자발적 재산 헌납과 독립투쟁을 보면서 오귀스트 로댕(1840~1917)이 프랑스 칼레시의 부탁으로 조각한 6인의 조각상을 떠올리게 된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백년전쟁(1337~1453)에서 영국의 에드워드 3세는 항복할 뜻을 밝힌 성주에게 시민의 목숨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대표 6명이 맨발에 속옷만 걸치고 목에 밧줄을 감은 채 성 밖으로 걸어 나와 성문 열쇠를 바치길 원했다. 그때 칼레에서 가장 부자로 알려진 외스타슈 드 생피에르가 가장 먼저 자원했다. 뒤이어 시장, 법관 등 칼레시에서 가장 높은 지위와 신분을 지닌 노블레스가 솔선수범으로 뒤따랐다(염철현, 2021: 291-292). 6명의 용기와 헌신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이회영을 비롯한 형제들이 보여준 헌신과 희생은 우리나라를 넘어 세계사적으로도 오블레스 오블리주의 본보기라고 할 것이다.  


 
염철현. (2021). 《현대인의 인문학》. 고려대학교 출판문화원.

이덕일. (2017). 《이회영과 젊은 그들》. 역사의 아침.

박정호. (2021). 《중앙일보》. 〈이석영·회영 6형제가 남긴 뜻〉. 4월 1일.  

박초롱. (2017). 《연합뉴스》.〈서울 명문家' 이회영 6형제 발자취로 돌아보는 독립운동〉. 8월 2일.

이주홍. (2018). 《경향신문》. 〈이회영 선생 6형제의 삶, 그 거룩한 유산〉. 8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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