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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May 23. 2022

핀란드화(化)

약소국의 생존법, 누가 누구를 비난할 것인가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함에 따라 국제질서가 새롭게 재편되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당초 예상과 달리 미국과 유럽 국가의 군사적, 경제적, 인도적 지원을 받는 우크라이나가 군사대국 러시아를 상대로 선전하면서 자유민주국가 진영 대 권위주의 국가 진영 간의 장기전으로 치닫고 있다. 특히 이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에는 우크라이나의 NATO(북대서양 조약기구) 가입 시도가 꼽히고 있다는 점에서, NATO의 존재감과 역할이 조명받는 가운데 유럽의 비 NATO 회원국들이 회원 가입을 서두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현재 유럽연합(EU) 국가들 중 NATO에 가입하지 않은 국가는 스웨덴, 아일랜드, 오스트리아, 몰타, 키프러스, 핀란드 등 몇 개 국가에 불과하다. 이런 가운데 2022년 5월 핀란드와 스웨덴이 NATO 가입 신청서를 제출했는데 저자는 핀란드의 NATO 가입 신청에 주목하게 한다.


핀란드는 지정학적으로 우리나라와 매우 유사하다. 서쪽으로는 스칸디나비아의 최강국 스웨덴과, 동쪽으로는 러시아와 긴 국경선을 맞대고 있다. 러시아와의 국경선은 무려 1,340㎞에 달한다. 핀란드는 12세기 이후 약 700년간 스웨덴의 지배를 받다, 1809년 러시아에 합병되었는데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 1917년 말 독립을 선언했다. 독립 이후에는 친러, 반러 세력이 다툰 내전과 두 차례에 걸쳐 러시아와 전쟁도 치러야 했다. 이런 반러 정서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나치 독일 편에 섰다가 전쟁 말기에 독일과 다투는 사달도 벌어졌다. 지정학적으로 불가피했던 이런 경험 때문에 전후 핀란드가 택한 것이 중립국 외교다(김범수, 2022). 


전쟁의 승패는 객관적인 군사력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1939년 11월 핀란드가 소련의 침공을 받았을 때 군사력으로 따지면 핀란드는 소련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양국의 군사력을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할 정도였다. 핀란드의 인구는 400만 명에 12만 명의 군인을 보유했다. 소련은 인구 1억 7,000만 명에 병사는 200만 명이었다. 그럼에도 핀란드는 소련군의 침략에 맞서 완강히 저항했고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결과적으로 핀란드는 전체 국민 5%가 넘는 22만 100명의 사상자를 낸 끝에 패배했다. 소련의 막강한 군사력 앞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지만, 핀란드의 쉽게 포기하지 않고 시민과 영토를 수호하겠다는 불굴의 의지는 국제 사회에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이후 핀란드는 소련과의 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사전에 예방하는 ‘예방외교정책’으로 탈바꿈했다. 예를 들어, 핀란드 정부와 언론은 소련에 대한 비판을 자제하며 정상적인 민주국가에서 생각할 수 없는 자발적인 자체 검열까지 시도했다(다이아몬드, 2019: 111-121). 핀란드는 소련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도 할 말을 하지 않았다. 국제 외교에서는 핀란드식의 이러한 중립노선을 비아냥거리는 경멸조로 ‘핀란드화(Finlandization)’라고 말한다.


역사상 핀란드만큼 강대국 사이에서 눈치를 많이 본 나라도 드물 것이다. 강대국 사이에 낀 샌드위치 국가의 운명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모델을 보는 것 같다. 핀란드의 중립외교노선은 심하게 말하면 강대국 아래에서 할 말을 하지 못하고 강대국의 비위를 맞추는 국가정책이다. 그러나 핀란드는 와신상담의 중립외교노선을 견지하며 소련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면서 한편으론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발전시키고 다른 한편으론 국가 안보를 도모했다. NATO와 거리를 두었지만 소련 주도의 바르샤바조약기구에도 가담하지 않았다. 소련과 국경을 맞댄 나라 중 위성국으로 전락하지 않고 독립국 지위를 지킨 유일한 나라가 핀란드이다. 역사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이루어지는 법이다. 오늘날 강소국으로 부상한 핀란드는 소련으로부터 신뢰를 얻어야 한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유연하게 대응한 덕분에 부흥할 수 있었다고 평가받고 있다(다이아몬드, 2019). 


그런 핀란드가 1948년 이후 74년 간 지켜온 중립국 지위를 포기하고 NATO에 가입 신청서를 제출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고 할 것이다. 조동성 핀란드 명예영사가 주한 핀란드 페카 멧초 대사(임기 2021. 2~)에게 핀란드의 NATO 가입에 따른 러시아의 침공을 우려하는 질문을 했다. “러시아가 나토에 가입하겠다고 선언한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듯이, 나토에 가입하려는 핀란드를 침공한다면 많은 핀란드 군인과 무고한 국민들이 목숨을 잃지 않겠습니까?” 멧초 대사는 오히려 이렇게 반문했다고 한다. “전쟁에서 10만 명이 희생되는 것이 두려워 러시아 눈치를 본다면, 550만 국민이 러시아의 지배 하에 더 큰 희생을 당할 것 아니겠습니까?”(조동성, 2022) 핀란드는 국가의 입장과 나아갈 방향을 단호하게 결정했다.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했던가. 오랜 외세의 억압과 압제로부터 시달려온 핀란드의 NATO 가입 신청은 그래서 이목을 끌게 되는 이유다. 


국제사회의 일각에서는 강대국과 약속국 간에 대결이 극단으로 치달을 때 '핀란드화'를 하나의 해법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며칠 전인 2022년 2월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우크라이나 사태의 해법으로 ‘핀란드화’를 제기됐다. 우크라이나가 NATO에 가입하지 않는 대신, 러시아로 하여금 우크라이나가 서방과 교류할 수 있는 독립적 지위를 보장해 전쟁을 막자는 것이다(이용국, 2022). 저자는 마크롱 대통령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을 막아 볼 심산으로 우크라이나의 핀란드화를 제안했다고 생각하지만, 마크롱의 의도와는 다르게 우크라이나의 핀란드화는 우크라이나인들에게 모욕적인 말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국제 외교에서 ‘핀란드화’가 내포하는 의미처럼 우크라이나의 핀란드화는 우크라이나가 외형적으로 독립국을 유지하는 대신에 러시아의 정신적 식민지배를 받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핀란드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라 국제사회에서 오랫동안 견지해온 중립외교노선인 '핀란드화'를 포기하고 NATO에 가입 신청을 한 것은 오늘날 국제관계에서 중요한 교훈과 함의를 던져준다. 첫째, 오늘날 국제관계는 과거 20세기 중후반에 유효했던 중립지대론의 효능이 다했음을 시사한다. 오스트리아나 스위스처럼 국제관계에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균형외교를 추구하는 것은 냉혹한 국제질서가 가만히 놔두질 않는다는 사실이다. 국제사회에서 국가가 추구하는 지향점은 무엇이고, 이념의 색깔을 명확히 할 것을 요구한다. 둘째, 동맹의 보호를 받지 못하면 강대국의 먹잇감이 될 수 있다. 유럽 회원국이 NATO에 가입하려는 이유가 무엇일까? NATO 규약에 따르면 회원국이 비회원국으로부터 침략을 당하면 전체 회원국에 대한 침략 행위로 규정한다. NATO 회원국이 되면 국가 안전에 관한 한 보호받을 수 있기 때문에 옛 소련의 위성국이었던 헝가리, 루마니아, 슬로베니아, 슬로바키아, 알바니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등의 국가들도 NATO 가입을 완료했던 것이다. 우크라이나가 NATO 회원국이었다면 러시아는 쉽게 침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셋째, 국제 외교에서 가치동맹이 새롭게 부상했다. 가치동맹이란 인권, 민주주의, 평화 등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뜻을 함께 하는 국가들 간의 동맹을 말한다. 핀란드가 중립외교라는 이쪽도 저쪽도 아닌 입장을 취하다 NATO 회원국으로 가입 신청을 한 것은 자유민주진영이 추구하는 가치와 함께 하겠다는 명백한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결론적으로 초연결의 현대사회에서 한 국가가 영토를 수호하고 자결권을 행사하는 데 혼자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국가안보와 국익의 관점에서 합종연횡의 묘미를 어떻게 살릴 것인가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핀란드의 변신은 국가전략에 의미심장한 화두를 던진다.   



다이아몬드, 재레드. (2019). 《대변동》. 김영사.

김범수. (2022). 《한국일보》. 〈우크라이나의 핀란드화 해법〉. 2월 9일.

이용욱. (2022). 《경향신문》. 〈핀란드화(化)〉. 2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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