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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Jun 17. 2022

그린북

미국 흑인 차별의 흑역사

  영화〈그린북〉은 실화에서 영감을 얻은 영화로 천재 흑인 클래식·재즈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이다. 돈 셜리(Donald Walbridge Shirley, 1927~2013)가 미국 사회에서 겪는 인종차별을 고발한다. 돈 셜리는 클래식을 재즈에 접목시켜 클래식의 대중화에 기여하였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가 "그의 기교는 신의 경지"라고 평가할 정도로 뛰어난 연주자였다. 영화의 배경은 저자가 태어난 해인 1962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셜리가 남부 순회 연주회를 하면서 경험하는 유색인에 대한 차별을 소개한다. 예를 들면 노스 캐롤라이나에서는 셜리가 연주회를 마치고 화장실을 사용하려고 하지만 백인 지배인은 야외 화장실을 이용하게 한다. 셜리는 호텔로 되돌아가 화장실을 이용한 후 다시 연주회장으로 돌아왔다. 조지아주에서는 양복을 사러 양복점에 들어갔는데 주인은 흑인이라는 이유로 입어보는 것을 거절했다. 루이지애나주에서는 해가 진 후에 sundown town(일몰타운)에 들어가 경관의 불시검문을 받고 유치장 신세를 지기도 한다. 당시 일몰타운 입구에는 '흑인은 해가 지기 전에 마을을 떠나라'는 섬뜩한 포스터를 붙였다. 앨라배마주에서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백인 청중 앞에서 크리스마스 연주회를 하는데 흑인은 식사를 다른 곳에서 할 수 있다고 한다. 차별에 분노한 셜리는 계약 파기에 따른 손해를 감수하면서 공연을 취소한다. 


  제목과 같은 이름의 책《그린북》은 미국 내 흑인 여행자를 위한 가이드북으로 1936년부터 1966년까지 제작되었다. 뉴욕 시 우체국에서 근무하던 흑인 빅터 그린이 제작한 책이다.그린북》은 《The Negro Motorist Green Book》의 약칭으로 지역별로 흑인이 이용 가능한 숙박 시설, 레스토랑, 주유소, 이발소, 미용실, 나이트클럽 등을 표기한 책이다. 이 책의 부제는 'For vacation without aggravation'이다. 우리말로 옮기자면 '낭패 없는 휴가'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유색인이 사전에 정보를 알지 못하고 미국 남부에 여행을 가게되면 낭패를 보거나 문적박대를 당하기 일쑤다. 문명사회에서 특정 인종을 위한 안내 책자를 제작, 배포한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그것도 인권과 자유를 보편적 가치로 여긴다는 자유 민주주의 국가 미국 사회에서 말이다. 


  여기서 근대 이후 아프리카 흑인들이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에 어떻게 이주했으며, 그들의 생활은 어떠했는가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주'라는 표현은 지나치게 부적절하다. 노예 교역의 '상품'으로 팔려왔다는 표현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아프리카 노예 교역은 15세기 중반 포르투갈인들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본다. 일찍이 바다로 눈을 돌린 포르투갈인들은 아프리카 서해안에 출몰하면서 그곳에서 나는 후추와 상아는 물론 원주민을 노예(노예 교역업자들은 흑인을 '검은 상아'로 부르며 물건 취급을 함)로 데려와 유럽 시장에 팔았다. 포르투갈의 엔리크 왕자는 1441년부터 6년에 걸쳐 아프리카에서 1000명이 넘는 흑인노예들을 본국에 데려왔다(정효진, 2022). 노예무역이 수지가 많이 남는다는 소문이 나면서 유럽의 다른 국가들은 너도나도 뛰어들었다. 포르투갈의 뒤를 이어 스페인,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덴마크, 스웨덴, 독일 등이 노예무역에 합세했다. 유럽의 상인들은 아프리카 추장들에게 모직, 비단 따위의 직물과 칼, 무기, 화약, 와인을 포함 장신구, 방울, 팔지, 유리구슬과 같은 하찮은 물건을 주면서 노예를 사들였다(콸스, 2002: 25-29).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 세 대륙 간에 대규모 노예 교역이 이루어졌던 4세기 동안 1200만에서 150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화물처럼 배 밑창에 실려 대서양을 건너 운송되었다(메이에, 1998).


  아프리카 흑인 노예가 본격적으로 아메리카 대륙으로 유입되기 시작한 시기는 16세기부터였다고 한다. 대부분의 흑인 노예들은 아프리카 서부 및 중부 내륙지역 출신으로 아프리카 지배계급의 손에 잡혀와 유럽의 노예상들을 통해 거래되었다. 참 서글픈 일이다. 유럽인들의 상술에 맛 들인 아프리카 흑인 지도자들이 동족들을 유럽인들에게 팔아넘겼다. 노예 선장들은 가능한 한 많은 노예들을 싣기 위해 야만적인 적재 방법을 고안해냈다. 노예선의 배치도를 보면 마치 노예들을 숟가락처럼 나란히 눕혀 뱃머리를 향해 서로 포개지게 배치했다. 노예 선장들은 정원의 두 배에 달하는 노예를 생선 말리듯이 늘어놓는 방식으로 450명 정원인 선박에 600명 정도를 실었다(메이에, 1998: 57-66).


  유럽에서는 노예제도의 운영과 관련한 법을 명문화했다. 예를 들어 영국 식민지 버지니아주(1607년 영국이 북아메리카 대륙에 세운 첫 식민지) 의회가 1699년에 통과시킨 '노예의 과실 치사에 관한 법령'을 살펴보자. "(...) 어떤 노예든지 주인에게 저항하거나 혹은 그를 교차하라는 주인의 명에 따른 자에게 저항했을 경우, 버릇을 가르치다가 극단적인 경우 노예가 죽게 되더라도 이는 살인죄로 보지 않는다. 그래서 주인은, 혹은 주인의 명을 받아 징벌을 준 사람은 이에 대한 법적 제재로부터 면책된다"(모건, 1998: 385-386). 이 법령에 따르면 노예의 징벌이 설령 치사에 이르더라도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노예의 목숨은 전적으로 노예 소유주에게 달려 있었다. 특히 도망 노예에 대해서는 "누가 죽이더라도, 또 어떤 방식으로 죽이더라도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라는 법령을 마련하였으며, 노예 소유주는 이렇게 살해된 노예에 대한 손실을 식민정부로부터 보상받았다(모건, 1998: 386).


  미국에서 노예는 어땠을까? 18세기 미국은 영국에서 독립한 뒤 북부는 상공업, 남부는 농업이 발달하였다. 특히 대농장(플랜테이션)이 많은 남부의 백인 농장주들은 노동력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을 경쟁적으로 사들였다. 백인 농장주들은 흑인 노예들은 면화, 담배, 사탕수수 등 열대작물을 재배하는 플랜테이션에 투입되었다. 미국은 대량의 흑인 노예들을 노동력으로 삼아 저렴한 가격의 농산물들을 유럽으로 수출하면서 큰 부를 창출할 수 있었다. 노예들이 어떤 대우를 받았는가에 대해서는 일일이 말이 필요 없을 정도다. 백인들은 흑인들을 짐승만도 못하게 다루었다. 신체적 폭행과 고문 등의 비인간적인 대우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싶다. 산업이 발달한 북부는 노예제에 반대하는 분위기였지만, 남부는 노예가 없으면 경제가 돌아가지 않을 정도로 흑인 노예가 차지하는 노동력의 비중이 높았다.


  미국에서 노예제 폐지를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가.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재임 1809~1865)은 남북전쟁(1861~1865)이 한창 진행 중이던 1863년 1월 1일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노예해방선언을 했다. 그리고 종전 후 연방의회는 1865년 12월 6일 헌법 수정 제13조를 비준하였는데, 조문에는 "노예 또는 강제노역은 당사자가 정당하게 유죄판결을 받은 범죄에 대한 처벌이 아니면 합중국 또는 그 관할에 속하는 어느 장소에서도 존재할 수 없다"라고 명시하였다(서정갑, 2001: 444). 이 헌법 조문은 합중국에서의 노예제 폐지를 완성시켰다는 의미가 있다. 


  노예해방선언과 연방헌법 제정으로 미국에서 노예제가 종료되고 인간으로서 흑인들의 기본권은 보장되었을까. 섣부른 기대다. 미국은 제도로서 노예제는 폐지하였지만 미국의 백인들은 아프리카에서 팔려온 흑인들을 인간으로서 감당할 수 없는 취급을 했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 경제공황,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냉전 등 굵직한 국내외의 문제에 직면하면서 미국 사회에서 흑인들의 인권 보장을 위한 실질적인 조치들은 무시되거나 유예되었다. 미국에서 흑인들의 인권과 사회경제적 처우 문제가 전면에 등장하기까지는 노예해방선언 이후 1세기를 필요로 했다. 


  영화〈그린북〉의 배경은 1960년대 미국 사회다. 60년대 미국은 그야말로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시기였다. 인종차별 이슈 말고도 베트남 전쟁, 페미니스트, 히피, 매카시즘 등 미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빅이슈들이 전면에 부상했다. 특히 인종차별 반대를 위한 대규모 시위는 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인도에서 온 외교관이 호텔에서 쫓겨난 뉴스는 자유민주주의를 대표하는 미국의 치부를 드러냈고 국제적으로도 비난을 받았다. 미국과 소련이 민주진영과 공산진영을 대표하여 냉전으로 대립하던 시기에 미국은 도덕성이 도마 위에 올라 난도질을 당했다. 미국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급기야 존슨 대통령은 민권법을 제정하는 등 법률적으로 인종차별을 폐지하고자 노력을 경주했다. 


  민권법 제정 한 해 전인 1963년 8월 마르틴 루서 킹 주니어 목사는 워싱턴 D.C.로 행진하면서 에이브러햄 링컨 동상 앞에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유명한 연설을 하여 수많은 미국인과 국제사회에 커다란 공감을 일으켰다. 기념비적인 연설이다. 그의 연설문을 읽다 보면 피가 용솟음치고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것을 느낀다. 장문의 연설 중 일부를 옮겨보자. 


  100년 전, 지금 우리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저 동상의 주인공 에이브러햄 링컨이 노예해방선언에 서명했습니다. 노예해방선언은 사그라지는 불의의 불꽃 속에서 고통받아온 수백만 흑인 노예들에겐 희망의 봉홧불이었으며, 기나긴 속박의 밤을 걷어내는 찬란한 기쁜의 새벽이었습니다. 

  그로부터 10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흑인들은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10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흑인들은 차별의 족쇄를 찬 채 절름거리고 있습니다. 10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흑인들은 물질적 풍요의 바다에서 가난의 섬 안에 고립되어 살고 있습니다. 10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흑인들은 미국 사회의 구석진 곳에서 고통당하며 망명객처럼 부자유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치욕스러운 상황을 극적으로 전환하기 위해서 이곳에 모였습니다. 우리는 명목뿐인 수표를 현금으로 바꾸기 위해서 수도 워싱턴에 모였습니다. 미국의 건국에 참여한 사람들이 서명한 헌법과 독립선언서의 화려한 문구들은 약속어음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흑인 백인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는 양도할 수 없는 '생명권, 자유권, 행복추구권'이 있다는 내용의 약속어음에 서명을 했습니다. 

  미국은 흑인 시민에 대해서 이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미국은 흑인들에게 이 신성한 약속어음에 명시된 현금을 지급하지 않고 '예금잔고 부족'이라는 표시가 찍힌 부도수표를 되돌려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의라는 이름의 은행(bank of justice)은 결코 파산하지 않을 것입니다. 미국이 가지고 있는 기회라는 이름의 거대한 금고 속에 충분한 잔고가 남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약속어음이 명시하는 자유와 정의를 되돌려 받기 위해서 이곳에 모였습니다.


  킹 목사의 연설은 유려하면서도 강렬한 호소력을 갖추고 있으며 무엇보다 절묘한 은유로 청중들의 가슴을 후벼 팠다. 그는 백인들이 노예를 해방하고 인종차별 를 폐지하여 흑인들에게 자유와 정의를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약속어음(promisory note)에 비유하고, 백인들은 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부도(insufficient funds)를 냈다고 일갈했다. 영성이 풍부하고 통찰력이 돋보이는 그의 연설은 미국 정부와 의회 그리고 일반 시민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민권법(1964년) 제정 등 흑인들의 기본권 신장을 위한 일련의 법률적, 제도적 조치들이 마련되는 계기가 되었다.


  차별이 차별금지를 위한 관련 법률 제정만으로 해결되는 것을 보았는가. 법에 저촉되는 명시적 차별은 줄어드는 효과는 있겠지만, 사람의 마음 한켠에 자리 잡고 있는 암묵적 차별은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민권법은 공공장소에서 흑인을 차별할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지만, 백인들이 흑인을 차별하는 방법은 기발했다. 백인들은 '백인과 흑인을 분리하지만 동등하다'는 논리를 만들었다. 이른바 흑백분리 평등의 원리(separate but equal doctrine)다. 이 원리에 따라 백인 학교와 흑인 학교를 분리하고, 수돗물도 백인용과 유색인용을 구분하고, 심지어 영혼을 구제한다는 교회조차도 커튼을 쳐 백인 신도와 흑인 신도를 구분했다. 1954년 연방대법원은 흑백분리 평등의 원리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렸지만, 이후로도 흑백 분리와 흑인 차별은 백인들에게는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관행으로 깊이 자리 잡았다. 


  영화에서는 주인공 돈 셜리가 남부의 유력 백인들의 초청으로 피아노 연주를 하지만, 식당에서 백인들과 함께 식사를 할 수 없었으며, 하물며 식당에 있는 화장실을 사용할 수도 없었다. 재능 있는 흑인들은 백인들을 위한 기쁨조에 불과했다. 오죽했으면 흑인 여행자들만을 받아주는《그린북》을 제작하였을까 싶다. 


  오늘날 미국 정부를 위해 일하는 흑인들을 보면 상전벽해의 변화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재임 2009~2017)은 최초의 흑인 출신 대통령으로 임기를 두 번 역임했다. 다수의 흑인들이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에서 고위직으로 일한다. 조 바이든 행정부의 로이드 제임스 오스틴은 최초의 흑인 출신 국방장관이다. 카린 장-피에르는 흑인 여성 최초로 백악관 대변인이 되었다. 바이든 대통령 출범 이후 임명된 각료 및 각료급 인사들 가운데 유색인종이 50%를 차지한다. 미국에서 묵시적인 인종차별은 여전하지만 큰 틀에서 보았을 때 인종통합을 위한 노력은 상당한 성과로 나타나고 있다고 보여진다.  


메이에, 장. (1998). 《흑인노예와 노예상인: 인류 최초의 인종차별》. 지현 옮김. 시공사. 

모건, 에드먼드 S. (1998). 《미국의 노예제도 & 미국의 자유》. 황혜성・서석봉・신문수 옮김. 비봉출판사.

서정갑. (2001). 《부조화의 정치: 미국의 경험》. 법문사.

카슨, 클레이븐. (2002).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이순희 옮김. 바다.

콸스, 벤자민. (2002). 《미국 흑인사》. 조성훈・이미숙 옮김. 백산서당.

장현구. (2017). 《연합뉴스》. 차별당한 미국 흑인을 위한 생존 여행 안내책 '그린북'. 3월 2일.

정효진. (2022). 《조선일보》. 미지의 땅 찾아 망망대해로... 200년간 이어진 바닷길 개척. 6월 22일.

〈그린북〉. (2019).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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