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염철현 Apr 28. 2023

다문화사회의 성공 요건 2

문화에 대한 역지사지

진부하게 읽힐지 모르겠지만 군대 이야기를 하면서 성공적인 다문화사회를 위해서는 문화에 대한 이해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1980년대 초 군복무를 했다. 당시에는 전두환이 쿠데타로 정권을 빼앗은 신군부 독재가 기승을 부렸고 사회 분위기는 암울했고 대학에는 민주화 쟁취를 위한 시위가 계속되었다. 저자는 등록금 조달은 물론 생활고에 찌들었다. 과외금지로 서울 유학비 조달은 더 어려웠다. 그렇다고 면학에 정진한 것도 아니었고 시국만 탓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군복무라도 빨리 마치자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히 광주지방병무청 앞을 지나다 카투사 시험 공지를 봤다. 카투사에 대해서는 장밋빛 이야기만 전해 들었고, 그것도 군대냐는 비아냥을 들을 정도로 편한 군생활을 할 것으로 생각했다. 한동안 카투사는 논산훈련소에서 차출하는 제도를 시행해 왔지만, 배경 좋은 사람들의 입김이 작용하는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해 공개시험으로 변경했다. 운 좋게 카투사 시험 2기로 합격하였다. 


카투사 시험을 볼 때만 해도 카투사는 소설이나 노래에 등장하는 인물로 생각했다. 실제 톨스토이의 소설 <부활>에는 청년 귀족 네프류도프의 하녀로 있다가 그에 의해 순결을 잃고 집에서 쫓겨난 '카츄샤'라는 인물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카츄샤> 영화가 제작되었다. 알고 보니 군인 카투사는 극 중의 인물도 노래에 등장하는 주인공도 아니었으며 단지 발음이 비슷했을 뿐이었다. '카투사'(KATUSA)는 미군을 지원하는 한국군을 뜻하는 'Korean Augmentation Troops to the United States Army'의 두문자였다. 카투사는 한국전쟁 중이던 1950년 7월 창설되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더글라스 맥아더 사령관의 협의로 창설되었는데 미군은 우리나라 지리에 대한 지식과 미군과 한국군 간의 소통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논산훈련소에서 5주간의 기초훈련을 마친 후 평택(캠프 험프리스)에서 3주 동안 미군에서 생활하는데 필요로 하는 미국 문화와 미군 시스템에 대해 공부했다. 마지막 주에는 배치고사를 토대로 전국 각지의 부대로 배치되었다. 평택에서는 저자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으로 차출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다른 동기를 데려갔다. 저자는 또래 중에서도 키도 크고 미군과 비교해도 뒤떨어지는 체격이 아니었기에 JSA와 같은 특수부대에서 욕심을 낼만 했을 것이다. 저자는 부천 캠프 머셔(현재는 한국군 주둔)에 배치를 받았다. 부대 선임자의 인솔에 따라 트럭을 타고 부대로 들어가면서 눈을 의심했다. 부대정문에 걸린 부대마크는 삽자루와 곡괭이가 X자 모양이었다. 배치된 부대는 전투공병(Combat Engineering)이었다.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일하는 부대다. 카투사라고 하면 용산에서 사무를 보고 외박이나 휴가를 자주 사용하는 보직으로 알고만 있었는데, 카투사에도 공병부대가 있는 줄은 생각도 못했다. 평택에서 치른 영어 시험 점수에 따라 보직이 달라졌는데, 중위권에 해당하는 병사들은 공병으로 배치되었다고 전해 들었다. 상위권은 용산 8군 본부에 배치되었고, 나중에 알고 보니 용산에 근무하는 동기들은 그야말로 말로 듣던 카투사 생활을 하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은 일부에서 벌어지는 일을 전체인양 이야기 하기 마련이다. 


부대는 대대급으로 전투공병답게 공사에 필요한 중장비부대부터 지원부대가 있었는데 저자는 지원부대에 배치되어 그야말로 공병으로서 부대생활을 했다. 군기도 셌다. 카추사 내무반이 따로 있어 근무 후에는 자체 집합이 있었다. 낮에는 미군과의 소통 문제와 문화 갈등으로 시달리고 밤에는 한국군 선임들에게 시달렸다. 차라리 한국군에 입대했으면 좋았을 걸 하는 후회도 많이 했다. 말이 카투사지 미군복을 입은 공사판의 노동자 또는 막일꾼이었다. 미군 상관의 지시에 따라 다리를 놓고, 창고를 짓고, BOQ(장교막사)를 수선하면서 망치질을 하고 콘크리트를 치고 페인트를 칠했다. 토목건설공사의 노동자였다. 전시에 전투공병으로서 임무를 위해  부대 작전에 동원되고 한미연합훈련(Team Spirit)에서는 철제 부교(浮橋)를 놓고 비행장을 깔았다. 당시만 해도 미군 장비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사용하던 것들이 많았다. 한 겨울 경기도 여주에서 몇 날 며칠 밤을 새우며 축구장 두 세배 면적에 비행장을 깔았는데 수송기가 한번 착륙하고 나면 다시 걷어내야 했다. 저자의 군대생활을 주변에 이야기하면 지금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편하게 군생활을 하는 것으로 알려진 카츄샤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쉽게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다행히 저자는 농촌 환경에서 성장하면서 흙도 만져보고 삽이나 곡괭이를 잡아봐서 공병이 하는 일에 그나마 적응이 빨리 되었지만, 도회지 출신의 카투사들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데 애를 먹었다. 그들도 이런 카투사 부대가 있는 줄 몰랐다고 한다. 미군 공병 부대에서 생활하는데 어려운 것 중 하나는 도구를 사용하는 방식과 문화과 달랐다. 우리나라에서 톱질이나 대패질은 앞에서 끌어당기는 형식이지만, 미군의 톱은 밀어내는 방식이었다. 미군 톱을 사용하여 나무를 자를 때는 팔힘이 강해야 했다. 미군 톱에 익숙하기 전까지는 팔힘이 약해 톱날이 휘어지곤 했다. 삽의 구조와 사용 방식도 달랐다. 우리나라 삽의 구조는 성인 키보다 작은 길이에 끝부분에는 삼각형의 손잡이가 있지만, 미군 삽은 손잡이가 없는 대신 성인 키보다 더 길었다. 삼각형의 손잡이에 의지해 삽질을 하던 습관에서 일자형의 삽을 사용하기란 보통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숙소는 2인 1조로 배정되었는데 카투사 1명과 미군 1명을 묶어 방을 쓰게 했다. 문화가 다른 병사들이 서로를 이해하도록 하는 물리적 배치였다. 한국군끼리 방을 쓰게 되면 운이 좋은 것으로 생각했다. 문화적 동질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 직접 경험하였다. 흑인 병사와 방을 같이 쓰게 되었을 때의 경험이다. 당시만 해도 흑인에 대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이 있었지만 웬만한 것은 이해하고 인내하면서 근무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인내심에 한계를 느끼는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제일 견디기 어려운 문화는 흑인 병사가 사용하는 독한 향수와 시끄러운 헤비메탈 음악이었다. 향수는 흑인 피부에서 풍기는 고약한 냄새를 중화시키기 위한 노력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지만, 음악을 시끄럽게 틀고 마치 혼자 방을 쓰는 것처럼 동료를 배려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참기 어려웠다. 정중하게 부탁도 하고 원만하게 잘 지내보려고 했지만 막무가내일 때도 있었다. 흑인 병사들이 한국군을 무시한 결과다. 카투사는 한국 주둔 미군 증원군이지만, 미군 병사가 보았을 때는 미군에 고용된 용병에 불과했다. 미군 병사들도 한국군을 얕잡아 보고 남한을 지키는 미군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논리다. 


미군들은 카투사들에게 화가 난 것처럼 보였는데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미군들은 직업군인으로 각각 특기가 있어 제 몫을 하고 있는데 카츄사들은 제 몫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논산훈련소에서 차출된 카투사들이 훨씬 더 일을 효율적으로 잘했다는 주장이었다. 특히 공병 업무는 몸을 움직여 일을 하며 업무 성과가 눈으로 보이기 때문에 잘 훈련된 미공병과 카투사는 비교불가였다. 서로 큰 소리를 치며 말싸움 끝에는 소대장이나 선임하사에게 진술서를 써야 하는데, 문법위주의 시험준비를 위한 영어공부는 많이 했지만 논리적으로 주장을 펼치는데 한계가 있었다. 한국의 고학력 징집병과 미국의 직업군인 간에 벌어진 문화 충돌의 양상을 일일이 소개하기란 지면이 부족할 지경이다. 양 문화를 매개하는 도구는 영어라는 언어인데 그 도구가 작동하지 않으면서 불필요한 문화적 충돌까지 겪게 된 것이다. 


저자가 다문화사회를 성공시키는 요소로서 다문화수용성지수를 키우자라고 주장하게 된 결정적인 순간이 있었다. 아침에 공사 현장으로 가기 전에 면도를 하는데, 옆에서 면도하던 흑인 병사가 면도날로 얼굴에 상처를 냈다. 무의식적으로 흑인의 피는 검은색일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었나 보다. 흑인 병사의 얼굴에서 흐르는 피가 저자의 피색과 같은 선홍색이었다. 저자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붉게 달아올랐고 나 자신을 진지하게 돌아보는 순간이었다. 저자 나름대로 피부색이나 인종에 따라 상대를 폄하하고 무시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흑인조차 한국군을 깔보고 무시하는 것에 대해 약속국의 서러움을 느꼈는데, 저자 스스로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그를 무시하고 있었다. 내로남불식의 사고체계였다. 흑인 병사도 나와 똑같은 사람인데 말이다. 단지 서로 다른 것이 있다면 문화일 것이다. 


문화는 사람이 만든 모든 생활양식과 상징체계라고 한다. 국가마다 민족마다 다양한 문화가 존재하고 서로 독특한 자기 문화를 공유한다. 인디언 속담에 다른 사람을 비판하려면 '그 사람의 신발을 신고 1마일을 걸어보라'고 한다. 나와 다른 문화권에 사는 사람에 대해 함부로 이야기할 것이 아니다. 다문화수용성을 향상하는데 저자처럼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과 직접 부딪히며 생활하는 방식도 있겠지만 다문화교육으로 간접적인 경험을 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효과적인 방법이다. 한창 혈기 왕성한 20대에 겪은 문화충돌은 저자에게 다문화수용성을 키울 수 있는 기회가 되었던 것 같다. 아픈만큼 성숙하고 나와 다른 타자를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양한 피부색을 가진 미군들과의 생활에서 얻은 다문화적 감수성 훈련과 시행착오는 학교에서 다문화 관련 교과목을 가르치고 관련 문헌을 집필한 수 있는 강력한 동기부여가 되었다. 다문화사회를 이끄는 힘은 문화적 다양성이고, 그 다양성은 창의성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다. 문화에 대한 역지사지야 말로 다문화사회를 성공으로 이끄는 첫 번째 요인일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교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