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를 국가통치철학의 근간으로 삼았던 조선은 궁궐을 짓는데도 유교철학에 근거한 원리에 충실했다. <주례>의 '좌묘우사 전조후침'의 원리를 따랐다. 이 원리에 따라 북악산 아래 경복궁을 중심으로 좌에 종묘, 우에 사직단을 배치했다. 국왕이 정사(政事)를 보는 건물은 앞에 배치하고 생활 건물은 뒤편에 배치했다. 황궁의 구조는 5문 3조 5단 월대이고, 왕궁의 구조는 3문 3조 3단 월대다(2023년 10월, 일제에 의해 훼손된 경복궁 월대가 복원됐다. 월대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왕과 백성이 소통하는 장소로써 궁궐 정문에 난간석을 두르고 기단을 쌓은 경우는 광화문 월대가 유일하다.) 왕궁인 경복궁의 경우는 이 원리에 따라 광화문, 흥례문, 근정문을 거쳐 정전인 근정전에 이르게 된다. 3조는 외조, 치조, 연조를 말한다. 외조는 외국사신을 맞이하고 문무백관을 조회하는 곳이다. 치조는 왕이 정무를 보는 곳이다. 연조는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이다(염철현, 25-40). 그러나 경복궁은 1592년 임진왜란으로 불에 탔다. 유교이념을 통치철학으로 구현하고자 야심 차게 완성했던 경복궁이 통치를 받던 백성들에 의해 소실된 것이다. 소실된 경복궁은 오랫동안 방치되다 1867년(고종 5년)에 중건됐다.
그 경복궁 안에 또 다른 궁이 지어졌다. 1873년(고종 10년)에 경복궁 가장 북쪽 한적한 곳에 건청궁(乾淸宮)을 지었다. ‘하늘이 맑다’는 의미의 집이다. 건청궁은 왕과 왕비가 한가롭게 휴식을 취하면서 거처할 목적으로 지어졌다. 앞에는 큰 연못을 파고 연못 가운데 정자(香遠亭)를 꾸몄다. 당시 조선의 재정으로는 경복궁 중건도 힘에 벅찬 대역사(大役事)였다. 당백전을 발행하고 원납전을 거둬들이면서 민심은 이탈됐고 국가 경제는 바닥이 보였다. 고종의 건청궁 준공은 비밀리에 진행됐고 왕의 사비인 내탕금으로 지어졌다고 하지만 그 재원은 곧 백성의 혈세다. 정치적으로는 고종이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섭정(攝政)에서 벗어나 친정체제를 구축하려는 정치적 자립을 상징한다고 하지만 석연치 않다. 국가 재정이 고갈된 상황에서 궁궐 안에 또 다른 궁을 지어 왕실의 위세를 떨치고자 했다. 건물 위의 하늘은 맑을지 몰라도 백성의 마음은 검은 구름으로 뒤덮고 있었다.
1887년 1월 26일(음 1월 3일) 경복궁 건청궁에 처음으로 전깃불이 들어왔다. 미국의 에디슨(Thomas Edison)이 전기를 발명한 지 8년 만이었다. 16촉(1촉광은 양초 1개의 밝기) 광열등 750개를 점등할 수 있는 규모였다. 1894년에는 창덕궁에 제2전등소가 세워졌는데, 건청궁 전등소의 약 3배에 달하는 규모였다. 당시 건청궁의 발전기는 증기식이었는데, 향원정(香遠亭) 연못의 물을 끓어 석탄을 연료로 돌렸다. 일종의 화력발전소다. 요즘 발전소를 당시에는 전등소(電燈所) 또는 전기소(電氣所)라고 불렀는데 기계 소리가 마치 천둥소리처럼 요란스러웠다.
조선인들은 서양 문명의 총아인 전깃불을 보면서 여러 가지의 이름을 붙여 불렀다. 전깃불을 ‘건달불(乾達火)’이라고 했다. 흥미로운 이름이다. 전깃불을 사람으로 비유했다. 건달이란 일정하게 하는 일도 없이 건들거리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전깃불이 제멋대로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하고 돈을 축내는 게 꼭 건달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발전기 가동으로 연못의 수온이 올라 물고기가 떼죽음 당하자 물고기를 찐다는 뜻의 ‘증어(蒸漁)’라고 불렸다. 또 연못 물을 먹고 건청궁 처마 밑을 벌겋게 달군다고 ‘물불’, 묘하다고 ‘묘화(妙火)’, 괴상한 불빛이라며 ‘마귀불(愧火)’라고도 했다. 덕수궁 전기발전소는 발전기 돌아가는 소리가 얼마나 덜덜거렸던지 덕수궁 전깃불을 “덜덜불”이라 했고, 정동 골목은 “덜덜 골목”이란 별명이 생겼다.
동시대에 사용하는 언어를 보면 동시대인이 문화를 수용하는 사고체계와 세계관을 짐작할 수 있는 법이다. 조선은 전깃불이 처음 들어왔을 때 전기의 작동 원리는 제쳐두고 밖으로 나타난 현상을 의식구조에 적용하여 '건달'에 '불'을 합성하여 '건달불'이라고 불렀다. 인간의 언어는 의식이란 거푸집에서 사고작용을 통해 나오는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발상이다.
2014년 우리나라에서 암흑세계에 광명을 비춰줬던 백열등이 사라졌다. 사라졌다는 표현보다는 퇴출당했다. 건청궁에 불을 밝힌 지 127년 만의 소등(消燈)이다. 그동안 백열전구는 형광등이나 발광다이오드(Light Emitting Diode, LED) 램프 같은 새로운 조명기기에 밀려 사라져 갔다. 필라멘트에 전류를 흘려 나오는 열로 빛을 내는 백열전구는 전력 소비가 많고 수명이 짧은 단점을 가지고 있다. 백열전구에 투입되는 전력량 가운데 5%만이 불을 밝히는 데 쓰이고 나머지 95%는 열에너지로 발산된다고 한다.
여기서 LED 기술에 대해 부연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사실은 반짝반짝 빛을 발하는 LED가 반도체라는 점이다. 흔히 반도체를 생각하면 작고 얇은 반도체 IC칩을 생각하지만, LED도 전류를 가하면 빛을 발하는 반도체 소자이다. 반도체는 크게 단원소 반도체, 화합물 반도체, 그리고 유기물 반도체로 분류되는데, LED는 이 중 화합물 반도체에 속한다. LED는 전기에너지를 빛에너지로 변환시켜 주는 ‘광반도체’이다. LED는 ‘고효율, 저전력, 장수명’을 특징으로 한다. LED는 기존 백열등 대비 1/5 수준의 전력만 소비하기 때문에 에너지를 크게 절감할 수 있다. 백열등 대비 15배 이상의 긴 수명으로, 하루 10시간씩 1년을 사용한다고 가정했을 때, 기본적으로 30년 이상 사용할 수 있는 장수명이다. 이렇게 사용했을 때 기존 조명 대비 전기요금이 최대 87% 수준으로 절감된다. 무엇보다 LED는 형광등과 달리 수은(Hg)을 전혀 함유하지 않아, 이산화탄소(CO2)가 발생하지 않는 친환경 기술이다(삼성반도체 뉴스룸, 2013).
과학을 통해 밝혀진 백열등의 특성을 놓고 보면 136년 전 경복궁 건청궁에 처음 켜진 전깃불을 보고 '건달불'이라고 불렀던 선조들의 선견지명이 돋보인다. 오랫동안 백열등은 건달노릇을 해온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과학적인 사고와는 동떨어진 조선인들이 서양의 과학을 수용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용어이긴 해도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의 인문적 혜안이 맞았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 아니겠는가. 그들이 오늘날의 조명기기를 보고 어떻게 부를까 궁금하다.
김원모. (2002). 한미 외교관계 100년사. 서울: 철학과현실사.
신석호 외. (1980). 민족의 저항. 서울: 신구문화사.
염철현. (2021). 현대인의 인문학. 서울: 고려대학교출판문화원.
민병근. (2014). 근대조명 - 건청궁(乾淸宮)과 전등소(電燈所)의 ‘건달불’ ②. 대한전기협회, 시리즈 450호.
김기찬. (2013). 중앙일보. 백열전구 퇴출…1887년 첫 불 켠 '건달불' 사라진다. 7월 17일.
박경룡. (2022). 세종대왕신문. 건달불에 얽힌 한국 도깨비, 일본 영혼, 서양 귀신 사연. 3월 15일.
이향우. (2021). 중앙일보. 고종이 친정 펴려고 사비로 지은 건청궁의 비극. 8월 17일.
LED란 무엇일까? LED의 기본 원리와 종류, 장점 https://news.samsungsemiconductor.com/ 삼성반도체 뉴스룸(2013.0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