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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Oct 14. 2023

가을(秋)

 우리의 삶이란 땅을 옥토(沃土)로 바꾸는 시간

폭염과 장마가 유별났던 여름을 보내고 맞이하는 가을이 반갑다. 가을은 여름과 겨울의 완충지대 역할을 하는 절기다. 여름 다음에 곧바로 겨울로 가지 않고 여름과 겨울 사이에 가을이란 완충지대가 있어 얼마나 다행인 줄 모르겠다. 기후변화로 가을이 간절기 대우를 받고 있지만 엄연히 사계절 중 하나이다. 우리가 '가을'이란 계절에 겨울을 맞이하기 위한 워밍업을 하지 않고 곧장 추운 겨울로 간다면 큰 기온차를 감당하기 힘들 것이다.


가을은 사계절 중 세 번째 계절을 뜻하는 명사지만, 사전적인 의미도 주목을 끈다. '가을하다'라는 동사가 있다. "벼나 보리 따위의 농작물을 거두어들이다"라는 의미다. 괜히 가을을 수확의 계절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닐 것이다. 가을 자체가 곧 '수확하는 일'이요 가을걷이다. 가을걷이 때에는 일이 많은 농촌에서 누구나 바쁘게 움직이고 일손을 거들게 됨을 비유하는 속담도 흥미롭다. '가을에는 부지깽이도 덤벙인다’ ‘가을철에는 죽은 송장도 꿈지럭한다' ‘가을에는 대부인 마누라도 나무 신짝 가지고 나온다’ 부지깽이와 죽은 송장조차도 살아 움직이며 바쁜 일손을 돕고 가죽신발 신고 안방에 있어야 할 고관대작의 부인도 들녘으로 나온다고 한다.


많은 사람이 가을을 압축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사자성어로 천고마비(天高馬肥)를 떠올릴 것이다. 글자대로라면 '하늘은 높고 말이 살찐다'라는 의미로 생활하기 안성맞춤인 날씨에 먹거리도 풍성한 최상의 절기를 나타낸다. 하지만 본래 뜻은 무섭고 섬뜩할 정도다. ‘북방의 흉노족이 키운 말들이 잔뜩 살쪘으니, 이제 곧 그들이 쳐들어와 식량과 가축을 노략질해 갈 것이다.’ 중국 역사에서 천고마비는 북방 흉노족의 침략을 경계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秦) 시황도 흉노를 두려워 만리장성을 쌓았다. 심지어 중국 한고조(유방)는 "만리장성 북쪽으로 활을 쏘는 나라는 흉노 왕(선우)에게 명령을 받고, 장성 안쪽의 나라는 짐이 통치한다"라는 조칙을 발표했으며, 황실의 공주를 선우에게 시집보내고 해마다 일정량의 무명, 비단, 술, 쌀 등과 같은 식품을 보내 형제의 나라가 될 것을 약속했다(사마천, 264-265). 한나라와 흉노와의 관계는 중국식 사대외교의 단면을 보여준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 흉노족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흉노족은 중앙아시아 스텝지방에서 나타난 몽골계 기마민족으로 중국에서는 ‘흉노’족으로 유럽에서는 '훈'족으로 불렸다. 유럽에서 '훈'은 욕의 의미로도 사용하는데, ‘훈족이 문 앞에 와 있다’는 말만 들어도 두려움에 몸을 떨어야 했다. 황화(黃禍, yellow peril), 즉 '백인종에게 위협이 되는 황인종'의 등장이다. 프랑스인들은 제2차 세계대전의 원흉 히틀러 나치를 ‘20세기 훈족’이라 부를 정도로 훈족은 증오와 멸시의 대상이었다. 그들이 기마민족 답게 빠른 기동성과 엄청난 파괴력으로 유럽인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는 반증이다.


흉노는 중앙아시아, 서북인도, 동유럽까지 진출하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흉노의 후예가 유럽에 세운 나라가 훈제국이다. 유럽의 헝가리(Hungary)는 훈족이 세운 국가라는 주장도 있다. 물론 헝가리는 자신의 조상이 마자르족이라고 강조하면서 아시아계 훈족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국가의 기원과 정체성에 큰 혼란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2005년에는 훈족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헝가리인들이 헝가리 정부 인권위원회에 자신들을 법정 소수민족으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해 국제적인 관심을 끌었다. 유럽의 많은 역사학자들은 오늘날 헝가리인이 훈족의 후예라고 주장한다. 9세기경 헝가리를 세운 마자르족과 5세기부터 이 지방에서 살고 있던 훈족이 섞였다는 것이다. 유전적으로도 유럽 훈족과 중국 흉노족은 유전적으로 관련이 있음이 밝혀졌다(윤신영, 2018). 


신라 문무왕비에는 흉노족과 관련지어 흥미로운 주장이 있다. 신라의 김 씨 왕족은 흉노 출신이라는 주장이고, 흉노의 왕이 금(金)으로 사람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하는 풍습을 보고 김(金)씨 성을 하사 하였다고 한다. 이 주장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어서인지 우리 역사에서는 다루지 않는 것 같다. 하여튼 흉노족은 한반도를 비롯하여 중앙아시아, 유럽에 이르기까지 당시 전 세계에 걸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쯤 해서 섬뜩하고 공포스러운 중국 북방 흉노족이 세계 역사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거둬들이자. 천고마비. 지금은 그 본래 뜻은 사라지고 가을의 풍요로움을 일컫는 말로 쓰이고 있지만, 겉뜻과 속뜻의 차이를 알고 써야 한다. 가을을 의미하는 수많은 말 중에 굳이 중국 역사에서 유래하는 공포스러운 의미의 사자성어를 사용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을의 이미지는 넉넉함과 풍성함이다. 먹거리가 많으면 사람의 인심도 좋은 법이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라고 하지 않던가. 가을은 먹을 것이 많고 감성 또한 풍성한 계절이다 보니 가을을 주제로 하는 시(詩)가 많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1926)의 <가을날>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전반부만 인용해 보자.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십시오.

들에다 많은 바람을 놓으십시오.

마지막 과일들을 익게 하시고

하루 이틀만 더 남국의 햇빛을 주시어

그들을 완성시켜,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주 속에 스미게 하십시오.


릴케의 시어(詩語)는 마치 가을 전어(錢魚)를 연탄불 위에서 굽으면 기름이 좔좔 흐르는 것처럼 서정적 감수성이 넘쳐난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라는 말은 절대자가 인간에게 폭염으로 견디기 힘든 고통을 주셨다는 말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그러면서 릴케는 인간적인 소망을 간구한다. 이제 가을이 되었으니 하늘 아래 생명들이 그들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해주면 좋겠다는 기대를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릴케의 시구(詩句)는 인간이 절대자에 대해 어떤 말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를 적절하게 보여준 사례다. 릴케의 죽음에 대해서는 엇갈린 설이 있지만 장미와의 관련성은 사실인 듯하다. 그는 장미 가시에 찔려 패혈증으로 죽었다고 한다.


저자는 릴케가 장미 가시에 찔려 사망했다는 설을 믿는 쪽이다. 사람이 면역력이 떨어지면 날카로운 장미 가시가 아니라 하찮은 상처에도 문제가 생기게 된다. 저자의 부친도 발에 있는 무좀 부위가 문지방에 걸려 난 상처가 괴사(壞死)로 이어져 사망에 이르렀다. 장미가시는 마치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만들면서 지붕에 꽂아놓은 날카로운 창칼을 닳았다. 울타리에 뻗은 장미를 전지(剪枝)하면서 장미 가시에 찔려보면 그 가시가 얼마나 날카롭고 단단한지 알 수 있다. 장미시인 릴케가 장미 가시로 인하여 죽었다는 사실 여부를 떠나 장미가시와 그의 죽음에 대한 논란 자체가 그를 신화(神話)로 만드는데 기여했다.


우리나라 시인 중에도 가을에 생각나는 시인이 있다. 김현승(1913~1975). 그의 <가을의 기도> 역시 가을의 정취를 가득 채우고 있다. 기독교 신앙인인 시인은 가을이 오면 기도와 사랑 그리고 명상의 시간을 가지고 싶어 했나 보다. 사람들은 김현승을 '기도시인'이라고 부른다. 김현승의 시어에는 고독한 인간의 고뇌가 묻어난다. <가을의 기도>는 릴케의 <가을날>에서 풍기는 시적 감수성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저자만이 아닐 것이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홀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 지나

마른 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가을에는 누구나 잠재적 시인이 된다. 혹여 잠재적 시인을 눈에 혹은 가슴에 담고 있는 느낌과 생각을 언어로 풀어낼 능력이 있는 등단 시인과 비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가을에 눈치가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가을에 길을 나설 때는 메모지와 필기도구를 챙겨 갈 일이다. 죽은 송장도 살아 움직이는 계절에 살아 있는 사람의 감성 작용이 오죽 활발하겠는가.


한자는 뜻글자로 우수한 문자다. 한자 자체가 삼라만상의 이치를 밝혀준다. 한자 가을 추(秋)만 해도 그렇다. 추(秋)는 벼화(禾)와 불화(火)의 합성어다. 벼화(禾)의 모습을 자세히 보자. 벼는 여름 뙤약볕으로 익고 그렇게 벼가 여물면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다.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라고 하는 속담이 있지만, 한자 벼화는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인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물론 모든 곡식이 여물게 되면 고개를 숙이게 된다. 그래서 화(禾)는 벼만이 아니라 모든 곡식을 총칭하는 말이다. 릴케와 김현승의 시도 그렇고, 가을을 관통하는 단어는 겸손이다. 사람이 사회적, 경제적, 인격적으로 여물었는데도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교만을 떨면 들녘의 곡식만도 못한 것이다.


하늘이 높고 눈이 시리도록 푸른 가을날 교외로 나가 가을 들녘을 바라보자. 노란 벌판이 눈에 들어온다. 황금벌판이다. 금년 저자에게 가을 농촌의 벌판은 유채꽃 단지로 보였다. 매년 보는 황금벌판이지만 노랗게 익은 벼가 유채꽃으로 보이기는 처음이다. 여문 벼가 노란색을 띠게 되면 황금색 벌판이라고 말해왔는데, 제주도에서 보았던 유채꽃 단지가 옮겨온 느낌이다. 가을은 비옥(肥沃)한 시간이다. 색깔로는 황금색이고 시간으로는 황금시간대(prime time)다. 황금시간대에는 방송이나 라디오의 시청률이나 청취율이 가장 높게 나타나는 시간대인 것처럼, 가을은 우리 삶이 가장 빛나는 시기다. 우리 삶이 그저 빛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얼마나 준비했느냐에 따라 그 빛의 강도는 달라질 것이다. 그래서 가을은 우리의 삶이란 땅을 걸고 기름진 옥토로 바꾸는 배토(培土)의 계절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가을은 엄동설한을 대비하는 준비의 계절이다. 우리 삶을 북돋는 배토와 어려운 때를 준비하는 유비무환의 정신을 병행한다면 우리 삶은 벼가 익어 황금빛으로 빛나는 가을 들녘처럼 윤택하고 풍요로울 것이다. 



김종래. (2016). 유목민 이야기. 파주: 꿈엔들.

사마천. (BC 91?). 사기열전(하). 김원중 옮김. 서울: 을유문화사.

이어령. (2022). 뜻으로 읽는 한국어사전. 파주: 문학사상.

하워스, 패트릭. (2002). 훈 족의 왕 아틸라. 김훈 옮김. 서울: 가람기획.

김석동. (2018). 인사이트 코리아. 진시황은 ‘흉노’가 무서워 만리장성 쌓았다. 2월 1일.

윤신영. (2018). 동아사이언스. 유럽 훈족-中 흉노족, 유전적으로 한뿌리. 5월 14일.

(2005). 경남일보. 헝가리 훈족 후예들 "우리를 인정해 달라". 4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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