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염철현 Oct 23. 2023

월출산(月出山) 평전

달을 품고 달을 낳는 바위산

누구에게나 죽기 전에 꼭 한 번쯤은 해 보고 싶은 것들을 정리한 목록이 있기 마련이다. 버킷리스트라고 하는데 우리말로는 '소망 목록'이라고도 한다. 저자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는 우리나라 국립공원(산)을 등반하는 것이다. 다행하게도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되기 전에 호남권에 속하는 5대 국립공원(지리산, 덕유산, 내장산, 무등산, 월출산)의 등반을 마쳤다. 계획했던 목표를 달성하는 것은 성취감과 새로운 목표가 생성된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일이다. 그동안 호남에서 나고 자란 호남의 아들로서 지역의 국립공원 산을 가보지 못했다는 부끄러움과 안타까움이 컸는데 최소한의 예의를 다한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


월출산(月出山)에서 보고 느끼고 깨달은 서너 가지를 정리해 보자. 첫째, 월출산은 달의 생성지, 안착지, 월출지이다. 월출산은 역사적으로도 월나산(月奈山), 월생산(月生山)이라 불리며 달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곳이다. 왜, 그 많은 산 중에 월출산에서 달이 뜨는가? 단지 산 이름 때문인가? 저자는 월출산에 등반하고 나서야 비로소 달이 월출산에서 뜨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월출산은 사방이 바위로 둘러싸여 분지 형태를 이룬 바위산이다. 그 바위산이 낮에 달을 품고 있다 밤이 되면 놔준다. 마치 어미닭이 계란을 품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바위산에서 달을 품는 시간은 신성하여 우측에서는 장군봉이 지키고 좌측에서는 사자봉이 사악한 무리들이 얼씬 거리지 못하게 한다.


바위산 월출산은 산 아래 멀리 떨어진 곳에서 보면 그저 쭉 뻗은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서있는 산은 월출산 말고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월출산의 기암괴석은 단순하지 않았다. 아예 산 자체가 바위다. 바위가 산이고 산이 곧 바위다. 그래서인지 정상에서 바라본 월출산의 전경은 바위와 바위가 정교하게 접합된 거대한 함지박처럼 느껴졌다. 함지박이 얼마나 큰지 달을 품을 정도다. 월출산과 월악산은 '달'로 연결되어 있다. 월악산은 '달이 뜨면 최고봉 영봉(峰, 1,095.3m)에 걸린다'하여 월악이라고 했단다. 월출산에서 뜬 달이 영봉에 걸리는 것이다.


둘째, 월출산 바위산은 거대한 서고들이 들어서 있는 지상 최대의 도서관이다. 사면을 바위 서가(書架)로 만들어 책을 얹어 두거나 꽂아 두었다. 월출산의 '책바위'는 이곳이 도서관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서가는 오랜 세월 풍화작용과 절리 현상으로 갈라지고 색깔이 변하긴 했어도 여전히 지상 최대, 최고(最古)의 도서관이다. 이 웅대한 서가에 꽂아 둔 책은 어떤 책일까? 천황(天皇)이 세상을 다스리는 필요한 경세서와 자연과 우주의 이치를 다룬 클래식이 아닐까 싶다.


셋째, 월출산의 최고봉인 천황봉(天皇峰, 809.8m)은 넓다. 산 정상에 이렇게 넓은 평지가 있는 곳도 드물 것이다. 한꺼번에 300명가량이 앉을 수 있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있다. 천황(天皇)은 천제(天帝)의 아들, 즉 하늘의 뜻을 받아 하늘을 대신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도교(道敎)에서 천황은 옥황상제를 가리킨다. 천황봉은 천제의 아들이 천하를 다스리면서 지역의 대표들을 한데 모아 중요한 의사결정을 하는 데 필요한 공간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높고 험한 산의 최고봉은 '천왕봉(天王峰)'이라고 이름을 부르는 경우가 흔하지만, 천황봉이라는 이름의 봉우리는 흔치 않다. 지리산, 무등산, 속리산, 계룡산의 최고봉도 천왕봉으로 부른다('천황봉'은 일제강점기 일본의 천황을 기리는 의미에서 개명을 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래서인지 월출산의 정상인 천황봉에 오르기 위해서는 천황봉에서 약 100m 아래에 있는 통천문(通天門)을 지나야 한다. 통천문은 월출산 최고봉을 지나 하늘로 통하는 높은 문이라는 데서 유래하였다. 통천문은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한 바위굴로써 천황봉으로 가는 유일한 통로이다. 통천문은 천황봉을 만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라는 의미와 함께 최고봉에 올라 옥황상제를 알현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의미도 내포한다.


넷째, 월출산은 접근이 결코 쉽지 않은 높고 큰 악산(岳山)이다. 산세로만 보면 설악산 뺨친다. 안개라도 끼는 날이면 접근조차 어렵다. 월악산(月岳山)이다. 월악산은 충북과 경북에 소재하는 국립공원이지만, 월출산 역시 산의 지형과 산세를 보면 악산임에 분명하다. 산줄기를 공룡의 등처럼 거칠다고 표현한 여행작가도 있다. 월출산의 천황봉에 오르기만 하면 월출산이라는 이름은 어디까지나 달(月)을 주제로 하는 낭만적인 이름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것이다. 물론 천왕봉까지 오르는 데는 악산이랄 것도 없지만, 천황봉에서 사자봉을 거쳐 구름다리로 가는 등산로는 웬만큼 등산으로 단련된 등산객도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또한 사면이 바위로 둘러싸인 산세를 바라보면 바위산의 위엄에 압도당하고 만다.


조선의 정치가이면서 시인이었던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는 월출산에 오른 뒤 '조무요(朝霧謠)'라는 시를 남겼다. '아침에 피어오른 안개'를 소재로 당시의 어지러운 정국을 비유하였다. 산과 햇빛은 임금이요, 안개는 임금의 눈과 귀를 가리는 간신배일 것이다.


월출산이 높더니마는 미운 것이 안개로다
천왕제일봉(天王第一峯)을 일시에 가렸다
두어라 햇빛 퍼진 후면 안개가 아니 걷히랴


월간 '山'에서도 우리나라의 3대 악산을 설악산, 주왕산, 월출산으로 꼽는다. 혹자에 따라서는 3대 악산을 설악산, 월악산, 치악산으로 하고, 5대 악산은 3대 악산에 주왕산, 월출산을 더하기도 한다. 기(氣)가 센 산인 월출산이 악산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울 것이다. 조선 최고의 인문지리학자이자 풍수가였던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월출산을 ‘화승조천(火乘朝天)의 지세, 즉 ‘아침 하늘에 불꽃처럼 내뿜는 기를 지닌 땅’이라고 표현했다.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정상 구정봉(九井峰) 아래 신령스러운 바위가 떨어질 것 같으면서도 떨어지지 않아 영암(靈巖)이란 지명이 유래했다고 전한다.


저자는 월출산에서 평생 볼 바위를 원 없이 봤다. 사자봉과 구름다리에서 바라본 기암괴석은 거대한 파노라마 영상을 보는 듯 현기증마저 느낄 정도였다. 바위산의 분지에서 품고 낳은 달이 밤이면 밤마다 하늘 높이 치솟아 나를 비춘다고 생각하면 절로 신명 난다. 월출산 등반을 마치고 뒤돌아 다시 바라보니 마치 출입이 금지된 영험한 곳을 다녀온 느낌이다. 달을 보는 저자의 마음과 자세는 월출산 등반 이전과는 판이하게 다를 것이다. "달이 뜬다 달이 뜬다/ 둥근 둥근달이 뜬다/ 월출산 천황봉에 보름달이 뜬다./ 평범한 썰렁 퀴즈 하나 내자. "월출산 기(氣)는 어떻게 받는가?" 정답은 '입'이다. 바위산을 보노라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바람에 기가 입으로 다 모이는 것이다. 내친김에 월출산과 관련하여 우스개 소리 하나만 더 하자. 영암군수가 되려면 월출산 천황봉을 몇 번이나 올라갔다 와야 할까? 정답은 천번 이상이다. 월출산의 영험한 기운을 받아야 군수가 된다는 것이다. 실제, 부군수가 군수가 하고 싶어 월출산을 오르고 또 올랐지만 결국 못 했다. 나중에 정상에 간 횟수를 세어보니 천 번에서 한 번 부족한 999회였다.


월출산 도갑사는 도선국사가 창건했다. 도선국사는 신라 시대의 고승으로 이름이 알려졌지만, 풍수지리의 대가로 더 유명하다. 도선국사는 비보풍수(裨補風水), 비록 최고의 명당은 아니어도 잘만 가꾸고 쓰면 얼마든지 살기좋은 터전이 될 수 있다는 풍수사상을 전파했다. 도선국사는 지리적 조건의 문제점을 능동적으로 보정, 보완하여 어느 땅이나 살기좋은 환경으로 조성하는 길을 열어 놓았다.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여전히 풍수지리가 묫자리, 집터, 사업장 등의 위치 선정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도선국사의 비보풍수는 엄청난 위안을 주고 있다. 비보풍수는 신체의 건강과도 연결된다. 모두가 건강한 신체로 태어나지도 않지만, 건강한 사람도 나이를 먹으면서 쇠약해지는 법이다. 허약한 신체를 보신하여 건강한 신체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몸에 좋다는 약이나 음식을 보충한다. 먹고 마시는 보약보다 월출산에 올라 기암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령한 정기를 받아봄직하다.


최원석. (2004). 법보신문. 불교와 풍수④-도선국사의 비보풍수. 8월 10일. 

조무요(朝霧謠). 디지털영암문화대전. http://www.grandculture.net/yeongam

작가의 이전글 부러운 사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