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체암(遞菴) 나대용(羅大用, 1556~1612)을 오늘날 기업가 정신이 투철한 무인(武人)으로 생각한다. 마이크로 소프트(MS)의 CEO를 역임했던 스티브 발머는 기업가 정신의 본질에 대해 정의 내린다. "기업가 정신의 본질은 다른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기회를 발견했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 자신의 에너지와 지적 능력 그리고 다른 사람의 도움까지 동원해서 그 기회를 구체적으로 현실화하는 것이다." 나대용은 최강의 돌격선인 거북선을 만들기 위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 나주에 낙향하여 연구에 정진하였다. 그는 아이디어와 지적 능력을 실현시키고자 거북선 설계도를 가지고 이순신을 찾아갔다. 이순신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참신한 아이디어에 대해서는 귀를 기울이고 그 아이디어를 구체화하는 데 열정을 가진 지휘관이었다. 나대용은 이순신을 만나 그의 아이디어를 실현시킬 수 있었다. 나대용의 자(字)는 시망(時望), 즉 '때를 기다리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꿈을 실현시킬 사람을 기다렸고 드디어 이순신을 만났다. 두 사람은 일본의 침입을 예측했고 조선의 바다를 지키고 싶은 애국심과 조국애로 무장하여 의기투합하였다. 역사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2004년)은 나대용이 이순신을 만나 그의 계획을 현실화시키는 장면을 보여준다.
나대용은 이순신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조선 수군에서는 부하와 상관의 관계로 거북선을 건조하는 전선 감조 실무 책임자로 활약했고, 인간적으로는 이순신이 모함으로 투옥되었을 때 그의 무고함을 호소하기도 했다. 만약 나대용이 이순신을 찾아가지 않았고 거북선도 만들지 못했다면 임진왜란의 전황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조선 수군에 거느린 거북선은 일본 수군의 공포의 대명사가 되어 심리전에서 기선을 제압하는 일등공신이었기 때문이다. 일본 장군들은 거북선을 복카이센(해저괴물)으로 부르는 수군의 거북선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사기를 높이기 위해거북선을 메쿠라부네(맹인선)라고 부를 정도였다. 이순신이 거북선이 없는 조선 수군을 지휘했더라면 그의 전략과 전술에는 많은 변화가 뒤따랐을 것이다. 나대용은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많았고 그런 나대용을 상관이었던 이순신이 알아보고 그의 재능을 현실화시키도록 지원했다. 요즘 말로 이순신과 나대용은 환상적인 케미였다. 임진왜란 당시 도원수(조선군 총사령관)를 지낸 권율은 이순신과 나대용의 관계를 이렇게 표현했다. "이순신은 나대용이 없었다면 그와 같은 무공을 세울 수 없었을 것이고, 나대용은 이순신이 아니었다면 큰 이름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김세곤, 2011).
저자는 역사, 그것이 개인의 역사든 국가의 역사든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중립적인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선왕조실록>이 세계유산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史官)이 목숨을 걸고 직필 했다는 점일 것이다. 역사적 인물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적인 허물이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잘한 점과 못한 점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필요가 있다. 판단은 후세가 내리는 것이다. 실록에 기록된 나대용에 관한 내용을 옮겨본다. 독자는 무인 나대용, 목민관 나대용, 인간 나대용에 대한 균형 잡힌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임진왜란 중인 1596년의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나대용과 관련된 내용이다. "강진 현감 나대용은 사람됨이 간교하여 일을 처리하는 데 매우 주제넘으며 술과 떡 같은 것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명성을 구하고 남의 말[馬]을 약탈하여 뇌물로 썼습니다. 그리고 사신이 바다를 건널 때에는 수호용 선박을 배정하는 것이 전례인데 보내지 않았으니, 형편없이 관직을 수행하며 사명을 멸시한 죄가 큽니다. 파직시키소서"(선조실록 81권, 선조 29년 10월 11일 갑술 1번째 기사).
임진왜란이 끝난 1599년의 실록에 기록된 나대용과 관련된 내용이다. "능성 현령(현재의 화순군 능주) 나대용은 도임한 뒤 오직 음주만을 일삼아 일체의 관청 사무를 오로지 아랫사람에게 위임시키고는 백성을 침학하여 자신을 살 찌우기만을 일삼고 있는데, 고향에서 머잖은 지역에 있어 범람한 일이 더욱 많습니다. 그리고 조정에서 고을을 통합한 의도는 본래 잔민(殘民)을 소생시키고자 해서인데, 소속된 화순 백성들을 대하기를 마치 월(越) 나라 사람이 진(秦) 나라 사람의 병고를 보듯이 하며 배나 침탈을 가하므로,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있습니다. 파직을 명하소서"(선조실록 112권, 선조 32년 윤 4월 1일 기묘 4번째 기사).
나대용에 관한 실록의 기록을 몇 번이고 보았다. 전시에 민생문제와 치안유지에 전력을 다했어야 할 목민관이 약탈물로 뇌물을 쓰는 등 관직을 수행하기에 부적합하다는 내용이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백성을 돌보는 목민관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사익을 위하고 지역차별을 일삼았다는 내용이다.
나대용을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토록 투철한 사명감으로 국가를 위해 헌신했던 무인 나대용이 목민관으로 부임해서는 파직을 당할 정도로 부적절한 처신을 했는지 말이다. 무인이라고 지방행정관으로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란 법은 없다. 이순신 역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부임하기 전인 1589년에 전라도 정읍현감(태인현감 겸임)으로 목민관을 역임했다. 이순신은 목민관으로서 선정을 베풀어 지역민들의 칭송을 받지 않았던가. 나대용이 임진왜란 내내 이순신 장군의 특급 참모로서 이순신의 말과 행동으로 영향을 받았으면 누구보다 목민관으로서 본보기가 되었을 것인데 하는 아쉬움을 가져본다.
목민관 나대용에 대한 논란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나대용은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압도한 불퇴전의 전함인 거북선 제작의 일등공신이었고 임진왜란의 판세를 뒤바꾼 특출한 공적을 남겼다. 그는 1592년 3월 거북선 건조를 마쳤고, 임진왜란 발발(1592년 4월 13일) 하루 전인 4월 12일 거북선에서 포격실험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그는 전쟁에서 나라를 구한 뛰어난 과학자(엔지니어)요 장군이었으며 이순신의 충직한 참모였다. 오늘날 나대용을 퍼스트 무버(First Mover)로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전쟁에 대비하여 조선 수군의 판옥선을 개선하고 세계 해전에 길이 남을 새로운 전함(거북선)을 만들어 전쟁의 판도를 바꾸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전쟁 후에는 수군 전력을 개선하기 위해 소형 해추선(쾌속선)을 진수시키기도 했다. 나대용이 지방목민관이 아닌 조선수군을 총괄하는 삼도통제사가 되었다면 군인으로서 그가 가진 참신한 아이디어와 열정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무엇보다 나대용은 조선제일의 선박제조엔지니어였기 때문이다. 동헌(東軒)에 앉아 행정업무를 보기보다는 망망대해에서 조선 최강의 수군에 사용될 배 만드는 꿈을 꾸었을 나대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를 파직시켜라는 상소를 올렸을 것이다. 용인술의 첫 단추는 적재적소다. 대한민국 해군은 1999년 건조한 잠수함을 ‘나대용함’으로 명명하여 나대용 장군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샤, 비카스, (2022). 생각을 바꾸는 생각들. 임경은 옮김. 서울: 인플루엔셜.
김세곤. (2011).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서울: 온새미로.
김영수. (2022). 글로벌경제신문. 나주시, 거북선 건조 ‘나대용 장군’ 업적 재조명…학술대회 개최. 11월 16일.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2004.
영화. <한산: 용의 출현>. 2022.
영화. <한산 리덕스>.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