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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Oct 25. 2023

세종의 다문화정책

'인(仁)을 베풀어 정치를 편다'

세종(재위 1418~1450)은 우리 민족의 자긍심이다. 불세출의 군주다. 세종은 군주, 정치인, 학자로서 본보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인격자로서도 후세에 귀감이 되고 있다. 그가 남긴 업적과 유산은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다. 저자는 조선의 세종 대야말로 가장 역동적인 시기였고 국가적으로도 가장 자신감이 충만했던 시기라고 생각한다. 국가의 역동성과 대내외적인 자신감은 외국인에 대한 개방 및 포용 정책으로 이어졌다. 세종 시대의 다문화정책은 다문화사회가 된 대한민국에도 의미 있는 교훈을 제공한다.


세종은 북쪽의 4군(우예, 여연, 자성, 무창)과 6진(온성, 종성, 경원, 경흥, 회령, 부령)을 개척하면서 압록강과 두만강을 조선의 실제 국경선으로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15세기 세종 대의 국경선이 21세기 한반도의 국경선이다. 확장된 국토에는 삼남지역, 즉 경상, 전라, 충청 3도의 백성을 대거 이주시키는 사민(徙民) 정책을 시행했다. 사민(이주) 정책은 기본적으로 북방 변경 지역의 방어를 목적으로 추진되었는데, 당시 북방으로 이주한 사람들의 규모는 범죄자를 제외하고도 3,733호(戶)에 이르렀다(사민, 우리 역사넷). 초기의 사민정책의 추진방식은 지원자에게 토지와 관직을 내려주고 세금을 면제해 주는 조건 등을 내세우는 등 자발적 이주정책을 추진했지만 자원자가 턱없이 부족하였다. 이후에는 경상도와 전라도, 충청도 지역에서 이주시킬 숫자를 정해놓고 파견된 관리가 직접 선발하게 하였다. 이 방식으로도 넓은 국토에 거주할 사람이 부족하자 삼남지방 백성을 평안도와 함길도 남쪽으로 이주시키고, 평안도, 함길도 남쪽 사람들을 4군 6진으로 이주시키는 방식을 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반강제적으로 추진되는 이주정책에 대한  백성들의 저항이 컸고, 사민대상자가 된 사람 중에는 자살을 하거나 자해를 해 장애인이 되는 경우가 있을 지경이었다. 세종 재위 기간에 매년 1만 명씩, 총 15만여 명이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4군 6진 개척, 우리 역사넷).


세종은 확장된 국토에 사람만을 이주시킨 것은 아니었다. 세종은 이주민의 안정적인 생활을 하는데 필요로 하는 농사짓는 법, 교육, 병원, 행정조직 등 전반적인 측면에서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세종의 이주정책은 효과를 나타냈고,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서북지방에서 과거에 합격한 인재들이 쏟아져 나왔다. 평양의 전주 김 씨(북한의 김정은 조상)와 정주의 수원 백 씨(시인 백석의 조상) 등이 대표적이었다(백승종, 2020).


세종 시대의 대외정책은 ‘은혜와 위력의 병용(恩威竝用)’으로 요약된다. “은혜가 없으면 그들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가 없으며, 위력이 없으면 그 뜻을 두렵게 할 수가 없다”(세종실록 18년 11월 9일). 세종은 주변국에서 조공을 보내오면 받아들이고, 나라에 애경사가 있을 땐 예물을 주고받되, 국경을 넘어 약탈해 올 경우 강력하게 ‘토벌’을 감행했다. 강온전략이었다. 세종의 개방, 포용 정책은 주변국 사람들의 연이은 집단 귀화 현상을 초래했는데, 당시 명나라가 ‘조선이 장차 패권국이 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할 정도였다. “조선국은 임금이 어질어서 중국 다음갈 만하다.” “요동(遼東)의 동쪽이 옛날에는 조선에 속했는데, 만일 요동 여진족이 조선에 ‘귀부’한다면 중국도 감히 항거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박현모, 2021).


왜, 세종 대에 조선으로 귀화하는 외국인이 많았을까? 세종은 첫째, 귀화인들이 정착할 수 있게 집과 식량, 그리고 옷을 제공하는 한편 세금을 면제했다. 귀화인의 지원은 정착 정도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누었다. 즉 생계유지 단계, 우마를 기르는 단계, 그리고 “본국인과 같은 예로 대우”하는 단계. 둘째, 세종은 귀화인에 대한 차별을 금지했다. 차별금지정책을 시행했다. “귀화인도 곧 우리나라 백성”이라는 정책 기조에 따라 귀화인들을 우리나라 사람들과 혼인해 살게 했다. 셋째, 귀화인의 향수와 소외감을 달래기 위해 활쏘기 대회 및 모구(毛毬) 시합을 벌이기도 했다. 새해 하례식에는 야인, 왜인, 아랍인(回回人) 등 귀화인들도 참석하게 했다. 세종의 외국인 귀화정책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시인발정(施仁發政)이다. 즉 “어짊(仁)을 베풀어 정치를 편다'이다. 세종에게 어짊의 대상은 조선 백성에 한정되지 않고 귀화한 이민족까지 포용했다(박현모, 2021). 동서고금의 역사를 볼 때 문호를 활짝 열고 다양성을 포용하는 국가가 번영했다. 중국의 당나라와 유럽의 로마가 그랬고, 지금의 미국이 그렇다. 조선시대에는 세종 대에 그랬다.  


세종의 이주 및 귀화정책은 다문화사회에 많은 교훈을 제시한다. 오늘날은 세종 대에 비해 이주 및 귀화의 규모와 방식만이 달라졌을 뿐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다문화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한 국가의 총인구 대비 5% 이상이 외국인이어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하고 있지만, 우리나라도 그 기준(2023년 9월 기준, 장단기 체류 외국인은 251만 4000명으로 전체 인구의 4.89%)에 접근하고 있다. 지역별로는 오래전에 다문화사회가 된 지역도 여러 곳이 있다. 전국적으로 10여 개의 지역은 5%를 넘어섰다. 전국 시군구별로 다문화 초등학생이 차지하는 비율을 보면 우리 사회가 어떻게 변화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방향성을 읽을 수 있다. 2022년 기준, 전국 229개 시군구 중 다문화 초등학생이 10% 이상을 차지하는 지자체는 56곳(24.5%)에 달했다. 전남 함평은 20.5%, 경북 영양은 20.2%, 전남 신안은 20%, 전북 임실은 19.5%, 전남 영암은 19.3%를 나타냈다. 전교생의 절반 이상이 다문화 학생인 초등학교는 77곳에 달한다. 다문화특구인 경기도 안산의 한 초등학교는 전교생 중 95%가 다문화 학생이고 출신국이 17개국에 달한다. 


객관적인 지표를 보면 우리 사회는 다문화사회에 진입했다. 다문화사회는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사회이고 다양성과 이질성을 본질로 한다. 국가, 지방자치단체, 군대,교육기관, 경제, 일상생활 등 우리 사회의 골격을 이루는 모든 부문에서 새로운 틀을 짜야 한다. 시급한 것은 '다문화가족(가정)'의 용어부터 수정이 필요하다. 미국인은 미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에 대해 '한국계 미국인(Korean-American)'이라고 부른다. 미국에서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거주하는 한국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유럽 출신이든, 아시아 출신, 중동 출신이든 모두를 한데 묶어 '다문화'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학생이면 다문화학생, 가정이면 다문화가정으로 부른다. 동화주의적인 용광로 이론이다. 이주민이 자신의 정체성이나 색깔을 드러내지 못하는 용어다. 최근에야 '다문화가족'이란 용어 대신에 이주 배경 주민(약칭 '이주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자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늦어도 너무 늦다. 김춘수 시인은 <꽃>에서 왜 사람이나 식물에게도 적당한 이름이 필요한가를 알려준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주민은 인구절벽의 위기에 직면한 우리나라의 소중한 미래 자산이다. 소중한 자산에 제대로 된 이름을 불어주어야 할 때다.


우리나라의 인구절벽 문제를 대변하는 용어는 고령화, 저출산이다. 점점 수명은 길어지고 있지만, 새로 태어나는 아이는 적어지고 있다. 저출산은 총인구가 줄어드는 것 말고도 생산인구가 감소한다는 의미이면서, 노인 인구는 늘어나는데 이를 부양할 젊은이는 적다는 뜻이다. 국가적인 대재앙이다. 대안 중 하나는 외국인을 적극 수용하는 것이다. 외국인 수용을 위한 제일 조건은 경제적 안정이다. 세종 대와 오늘날에도 사람에게 가장 우선시 되는 것은 먹고사는 일이다. 무엇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순혈주의, 백의민족, 배달민족과 같은 민족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혈통 이데올로기는 유효기간이 지났다. 그것은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면서 한민족을 하나로 결집시키기 위한 구호였다. 세종 대에 귀화인을 대상으로 펼쳤던 '인의 정치'를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부적절한 경우가 많다. 초연결의 글로벌 사회에서도 다문화감수성이 높았던 세종이 추진한 이주 및 귀화 정책의 기조는 여전히 유효하다. 은혜와 위력의 병용(恩威竝用)에 기반한 시인발정(施仁發政)이다.



박현모. (2006). 세종의 수성 리더십. 서울: 삼성경제연구소.

박현모. (2021). [박현모의 실록 속으로] 세종 치세에 여진·일본·아랍인 귀화 행렬… 明도 조선을 경계했다. 9월 7일.

백승종. (2020). 월간중앙. [백승종의 세종 리더십과 부민(富民)의 길(9)] 남쪽 백성 이주 ‘사민정책’과 항구적 국경 방어망. 8월 17일.

장세정. (2023). 중앙일보. 외국인 내년 5% 돌파 ... '다인종, 다문화 국가' 준비됐나. 11월 13일.

최민지, 장윤서. (2023). 중앙일보. 56개 시군구, 다문화 초등생 10% 넘었다. 11월 7일.

4군 6진 개척.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

사민(徙民).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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