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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Sep 24. 2020

역사의 ‘정의’에 공소시효는 없다 ①

크리스토퍼 콜럼버스(1451-1506)

지난 5월 미국 미네소타 미니애폴리스에서 일어난 백인 경찰의 흑인 조지 플로이드 살인사건은 미국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큰 파장을 몰고 왔다. 백인 경찰의 ‘목조르기 체포 방식’이 동영상을 타고 퍼져나가면서 전 세계적으로 인종차별 종식을 위한 시위와 연대 움직임이 가속화되었다. 플로이드가 마지막 순간 호소했던 “숨을 쉴 수가 없다”라는 말은 편히 숨을 쉬고 있는 제 가슴이 망치로 맞은 것처럼 아프게 느껴진다. 3명의 경찰이 8분 46초 동안 목을 누르고 있었다니 같은 인간으로서 믿기 어려운 일이다. ‘흑인 생명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는 문장은 노르웨이 화가 뭉크의 ‘절규’를 떠오르게 한다.  


태생적으로 다인종, 다민족의 성격을 띤 미국에서는 인종차별에 따른 사건, 사고가 끝없이 발생하고 있지만, 플로이드의 사망에 따른 파장은 여느 때와 다르다. <코로나 19>로 가뜩이나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와중에 터진 인종차별의 이슈는 전 세계적으로 공공의 적이 되었다. 이번 사태에서 흥미로운 점은 플로이드 사망을 계기로 역사적 위인이나 영웅들의 과거 인종차별 행태와 연관 지어 그들을 재평가하려는 시도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위인전의 개정판이 만들어지고 있는 셈이다.


일례로 시위자들은 아메리카 신대륙의 발견자요 프런티어 정신의 아이콘으로 평가받는 콜럼버스 동상을 밧줄로 목을 매 끌어내고 바닥에 내팽개쳤다. 현대판 부관참시다. 역사적 인물을 평가하는 방식은 국가나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대체로 어떤 인물이 일을 하면서 보여준 과정이나 절차보다 성취해낸 결과를 가지고 그의 모든 것을 평가하는 경향이 많다. 성과중심의 인물 평가. 주로 유럽의 역사가들이 콜럼버스를 신대륙 발견자로 대항해 시대를 개척한 영웅으로 추겨 세우고 있지만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예전부터 논란이 많았던 것 또한 사실이다. 


15세기 말 콜럼버스는 요즘 용어로 ‘대서양 횡단 프로젝트’를 가지고 포르투갈과 스페인 왕에게 투자유치를 제안한다. 이 프로젝트는 현대의 우주탐사와 맞먹을 정도의 천문학적인 비용과 투자 리스크를 동반하고 있었다. 당시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국가는 지금의 터키였는데 그곳은 이슬람 세력이 장악하고 있어 콜럼버스는 대서양을 돌아 중국으로 갈 계획을 세운다. 당시 유럽인들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나 여행가들이 전하는 정제되지 않은 정보를 통해 아시아의 중국, 인도, 일본(당시 이름은 ‘지팡구’)에는 황금, 도자기, 비단, 향신료 등 각종 희귀한 보물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콜럼버스의 제안에 포르투갈은 퇴짜를 놓고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이 콜럼버스에게 모험을 걸었다. 전문심사위원회에서는 부적합 판정을 내렸지만, 당시 스페인은 모험에 뛰어들 만큼 세계 강대국이기도 했다.


콜럼버스는 4차에 걸쳐 대서양을 횡단하게 되는데 당시 적도 부근에 도착했음에도 자신들은 중국의 어느 곳에 도착했다고 믿을 정도로 부정확한 항해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콜럼버스 자신은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이 예시한 ‘새 하늘과 새 땅’을 세상에게 보여주기 위해 신이 선택한 자라는 종교적 맹신주의에 빠져들었다. 자신이 미개한 원주민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킬 최적임자로 여겼다. 그의 서명은 판독이 난해한데 ‘저는 전능하신 구세주의 종입니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대서양 횡단 프로젝트는 막대한 자금을 투자한 스페인과 기획 유치자인 콜럼버스도 일확천금의 부(富)를 얻기 위한 상업적인 목적을 띄었기 때문에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콜럼버스 항해단은 엉뚱한 곳에 정착하여 인디언(콜럼버스는 인도 ‘India’에 도착한 것으로 알고 원주민들을 ‘Indian’이라고 부름)을 강제노역에 동원함은 물론 홀로코스트(집단학살)의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황금에 눈이 멀어 온갖 반인륜적이고 비인간적인 만행을 저질렀다. 인간의 기본권으로서 人權 같은 것은 안중에 있을 리 만무했다. 유럽으로 돌아올 때는 노예화한 현지인들을 착취한 결과물인 각종 귀금석과 함께 원주민들을 유럽에 데려와 노예로 팔아넘겼다. 백인 우월주의 원흉이다. 자기 이외의 타자에 대한 존중과 배려는 찾을 수 없다. 문명은 야만과 폭력과 동의어가 되었다. 


유럽인들은 콜럼버스를 신격화하면서 지명이나 건물에 그의 이름을 붙여 사용한다. 미국의 심장부 워싱턴 DC도 ‘콜럼비아 특별구(District of Columbia)’의 약자이고, 10월 둘째 월요일 ‘콜럼버스의 날’은 국경일로 지정하였다. 그러나 역사의 영웅으로 영원토록 추앙받을 것 같았던 그의 행적도 시간이 지나면서 진면목을 드러내고 있다. 한 흑인의 죽음이 계기가 되어 들불처럼 일어난 인종차별 시위자들은 콜럼버스가 원주민에게 저질렀던 폭력과 야만을 잊지도 용서하지도 않았다. 그의 동상을 끌어내 부관참시를 하기에 이르렀다. 


땅바닥에 버려진 콜럼버스의 동상을 발로 차고 침을 뱉는 시위대의 모습 속에서 역사의 엄중함과 양면성을 느낀다. 이것이 세계의 리더로 자처하는 미국의 현주소라는 점에서는 참담한 심정이다. 아이들은 ‘어른의 등을 보고 배운다’는 데 그들을 어떻게 교육해야 할지도 고민이다. ‘역사의 정의에는 공소시효가 없다’라는 교훈을 확인시켜주었다. 권력자들에게도 엄중한 경고 메시지가 되었으면 좋겠다. 고려를 침략하고 양만춘 장군에게 혼 줄이 나 줄행랑을 쳤던 당(唐) 태종 이세민은 후계자가 될 태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백성은 물이요, 황제는 배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정복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배를 무사히 저어 가고 싶다면, 항상 물을 신경 써야 한다. 네 배가 뒤집히지 않도록 말이다.”      


주경철(2008). 대항해 시대. 서울대학교 출판부.

孟憲實(2007). 貞觀의 治. 김인지 역(2008). 정관의 치. 서울: 에버리치 홀딩스. 

Mann, Charles C. (2011). 1493: Uncovering the new world Columbus created. 최희숙 역(2020). 1493: 콜럼버스가 문을 연 호노제노센 세상. 서울: 황소자리.     


P.S. 오늘날에는 미국 사회는 청년들을 중심으로 유럽, 백인 주도의 침략사를 거부하자는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이 활발하다. 상당수의 주에서는 '콜럼버스 데이'란 명칭 대신에 '원주민의 날'로 바꿔 기념 행사를 치르고 있다. '원주민 날' 명칭 사용은 1992년 캘리포니아 버클리에서 처음 채택돼 사용되오다 금년 조지 플로이드 사건으로 전국적으로 확대될 기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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