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염철현 Sep 24. 2020

대(代)를 이은 우정

정약용과 황상의 사제의 연

다산 정약용은 강진 유배 시절(1801-1818)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는데 그중 황상과는 평생 특별한 만남을 이어간다. 15살의 황상(黃裳)은 다산을 만나면서 그의 삶이 송두리째 바뀐다. 황상은 스승 다산이 복숭아뼈에 세 번 구멍이 날 정도로 공부했다고 밝히고 있다. 과골삼천(踝骨三穿).


공자는 주역에 푹 빠져 죽간(竹簡)을 읽고 또 읽어 그 가죽을 세 번 갈아 끼웠다(韋編三絶). 추사 김정희는 추사체라는 독특한 서체(書體)를 창안하는 데 멀쩡한 붓 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고 벼루 열 개의 밑창에 구멍을 냈다. 사람이 사용하는 물건, 그것이 가죽이든 붓이든 벼루는 얼마든지 바꿔 사용할 수 있지만, 복숭아뼈에 세 번씩이나 구멍을 내다니... 이것은 학문의 연찬이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하고 득도를 위한 고행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다산은 평생 500여 권의 책을 저술한 대학자로 알려졌지만, 그가 이러한 성과를 만들어내기까지 보통 사람으로서는 감내하기 어려운 정신의 소유자였다. 그가 한국을 대표하는 실학자로 사상가로 개혁가로 행정가로 교육자로 인정받는 것은 하루아침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고개가 숙여진다. 더 가슴에 와 닿는 것은 ‘과골삼천’이란 말은 다산 자신의 기록에는 일언반구도 없다. '나는 이렇게 공부했소, 이렇게 노력해서 성취했소'라고 자랑할 법도 하지만, 최근에야 제자 황상의 기록 속에서 찾아낸 말이다. 스승이 그런 모습으로 공부하는데 제자들이 어떻게 공부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된다.


다산은 1801년 유배형을 선고받고 강진에 도착했는데 아무도 그를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겨우 자리 잡은 곳이 낡고 비루한 주막에 딸린 봉놋방이었고 이곳이 다산초당의 전신이면서 제자들과 동고동락한 ‘사의재(四宜齋)’라는 공부방이다.  그때 제자들 중 한 명이 황상이었는데 다산의 눈에는 시재(詩才)가 뛰어난 다이아몬드 원석으로 보였다. 황상은 양반 신분이 아니어서 과거를 볼 수 없었다.


다산은 정말 엄한 스승이었다. 제자가 공부를 게을리하고 재능을 썩히거나 사람으로서 도리를 저버리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지 않았다. 어린 황상이 부친(강진 관청의 아전)을 여의고 낙담한 채 방황하고 있었다. 다산은 집안일을 책임져야 할 그가 놀고먹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선 ‘날마다 방에서 잠만 자고 하루에 두 끼를 먹으니 편안하냐.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쩌면 그렇게 윤리와 의리를 저버릴 수가 있느냐. 네 나이가 마땅히 집안일을 주제해야 할 스무 살이 아니더냐.’ 여기까지는 그래도 점잖은 표현에 속한다. ‘나는 너 같은 인간을 다시 보고 싶지 않구나’ ‘나는 너에게 과거의 사람이다’ ‘인연을 그만 끊자’라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스승의 욕심이란 이런 것인가 보다. 군자삼락(君子三樂)에서 ‘천하의 영재를 얻어 교육하는 것’도 하나다. 황상은 자신의 재목감을 알아보고 반짝이는 보석을 만들기 위해 매서운 채찍을 든 스승을 믿고 따랐다. 황상이 신혼 재미에 빠져있을 때는 ‘당장 짐을 싸라. 절에 가서 공부하고 매일 시 한 수를 지어 보내라’는 엄명을 내렸다. 이렇게 해서 황상은 시에 관한 한 최고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황상은 다산과의 만남을 통해 그의 아들들과도 교유를 나누고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면서 시·서·화의 삼절(三絶)로 청나라에까지 이름을 날린 추사 김정희로부터 인정을 받고 그의 집에도 출입하면서 시를 지었다. 다산을 만난 황상의 삶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집안끼리 정황계(丁黃契)를 맺고 그 후손들도 대대로 석교(石交)의 우정을 쌓는다.


한자 사람인(人)을 보면 비스듬히 기대면서 서로를 의지하는 모양이다. 서로를 의지할 누군가를 만나느냐는 중요하다. 다산과 황상이 교학상장의 아름다운 사제의 연을 전하듯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만남을 어떻게 관리하고 이어나가느냐에도 공을 들여야 한다. 혼자 잘 될 수는 없다. 식물도 옥토를 만나야 풍성한 열매를 맺듯 누군가를 만나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작가의 이전글 나는 걷는다. 고로 존재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