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60대 이후의 연령대에서는 대중가요 가수 배호(1942~1971)가 부른 <안개 낀 장충단 공원>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노래 가사를 적어보자.
안개 낀 장충단 공원
누구를 찾아왔나
낙엽송 고목을 말없이
쓸어안고 울고만 있을까
지난날 이 자리에 새긴 그 이름
뚜렷이 남은 이 글씨
다시 한번 어루만지며
떠나가는 장충단 공원
비탈길 산길을 따라
거닐던 산기슭에
수많은 사연에
가슴을 움켜쥐고 울고만 있을까
가버린 그 사람에 남긴 발자취
낙엽만 쌓여 있는데
외로움을 달래가면서
떠나가는 장충단 공원
가사를 읊조리면 눈길이 멈추는 문장이 있다. "지난날 이 자리에 새긴 그 이름/ 뚜렷이 남은 이 글씨/ 다시 한번 어루만지며/ (중략)/ 수많은 사연에/ 가슴을 움켜쥐고 울고만 있을까/ 가버린 그 사람에 남긴 발자취." 가사를 보면 마치 묘지를 찾은 가족이나 절친이 묘지명을 어루만지며 옛일을 회상하는 것처럼 보인다. 노래도 애절한 감정을 가득 담고 있다. 장충단 공원에 어떤 사연이 서려 있어 이렇게 노래가 구슬플까 싶다. 안개 낀 공원은 얼마나 그 분위기가 스산하고 애잔하던가. 장충단 공원은 일반적인 공원과는 그 결이 다르다.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 공원은 공원으로 조성된 것이 아니다. 원래 이름은 장충단(奬忠壇), 즉 '충을 장려하는 제단'이다. 조선 고종은 1900년 이 제단을 꾸며 을미사변(1895) 당시 순직한 홍계훈과 이경직 그리고 장졸들의 혼을 받들기 위해 조성하였다(처음 장충단에서는 홍계훈과 이하 장졸 그리고 궁인들을 위해 매년 봄·가을 제사를 지냈다. 이후 을미년에 죽은 대신 이경직 등과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때 죽은 충신들의 위패를 모셨다). 장충단은 순국한 군인들의 영혼을 배향하여 제사를 지낸 현대적 의미에서 국립현충원에 해당한다.
을미사변은 1895년(을미년) 8월 20일(음력)에 일본이 기획하여 실행에 옮겨진 명성황후 민씨(민비) 시해 사건이다. 명성황후는 고종의 왕비이면서 조선의 국모였다. 그래서 국모시해사건이라고 한다. 왜, 일본은 국가범죄를 기획하며 일국의 왕비를 살해했을까? 대강의 전말을 살펴보기로 하자. 일본은 동학농민혁명(1894)의 진압을 빌미로 한반도에 진군하여 청일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조선 국정을 완전히 장악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삼국간섭, 즉 러시아, 독일, 프랑스가 청일전쟁 승리의 대가로 일본이 차지한 랴오둥(遼東) 반도를 청에 반환하도록 요구하면서 공동간섭이 시작되었다. 유럽 열강의 간섭으로 일본이 주춤하는 사이에 조선에는 친러파 혹은 친미파가 속출하였다. 무엇보다 궁중에서는 민비가 반일세력의 구심점을 형성하여 일본에 노골적으로 반대하였다. 일본에 민비는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8월 20일 새벽, 일본군과 낭인, 일본인 교관이 배속된 훈련대 제2대대(대대장 우범선) 등 일단의 무리들이 대원군을 앞세워 경복궁으로 쳐들어갔다. 이들은 황후의 처소인 건청궁에 난입하여 황후를 살해하고 그 시신을 궁 안의 우물에 던졌다가 궁궐 밖 솔밭으로 다시 끌어내어 장작을 쌓아놓고 불태우는 참혹한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은 황후를 살해한 후 이 사건을 조선군의 만행으로 뒤집어씌웠다. 조선 훈련대가 대원군을 추대하여 쿠데타를 일으키는 과정에서 명성 황후를 살해한 것이고 일본군은 훈련대 내부 충돌을 진압하려고 개입하였다고 거짓 발표를 했다. 그러나 당시 황후 시해를 현장에서 목격한 외국인이 있었다. 러시아인 전기기사 사바틴(G.Sabatin)과 미국인 시위대 교관 다이(W.M. Dye)가 시해사건의 목격자로 이 사건을 대해 폭로하였다. 조선인이 사건의 목격자로 나섰다면 일본은 완강히 부인했을 터였겠지만, 외국인의 진상 폭로에 대해서는 이의를 달 수 없었다.
시해사건 당일 새벽에 당시 훈련대장 홍계훈(洪啓薰, 1842~1895)은 경복궁으로 밀려드는 일본군과 일본이 훈련시킨 훈련대의 진입에 대항하였으나 역부족으로 여러 군데 총칼의 상처를 입고 순직하였다(이사벨라 비숍은《한국과 그 이웃들》에서 홍계훈이 일본 장교의 칼에 피습된 뒤 여덟 발의 총탄을 맞아 치명상을 입었다고 썼다). 이경직은(李耕稙, 1842~1895)은 명성황후의 외사촌 오빠이면서 당시 궁내부 대신으로 당일 궁중 숙직이었는데 황후를 지키다 순국했다. 무사 집안 출신의 홍계훈은 민비와 얽힌 사건으로 출세도 하고 장충단 제단에도 이름을 올렸다. 홍계훈과 민비와의 관계는 임오군란(1882)으로 거슬러간다. 군란 당시 궁궐 수문장이었던 홍계훈은 민비의 목숨이 위험에 처했을 때 민비를 누이로 속여 업고 경기도 여주로 피신하는 데 성공했다. 민비와의 인연으로 그의 출세길은 탄탄대로였다. 충청감사, 장위영 영관을 거쳐,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을 때는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로 동학 농민군에게 뺏겼던 전주성을 다시 되찾아 전주 화약을 맺고 철수했다.
초토사 홍계훈은 동학 농민혁명 당시 청군을 청병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홍계훈은 동학 농민군을 실제보다 과대평가하여 조선 관군이 진압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며 청군 차병을 요청했다고 한다(이 부분에 대해 서울대 이태진 명예교수가 관련 문건을 연구한 결과, 청의 위안스카이가 병조판서 민영준을 압박하여 청군을 조선에 차병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조선 정부가 청군의 파병 요청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전장터 지휘관의 의견을 무게있게 받아들이겠지만, 고종의 마음에는 청군에 의지하여 민란을 제압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동학 농민군을 진압할 목적으로 청군을 불러들였을 때 일본군 역시 진군해 들어올 것이라는 걱정은 나중 문제였다. 당장 급한 불을 끄는데만 급급했다. 이 지점에서 조선 정부의 무능력과 국제정세에 대한 무감각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은 경술국치(1910)로 조선을 병합한 뒤 장충단을 철저히 왜곡시켰다. 일본은 조선을 합병한 해에 장충단을 장충단공원으로 바꿔 부르고 제사를 중단시켰다. 벚꽃을 심고 연못, 산책로, 놀이터 등을 조성하여 일본식 공원을 만들었다(일본은 우리나라 의 민족정신이 새겨진 역사적 공간을 위락시설로 만드는데 선수다. 창경궁도 동물원과 식물원으로 조성하여 시민에게 개방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해 죽었을 때 장충단에서는 거국적인 국민대추도회를 개최했다. 이토를 위한 추모 사찰인 박문사((博文寺)를 지금 신라호텔 자리에 건립했다. 전쟁에서 전사한 일본군인들의 동상을 세우기도 했지만 광복 후에 철거됐다. 오늘날 공원 일대는 사명대사, 3·1 운동 기념비,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 만해 한용운 시비와 유관순, 이준 열사, 김용환 선생 동상 등이 민족공원으로서 위상을 지키고 있다.
장충단공원의 새 이름은 서울남산공원이다. 장충단공원은 남산공원 장충지구다. 이름이 바뀐 탓인지 시민들은 장충단비와 장충단공원에 얽힌 역사적 배경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살아 있는 역사를 왜 그렇게 묻어버리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역사는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하는데, 왜 대화를 단절하려고 하는가. 장춘단비는 1969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원래 비문은 신라호텔 영빈관 자리에 있었던 것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비문은 을사늑약(1905)에 반대하며 자결한 민영환(閔泳煥, 1861~1905)이 썼다.
"전경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대황제 폐하께서는 자질은 상성(上聖)을 타고났고 운수는 중흥(中興)을 만나 태산과 만석 같은 공업을 세우고 불운의 조짐을 경계하였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시국이 가끔 험난하다가 마침내 갑오·을미사변이 일어나 무신(武臣)으로서 난국에 뛰어들어 죽음으로 충성을 바친 사람이 많았다. 아, 그 서릿발보다 늠름한 의열과 태양처럼 빛나는 명절(名節)은 길이 재향을 누리고 기록에 남아 있어야 마땅하다. 이리하여 임금은 특별히 충성을 포상하는 의리를 기려 이에 애통해하는 조서를 내리고 제단을 쌓고 비를 세워 표창하였으며 이어 또 봄·가을로 제사를 드리는 법을 정하여 높이 보답하는 뜻을 보이고 교화를 심으니 이는 참으로 백대를 놓고 보아도 없는 특전이다. 사가를 북돋우고 군심(軍心)을 분발시키는 것은 오직 여기에 있다. 아, 위대하다. 아, 훌륭하다.”
장충단의 역사와 비문을 읽으면서 씁쓸한 감상을 저버릴 수가 없다. 국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헌신으로 유지, 지속된다. 특히 왕조시대에 국난을 당하면 수만, 수십만 명의 백성들이 동원되어 무명 전사자가 되고 만다. 양반이든 상민이든 목숨은 하나요 등가의 가치를 갖고 있다. 조선 왕조는 수많은 외침을 당했고 수많은 백성이 나라를 지키다 순국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군사를 지휘한 총사령관 정도의 지위를 가지고 순국한 지휘관에 대해 사당 아니면 위령비를 세워 배향토록 한다. 그러나 장충단비는 파격이다. 을미년에 일어난 국모살해사건이라는 참변을 당한 고종은 왕비를 지키려다 순국한 장졸과 신하를 위해 특정한 장소에 비를 세웠다. 그리고 여론에 못 이겼는지 아니면 대의명분을 세우기 위해서였는지 장충단에 십여 년 전에 일어났던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에 순국한 장졸과 문신까지 배향하게 했다. 장충단의 역사적 배경를 공부하고, 비문을 읽으면서 국가는 왜, 존재하는가? 국가란 백성에게 무엇인가? 에 대해 묵직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