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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Jan 24. 2024

부러운 사제

조선의 대표 개혁가 조광조와 소쇄원 주인 양산보

화순군 능주면 소재지에서 운주사로 가는 방향 왼편에 '정암 조광조 선생 적려 유허 비(靜菴 趙光祖 先生 謫廬 遺墟碑)'가 있다. '적려'란 유배되어 간 곳, 즉 유배지를 말하며, '유허비'는 인물의 옛 자취를 밝혀 후세에 알리고자 세운 비를 말한다. 정암 조광조(1482~1520)는 1519년 기묘사화로 능주(당시 능성)에 유배되어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했다. 시신은 화순군 이양면 쌍봉사 앞 중조산에 임시 안장되었다가 용인 선산으로 옮겼다. (제자이면서 동학이기도 한 제자 학포 양팽손(1488~1545)이 조광조의 시신을 염하고 자신의 집 아래에 반장했다. 양팽손은 능주가 고향으로 기묘사화가 일어났을  때 조광조의 구제하기 위해 상소를 올렸다가 삭직되었다. 화순에는 조광조와 양팽손을 배향하는 죽수서원이 있다. 우리나라 서원 중 정암과 학포처럼  평소에는 사제지간이요 벗이었으면서 스승이 죽었을 때는 그 시신을 염(殮)하고 임시 안장했던 제자를 배향하고 있는 서원을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처럼 KTX가 없던 시절 저자는 설, 추석 같은 명절이 되면 승용차로 서울을 출발하여 능주를 거쳐 고향(이양)을 가게 되는데 조광조 유허비를 지날 때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가 허리를 꽂꽂하게 편 채 앉아 사약을 받아 마시는 장면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조광조는 누구인가? 조광조의 자(字)는 효직(孝直)이고, 스스로 정암(靜菴)이라는 호(號)를 지었다. 조광조는 신진 사림으로 조선 중기에 왕도정치를 실현시키고자 기득권 세력과 싸운 개혁가였다. 그가 조정에 진출했을 때는 중정반정으로 훈구세력이 권력을 다 잡고 왕(중종)을 거의 허수아비로 만든 시기였다. 조광조가 중종의 눈에 띌 기회가 왔다. 삼인대(三印臺) 상소 사건이다. 사건의 발단은 대강 이러하다. 반정 성공 후 반정공신(反正功臣)들은 중종의 비 신 씨를 왕비에서 폐위시킬 것을 강요하였다. 신 씨는 반정을 반대한 신수근의 딸이기 때문이다(사실, 신수근을 죽인 반정 세력은 그의 딸이 중전의 자리에 있는 것이 부담되었을 것이다.) 중종은 반정공신들의 강요에 못 이겨 신 씨를 폐출하고 새 왕비를 맞아들였으나 오래지 않아 세상을 떠나게 된다. (신씨는 인왕산 아래 옛 거처로 쫓겨나 살게 되었다. 유난히 금실이 좋아 함께 고락을 나누며 살아왔던 중종은 반정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부인을 잊을 수가 없어 경회루에 올라 신씨가 있는 인왕산 기슭을 바라보곤 하였는데 이 소문이 신씨의 귀에 들어가자 아침 일찍 인왕산 치마바위에 올라가 함께 살 때 자주 입었던 치마를 널어놓고 저녁이면 거두었다. 이 일로 인해 사람들은 신씨가 치마를 걸쳐 놓았던 바위를 치마바위라고 불렀다(<종로구지> 하권 977면.) 


당시 담양부사 박상(朴祥), 순창군수 김정(金淨), 무안현감 유옥(柳沃) 등 세 사람은 비밀리에 순창 강천사 계곡에 모여 억울하게 폐위된 신 씨를 왕비로 복위시키자는 상소를 올리기로 결의하였다. 그들은 소나무 가지에 관인(官印)을 걸어 놓고 죽기를 맹세하며 상소문을 올렸다. '신비복위소(愼妃復位疏)'다. 박상과 김정은 상소에서 중종의 비 신 씨가 정당한 이유도 없이 쫓겨난 것은 성리학적 명분과 대의에 어긋나므로 복위시키고, 유교 질서를 어지럽힌 주동자들은 국모 폐출의 죄를 물어 관작을 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상소는 살아있는 권력에 대한 정면도전이었지만, 사림의 유학자들을 각성시키고 단합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사간원의 대간을 비롯한 훈구세력은 상소인들을 탄핵하여 유배형에 처했다.  

 

삼인대 상소 사건이 마무리되었을 때 조광조는 과거에 급제한 후 막 관직에 진출하여 사간원 정언(正言)의 자리에 있었다.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한 조광조는 유생들의 본이 되어 성균관의 추천으로 관직을 얻었지만, 나랏일을 하려면 스스로가 허물이 없고 당당해야 한다는 소신으로 알성시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조광조에게 정언 자리는 그의 성품에 정확히 맞는 자리다. 조광조는 상소를 올려 구언(求言, 나라가 어지러울 때 임금이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한 방책을 백성에게 구하는 것)을 한 상소자들을 처벌하자고 주장한 것은 대간(臺諫,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에 근무하는 관료) 본분을 상실하였으므로 모두 파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신이 이제 정언이 되었는데, 어찌 직분을 잃은 대간과 함께 일할 수 있겠습니까? 서로 용납할 수 없을 것이므로 양사(사헌부와 사간원)를 파직하여 다시 언로를 여십시오." 옳고 그름에 대한 입장이 분명하고 대쪽 같은 조광조의 성품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장면이다. 그의 자 효직(孝直)에서 풍기는 올곧고 강직한 이미지와도 일치한다. 이 상소를 통해 조광조는 사림 세력이 생각하는 시대적 요구를 실현할 지도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조광조는 폐비 신 씨의 복위를 주장한 상소자들의 주장이 옳다고 옹호한 것은 아니었다. 조광조가 중요하게 생각한 점은 상소인의 주장의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따지지 않고 다만 대간이라면 언로(言路)를 여는 것이 직분인데, 상소자들이 지나친 말을 했다고 해서 직접 나서서 죄주기를 청한 대간은 그 직분을 잃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은 그처럼 직분을 잃은 대간과 같이 일을 할 수 없다고 하면서 두 기관의 관원들을 모두 파직하여 언로를 다시 열 것을 요청하였다. 중종은 대신들과 의논한 다음 조광조의 요청에 따라 대간의 관원을 교체하였다. 당시 정세로 볼 때 누구 편도 들지 않고 중립성을 지키면서 명분과 대의를 쫒아 옳은 말을 하는 조광조가 돋보였을 것이다. 조광조의 주장을 요즘식의 화법으로 표현하자면 사간원은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마땅한 분인데 주무 부서에서 오히려 언론에 재갈을 물리고 처벌했다는 것이다. 삼인대 상소 사건에서 보여준 조광조의 대의 명분론은 이후 추진될 개혁의 신호탄이 되었다. 


중종의 절대적 신임을 얻은 조광조는 성리학에 기반한 왕도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여러 개혁을 추진했다. 조광조는 덕(德)과 예(禮)로써 다스리는 유학의 이상적 왕도정치를 현실에 구현하고자 했다. 그의 개혁의 방향은 훈구세력을 타도하고 구제도를 개혁하여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그는 향촌의 상호부조와 풍속교화를 위하여 향약(鄕約)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미신타파를 내세우며 소격서(昭格署)를 폐지시켰다. 천거로 인재를 발탁하는 현량과(賢良科)를 처음 실시하여 30대의 신진사류를 요직에 안배하고 훈구세력을 외직으로 몰아냈다. 조광조와 신진사류는 훈구세력인 반정공신을 공격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너무 많으니 위훈삭제(僞勳削除), 즉 공도 없으면서 공신에 봉해진 사람들의 훈작 삭탈을 추진했다. 이러한 개혁 작업, 특별히 위훈삭제는 기득권 세력이 된 훈구세력의 거센 저항에 직면했으며, 중종조차도 달가워하지 않을 정도였다. 조광조는 117명의 정국공신 중에 88명을 삭훈하고 29명만 남겨놓았다. 


훈구세력을 몰아내고 제도를 일신하고자 했던 조광조와 그의 개혁세력은 암초에 부딪혔다. 급하면 체하고 강하면 부러지는 법이던가. 훈구세력의 반격이 시작됐다. 홍경주(洪景舟),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 훈구세력은 후궁을 움직여 왕에게 신진사류를 무고하도록 하였다. (남곤은 어려서부터 조광조와 교유했으며 처음에는 사림파로서 중종에게 조광조의 중용을 적극 추천하기까지 했다.) 야사에 따르면 훈구세력은 대궐 나뭇잎에 과일즙으로 ‘주초위왕(走肖爲王, '趙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라는 글자를 써서 벌레가 갉아먹게 한 다음 궁녀에게 이를 따다가 왕에게 바치도록 하는 등 조광조에 대한 의심을 조장시켰다고 한다. (1995년 모 방송국에서 서울대 농대에 의뢰하여 실험한 결과 곤충이나 벌레가 글자대로 갉아먹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야사의 기록은 훈구파가 사림의 지도자인 조광조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조광조를 제거하려고 혈안이 되었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훈구세력은 밤에 경복궁 북쪽 신무문(神武門)을 통하여 비밀리에 왕을 만나 조광조 일파가 당파를 조직하여 역모를 꾀한다고 무고하였다. (임금이 대신을 만나려면 승정원의 당직 승지를 거쳐야 하지만, 이날 중종은 훈구 세력에게 표신을 주어 한 밤중에 궁궐로 불러들였다.) 조광조의 급진적인 도학정치(道學政治) 주장에 염증을 느껴오던 중종은 훈구 대신들의 탄핵을 받아들여 조광조와 그 일파를 제거했다. 조광조가 왕을 움직여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처럼 훈구 세력도 어떻게 왕의 역린을 건드리면 조광조 등을 제거할 수 있을 것인가를 잘 알고 있었다. 기묘사화 후 위훈삭제 처분은 취소되었고 정국공신은 원래대로 회복되었다. 훈구세력이 조광조 등을 탄핵한 이유를 알 것이다. 


홍명희의 <임꺽정>(1991년)에서는 조광조가 전광석화와 같이 개혁을 추진하는 것에 대한 후폭풍을 암시한다. 갖바치(백정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임꺽정의 스승이면서 유불선의 가르침을 통달한 인물)와 조광조와의 대화이다. 엄격한 신분계급사회에서 사대부가 갖바치와 교유한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행동이다. 조광조와 관련된 소설이나 문헌에서는 갖바치가 등장하는데, 이는 조광조가 신분과 계급의 차이를 뛰어넘어 기본적으로 사람 됨됨이를 존중하고 필요하면 누구에게서든 배운다는 자세를 엿볼 수 있다. 


갖바치: "지금 영감께서 대사헌 되신 지가 햇수로 불과 삼 년인데 그동안 세상 풍기(風紀)가 일변하였스니다. 다른 것은 고만두고라도 청촉(請囑)이 없어지고 뇌물이 끊어졌으니 그것이 여간 변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뇌물이나 받아먹고 청촉질이나 하던 사람들이 그 심장이야 갑자기 변하겠습니까? 그 사람들이 활을 들고 영감을 과녁삼아 노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영감도 아시겠지요?" 


조광조: "그렇기도 하겠지."


조광조가 대사헌(오늘날의 검찰총장)이 되면서 청탁이나 뇌물이 없어졌을 정도로 부정부패가 일소되었다는 평가다. 그러나 조광조의 개혁을 반대하는 측에서 그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이야기다. 갖바치는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간다. 


갖바치: "말씀하는 길에 한마디 말씀을 여쭐 것이 있습니다. 영감의 재주가 일세를 경륜하실 만하나 임금을 만난 뒤에라야 그 재주를 다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한데 지금 상감께서는 영감의 명망은 아시겠지만 영감의 재주는 아시지 못할 것입니다. 만에 하나 소인이 이간질하면 공은 반드시 화를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한번 급류(急流)에서 물러나는 것이 어떻습니까? 결단하실 용맹이 있습니까?"


조광조: "용맹은 있고 없고간에 남의 신자(臣子)된 도리가 오직 충성을 다할 뿐이지 다른 말이 왜  있겠나?"


갖바치: "영감이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당시 백성들은 기득권 세력들과 싸우는 조광조 등을 지지하고 박수를 보냈지만, 임금이 언제 마음이 바껴 조광조 등을 제거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갖바치의 말은 아무리 조광조의 뜻이 올곧고 옳다고 해도 임금의 지지가 없다면 성공할 수도 없을 뿐더러 개혁을 위한 노력이 오래 지속될 수도 없음을 비유한 말일 것이다. 갖바치의 말은 조광조의 운명을 암시하는 듯 하다. 


조광조 등이 제거된 후에 백성들은 남곤과 심정을 조정의 간신배로 지목하였다. 오죽했으면 두 사람의 이름을 따서 '곤쟁이젓'이라는 이름을 붙였겠는가. 본래 곤쟁이젖은 자하(紫蝦), 즉 자주빛 나는 작은 새우로 담근 젖이다. 곤쟁이젓은 그 맛이 얼마나 좋은지 감동해(感動醢) 혹은 감동해(甘冬醢)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경상도 말에 ‘곤정곤정(袞貞袞貞)거린다’라는 말이 있다. '곁에서 계속 중얼중얼 거린다'는 뜻이다. 이 말 역시 남곤과 심정을 증오하는 말에서 생겼다고 한다. 세조의 쿠테타에 가담한 신숙주를 미워하는 마음에서 녹두나물을 숙주나물로 부르는 것과 같은 이치다. 녹두나물은 죄가 없다. 왕조 시대 백성은 정치적으로 복잡한 맥락을 한 마디의 말로 축약하여 당시 시대의 키워드를 짚어내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 촌철살인(寸鐵人)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훈구세력이 조광조 등 사림을 제거하기 위해 왕을 설득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대화 내용을 되짚어보자.


훈구세력: "조광조 등을 보건대, 서로 붕당을 맺고서 저희에게 붙는 자는 천거하고 저희와 뜻이 다른 자는 배척하여, 세력을 만들어 서로 의지하여 권력이 있는 요직을 차지하고, 위를 속이고 사사로운 감정을 행사하되 꺼리지 않았습니다. 또한 후진을 유인하여 궤격(詭激, 말과 행동이 사리에 맞지 않고 지나치게 과격함)이 버릇이 되게 하여, 젊은 사람이 어른을 능멸하고 천한 사람이 귀한 사람을 방해했습니다. 이로써 국론이 전도되고 조정이 날로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므로,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속으로 분개하고 한탄하는 마음을 품었으나 그 세력이 치열한 것을 두려워하여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중종: "죄인에게 벌이 없을 수 없고 조정에서도 청하였으니, 빨리 정죄(定罪)하도록 하라."


훈구세력: "누구를 우두머리로 합니까?"


중종: "조광조를 우두머리로 하라."


훈구세력: "이들이 늘 한 짓은 다 정의에 핑계를 댔으므로 그 죄를 이름 붙여 말하기 어려우니, 짐작해서 해야 할 것입니다."


실록에서 이야기하는 조광조와 신진사류의 죄는 붕당을 형성하여 자기편끼리 서로 요직에 앉히고 원로대신을 가볍게 생각하여 조정의 위계질서를 무너뜨렸다는 것이다. 요즘 사회에서 자주 사용하는 용어로는 진영 정치 또는 편가르기 정치를 했다. 지위도 높고 연륜이 많은 훈구세력이 보기에는 신진 개혁세력은 버릇장머리가 없고 과격하여 위아래도 몰라본다는 의미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조광조는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간곡한 변호로 일단 사형은 면했으나 능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성균관 유생들도 조광조의 억울함을 항소했지만 소용없었다. 왕조 시대에 임금은 신하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지만, 중종은 조광조를 신임하고 그의 개혁을 지지한 지 4년 만에 토사구팽(兎死狗烹)하였다. 중종은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조광조를 기용하는 등 신진 사림이 왕의 개혁 추진에 대한 기대를 하도록 했지만, 의 마음은 조변석개처럼 변하고 말았다. 지엄한 왕(중종)과 신하 조광조의 관계는 과유불급이었던가.


조광조의 유배지 능주에 제자들이 따라나섰다. 제자들 중에 양산보(梁山甫, 1503~1557)가 있다. 양산보는 담양 소쇄원(瀟灑園)을 만든 장본인이다. 양산보는 조광조를 스승으로 모시고 2년 가까이 학문 연마와 과거 시험 준비에 정진했다. 양산보는 조광조가 유배형을 당하고 사사(賜死)되는 것을 목격하면서 스승이 꿈꿨던 왕도정치의 꿈을 버리고 담양에 소쇄원을 만들게 된다. 양산보는 스승 조광조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본받고 싶었다. 당시 조광조는 신진 사림이 손꼽는 롤모델이었지만, 양산보에게 조광조는 그 이상의 존재였다.


스승은 임금으로부터 철저히 버림받았다. 스승은 금부도사가 한양에서 사약을 가지고 유배지에 도착할 때까지도 임금이 자신을 다시 부를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스승은 임금이 그를 사사하라는 왕명을 가지고 왔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스승은 임금의 진위를 확인한 후에는 의관을 갖추고 임금이 계신 북쪽을 향하고 숨을 거두었다. 양산보는 스승이 사약을 마시기 전에 토해낸 절명시를 보관했다.


임금 사랑하기를 어버이 사랑하듯 하였고

나라 걱정하기를 내 집 걱정하듯 하였네

밝은 해가 이 세상을 내려다보니

일편단심 내 충심을 더욱 밝게 비추리


저자는 조선 왕조에서는 걸출한 민본(民本)주의자들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조선 전기의 삼봉 정도전, 후기의 다산 정약용 그리고 중기의 정암 조광조다. 이들은 맹자(孟子)의 진심장구(盡心章句)에 나오는 "백성이 존귀하고, 사직은 그 다음이며, 왕은 가볍다(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라는 民貴君輕(민귀군경)의 충실한 신봉자였다. 사극 <정도전>에서 이방원의 손에 최후를 맞이한 정도전의 유언처럼 "왕은 하늘이 내리지만 재상은 백성으로부터 나온다. 이 나라의 주인은 백성이다. 임금은 백성을 위해 존재하는 도구다"라는 말이다. 이들의 민본 사상은 조선 오백년을 지탱하는 근원이 되었을 것이다. 후세가 백성을 위한 일이라면 목숨을 내놓고 옳은 말을 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던 민본주의자를 높게 평가하는 이유일 것이다. 조선은 유학을 크게 발전시키는데 기여한 유자들의 신주를 문묘에 봉숭하였는데, 조광조는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이황과 함께 오현(五賢) 중 한 명이 되었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가 죽은 후에 더 진정성 있는 평가가 이루어진다고 본다. 조광조가 사사(賜死)된 후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가 조광조에 대한 행장(行狀)을 썼다. 행정이란 사람이 죽은 뒤에 그 사람의 평생의 행적을 기록한 글이다. 이황이 작성한 행장의 한 구절이다. "선생은 타고난 자품이 특이하여 동류 중에서 뛰어나니, 마치 화련한 난새(전설 속에서 봉황과 비슷한 새)가 머무르고 고상한 고니가 우뚝 선 것 같고, 옥같이 윤택하며 금같이 순수하고, 또 무성한 난초가 향기를 풍기고, 밝은 달이 빛나는 것과 같았다." 이황은 난새, 고니, 옥, 금, 난초, 달 등의 단어를 동원하여 조광조의 성정과 인품을 평가하였다. 이이도 조광조에 대한 행장에서 조광조의 자질과 정신 그리고 행동거지를 매우 높게 평가했다. "우리나라 유현(儒賢, 유학에 정통하고 어질며 총명한 선비) 중 자질이 아름답기로는 조광조 만한 사람이 없다. 정신은 흰 달빛처럼 맑고, 행동거지는 움직이기만 하면 예법에 맞았다."


양산보가 만든 소쇄원에는 광풍각(光風閣)과 제월당(霽月堂) 두 전각과 대봉대(待鳳臺)가 있다. 광풍각과 제월당은 '광풍제월(光風霽月)'에서 연유했다. 광풍제월은 송나라 명필 황정견이 주무숙의 사람됨을 광풍제월에 비유한 것에서 비롯됐다. "그의 인격은 고매하여 마치 비가 온 뒤에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과 하늘에 떠 있는 맑은 달과 같다." 하서 김인후가 양산보의 깨끗하고 고매한 인품을 비유하여 결정했다. 그러나 대봉대는 관점에 따라서는 오해를 살 수 있는 이름이다. 진인 출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대봉대를 지었다고 소문이 나면 곤란할 수 있다. 양산보가 지은 대봉대는 봉황을 기다리는 곳이지만, 봉황은 군자를 뜻한다. 그는 봉황이 대나무에 맺힌 이슬과 열매만 먹는다 하여 대나무를 심었다. 양산보에게 봉황은 스승 조광조이고 스승이 추구했던 이상적인 왕도정치가 아닐까 싶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아름다운 말이 있다. 사제 관계에서 가르친 선생님보다 더 기량이 뛰어난 제자가 나올 때 사용한다. 청출어람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양산보는 스승 조광조를 일생에 걸쳐 존경하고 흠모하면서 스승을 닮고자 하였다. 소쇄원은 양산보가 스승 조광조를 기리고자 조성한 원림(園林)이라고 생각한다. 그 원림에서 그는 호남의 신진 학자들과 친교를 나누고 시를 짓고 학문을 논했다. 양산보와 사돈을 맺은 하서 김인후는 소쇄원 48 영(詠)을 지었다. 양산보는 은일처사로 재야에서 스승 조광조가 남긴 유훈을 되새기며 소쇄원을 남도 최고의 원림으로 꾸몄다. 양산보의 학문 수준과 그의 고매한 성품을 보면 마음만 먹으면 중앙 정계에 얼마든지 진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평생 세상과 벽을 쌓고 소쇄원에 파묻혀 살았다.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죽지 않았다면 소쇄원이 존재했을까?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의 만남은 하늘이 내리고 그 관계에 대한 책임은 사람에게 있다'라고 한다. 양산보와 조광조와의 만남은 하늘이 맺어준 것이 분명하다. 스승이 두 사발의 사약을 마시고 생을 마치는 광경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양산보에게 세상은 신의가 없었다. 양산보는 스승을 체화시킨 소쇄원을 만들어 스승을 대신하여 유교의 이상적 공간을 꾸미려는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조광조는 자랑스러운 제자 양산보를 두었으며, 두 사람은 후세에 부러워할 만한 사제의 본보기를 남겼다. 스승 조광조는 서른여덟의 짧은 생을 마쳤지만, 양산보는 소쇄원을 통해 스승을 영원히 기리고 싶었을 것이다. 제자가 조성한 소쇄원의 대나무 숲에는 스승이 시대에 던져준 울림을 간직하고 있는 듯 늘 맑고 푸르다. 


문순태. (2015). 소쇄원에서 꿈을 꾸다. 서울: 도서출판 오래.

이종수. (2020). 조광조 평전. 서울: 생각정원.

조성일. (2022). 개혁하는 사람, 조광조. 고양: 시간여행.

최인호. 유림 1. 파주: 열림원.

홍명희. (1991). 임꺽정. 서울: 사계절. 

<종로구지> 하권 977면.

<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전종합DB. <연려실기술>. <퇴계집>.

김정탁. (2023). 중앙일보. 그림자도 쉬어 가는 곳, 그곳에 서린 핏빛 권력 다툼. 12월 29일.

이성우. (2021). 월간중앙. 생이별 ‘아픈 사랑’ 서려 있는 인왕산(仁王山) 치마바위. 8월 17일.

<정도전>. (2014). 드라마.

<조광조, 그의 개혁은 실패했나>. (2019). 다큐멘터리.

<KBS 역사의 라이벌-어디까지 사실인가, 조광조와 남곤>. (1995). 다큐멘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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