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싱만큼 헝그리(hungry) 정신을 필요로 하는 운동도 드물 것이다. 헝그리 정신이란 무엇인가? 사전에서는 '가난하고 굶주린 상태와 같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듯한 마음으로 무엇이든지 열심히 하는 자세'라고 정의한다. 한마디로 밑바닥 인생을 살아본 사람이 재기의 꿈을 안고 악착같은 마음으로 시작하는 독한 근성이다. 복싱 선수들은 마치 로마시대 검투사를 닮았다. 복싱 선수는 장갑을 낀 손만 사용하는 것이고, 검투사는 살상용 무기를 가지고 싸운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주로 얼굴과 복부를 가격하는 복싱 경기에서 선수들의 눈언저리나 귀가 찢어지는 것은 예삿일이다. 독한 근성의 헝그리 정신이 없으면 쉽게 시작하기 어려운 스포츠다.
한국권투연맹에 따르면, 우리나라 복싱계는 지금까지 43명의 세계챔피언을 탄생시켰다. 43명의 선수들이 세계챔피언의 왕좌에 올랐던 시기를 보면 대다수는 우리나라가 어렵게 살던 시절에 운동을 했다. 그들의 헝그리 정신은 복싱으로 세계를 호령하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헝그리 정신으로 무장한 선수들이 활동하던 시기와 우리나라 복싱의 전성기는 겹친다.
세계챔피언에 오른 선수들은 숱한 고난과 역경을 극복했을 것이다. 특히 홍수환 선수는 복싱을 휴머니즘과 결합시켜 복싱의 매력을 발산시켰다. 휴머니스트 홍수환 선수가 남긴 일화다. 1974년 7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열린 세계밴탐급 챔피언 타이틀전에서 도전자 홍수환 선수가 챔피언 아널드 테일러에게 판정승으로 챔피언 자리에 올랐을 때다. 홍 선수가 엄마에게 전화로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라는 말에 엄마는 "대한민국 만세다"라고 대답했다. 홍 선수의 챔피언 등극은 장한 아들의 경사로 끝난 것이 아니라 국가의 경사가 되었다. 홍수환 선수를 4전 5기의 챔피언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1977년 11월 파나마에서 열린 세계주니어페더급 챔피언 결정전에서 홍 선수는 파나마의 헥토르 카라카스에게 초반 2라운드에 무려 4번 다운을 당했지만 결국 KO승을 했다. 4전 5기의 신화다. 그는 넘어지기를 반복했지만 오뚝이처럼 일어나는 불굴의 헝그리 정신과 꺽이지 않는 투지를 보여주었다. 흑백텔레비전으로 중계된 그의 경기를 보던 국민들은 홍 선수의 투혼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스포츠의 마력이다. 전 국민을 하나로 뭉치게 한다. 홍수환은 영웅이 되어 돌아왔고 국민들은 김포공항에서 시청까지 카퍼레이드로 보답했다. (홍수환과 카라카스는 지금도 우정을 이어나가고 있다. 2017년에는 카라카스가 파나마 국회의원이 되어 한국을 찾았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진정한 스포츠맨십을 보여주었다.)
홍수환은 모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4전 5기의 뜻을 산전수전 겪은 노련한 프로선수답게 해석했다. 4전 5기란 "‘4번 다운당하고 5번 일어나 이겼다’가 아니라 ‘4번 다운당하고 또 오기(傲氣)로 덤볐다’이다. 이 오기가 바로 프로 정신이다"라고 말했다. 아라비아 숫자 5가 우리말의 '오기'와 절묘하게 연결된다. 그러면서 홍수환은 복싱을 인생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살아보니 복싱과 인생은 똑같더라. 내가 권투 하면서 깨친 것은 하늘은 누구도 완전한 인간으로 만들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펀치가 세면 맷집이 약하거나 순발력이 떨어집니다. 반면 펀치는 좀 약해도 상대의 허점을 낚아챌 순발력이 있으면 언제든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어요. 복싱은 말이에요, 상대랑 내가 1대 1 맨몸으로 근수(몸무게)까지 똑같은 조건에서 싸우는 겁니다. 같은 조건에서 싸워서 지는 놈이 어떻게 세상을 이기겠습니까. 그 정신으로 인생을 살아야 하는 거죠.” 그러고 보니 복싱은 가장 공평한 경기라는 생각이 든다. 체중이 같은 선수가 상대와 맨몸으로 싸우기 때문이다. 홍 선수는 은퇴 후에 대중 강연도 많이 했는데 입담이 좋아 청중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그는 권투 선수로서 뛰어난 능력을 소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복싱의 철학을 우리 인생에 비유하면서 그의 강의를 듣는 청중에게 자신감과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홍 선수에게 복싱은 사각의 링 위에서 상대에게 이기고 지는냐의 승패에 그치지 않는다. 그에게 복싱의 승패를 좌우하는 핵심요인은 정신력이다.
세계적인 복싱 선수 가운데 파나마 출신 로베르토 듀란(1951~)이야말로 가장 헝그리 정신에 어울리는 선수다. 듀란은 1951년 파나마 공화국 엘초리요에서 파나마인 어머니와 멕시코계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고향 엘초리요는 파나마운하 건설로 형성된 도시로서 수많은 이민자가 사는 슬럼가였다. 1950~60년대 파나마 운하 문제로 반미 정서가 팽배했던 파나마에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듀란은 집 나간 아버지를 원망하며 엄마와 동생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그는 주먹으로 싸움판에서 돈을 벌어야 했다. 듀란은 ‘돌주먹(hands of stone)’이라는 별명처럼 강펀치를 자랑했다. 거리에서 배운 싸움 실력으로 프로에 뛰어들었다. 영화 <핸즈 오브 스톤>(2016)은 듀란이 권투 선수로서 겪은 고뇌와 좌절 그리고 영광의 순간을 담고 있다.
듀란을 보면 인간의 성장에 있어 환경이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파나마 운하에 대해 잠깐 살펴보자. 파나마 운하는 수에즈운하에 이은 두 번째 인공운하로 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하는 길이 80km, 갑문 폭 33.6m의 운하다. 파마나 운하 건설설에 뛰어든 국가는 프랑스였지만, 황열병, 말라리아 등 풍토병을 견디지 못하고 운하건설을 포기하자 1900년대 초 미국이 건설을 재시도했다. 미국은 기술과 자본의 우위를 살려 운하건설 공사를 진행했지만, 운하는 공기를 훨씬 넘어선 1914년에야 완공됐다. 파나마운하 지대의 통제권을 단단히 틀어쥐고 있던 미국은 민족주의 열풍으로 파나마운하 통제권 환수 운동이 파나마 내부에서 거세지자, 1977년에야 비로소 미국과 파나마 공동 통제 체제로 바뀌었고 1999년부터 국영 파나마운하공사가 모든 통제권을 행사하고 있다. 듀란이 청년으로 성장하던 시기는 파나마에서 민족주의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반미정서가 극에 달한 때다.
영화 <핸즈 오브 스톤>을 보면 듀란이 권투를 하는 두 가지의 주된 목적은 가난한 자를 위해 싸우고 잃어버린 파나마의 자존심을 되찾는 것으로 보인다. 듀란은 링아래의 현실과 링 위에서 요구하는 자세를 분별하지 않는다. 링 위에서도 노골적으로 반미감정을 들어내고 미국 선수와 맞붙을 때는 상대 선수를 모욕하고 비난하는 등 비신사적인 행동을 했다. 스포츠가 멘털 싸움이라고 해도 너무 앞서 나갔다.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했다. 미국의 슈거 레이 레너드와 시합을 앞두고 열린 인터뷰에서 레너드의 부인을 창녀라고 부르고, 슈거(sugar) 레이 레너드를 설탕 없는 밋밋한 사람으로 부르면서 인종차별이나 인격모욕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행동을 했다. 듀란은 경기할 상대를 하나의 인격체로 보지 않고 반미정서를 동원하여 평가하는 우를 범했다. 듀란은 링위에서는 20세기 최고의 복싱 파이터로 평가받고 있지만 링아래에서는챔피언 다운 품격이 아쉬운 점이다.
헝그리 정신으로 무장한 복싱 선수가 왕좌를 차지하고 대중의 영웅으로 부상하는 경우를 왕왕 보지만, 그 선수가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을 때는 챔피언에 맞는 품격을 요구한다. 1980년대 미국의 슈거레이 레너드는 헝그리 정신과 품격을 갖춘 프로 선수가 아닌가 싶다. 레너드 역시 가난한 빈민가에서 태어났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아버지의 가정 폭력에 시달려야 했다. 미국에서 빈민가의 흑인들이 성공할 길은 갱이 되거나 운동을 하거나 둘 중 하나라는 말이 있다. 레너드가 믿을 수 있는 것은 맨주먹뿐이었다. 그런 레너드가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고 5 체급 세계챔피언에 오른 전무후무한 선수로 기록되고 있다. 레너드는 그의 복싱 실력만큼이나 사생활도 모범적이었으며 신사였다. "상대를 쓰러트리는 건 내 주먹이 아니라 나의 냉철함이다." 이 말은 레너드가 어떻게 다섯 체급에서 세계 챔피언이 될 수 있었던가를 설명해주고 있다.
우리나라의 홍수환 선수, 파나마의 로베르토 듀란, 미국의 슈거 레이 레너드 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챔프들이 전하는 교훈은 헝그리 정신만으로 정상에 오르는 것은 아님을 말해준다. 복싱은 가난한 사람이 하는 스포츠라고 하지만, 챔피언에 오른 선수들의 메시지는 설득력이 있다. '복싱은 체중이 같은 선수가 상대와 맨몸으로 싸우는 가장 공평한 경기다'(홍수환). '내면에 고통을 견디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는 사람이 복싱을 한다'(슈거 레이 레너드). '챔피언이 되지 못할 망정 싸우고 싶다'(로베르토 듀란). 복싱 역시 자신만의 철학이 스며들 때 정상을 호령하며 롱런할 수 있다. 스티브 잡스의 말은 복싱 챔피언에게도 들어맞는다. '늘 갈망하면서 우직하게 나아가라(Stay hungry, stay foo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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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즈 오브 스톤. (2016).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