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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Mar 16. 2024

생일의 다른 이름, 귀(耳) 빠진 날

생(生)과 사(死)의 경계 지점

우리는 흔히 생일을 '귀빠진 날'이라고 부른다. "오늘은 내 귀빠진 날이야"라고 말하면 자기의 생일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사전에서도 '귀빠지다'는 '출생하다', '태어나다'를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고 설명한다. 왜, 우리 조상들은 한 인간이 태어나는 순간을 '귀가 빠지다'로 표현하게 되었을까?


산모가 태아를 출산하는 과정에서 거쳐야 하는 생과 사의 경계지점이 있다. 그 경계지점이 바로 태아의 귀(耳)가 산모의 자궁에서 빠져나오는 순간이다. 산모가 자연분만을 할 때는 태아의 머리가 먼저 나오는데 이때 산모는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을 경험한다고 한다. 태아의 귀는 어깨너비보다 넓어 귀가 자궁을 빠져나오기 어렵기 때문이다(만약 태아의 어깨너비가 머리보다 크다면 빠져나오는데 문제가 생길 것이다). 태아의 귀가 순조롭게 빠져나오는 순간 산모는 '살았다'는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다. 귀가 빠져나오는 것은 곧 태아와 산모 모두 무사하다는 신호이고, 생(生)과 사(死)의 경계지점에서 생의 영역으로 넘어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금처럼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우리 어머니들은 댓돌 위에 고무신을 벗어놓고 해산방에 들어가셨다고 한다. 무사히 순산을 하고 살아서 '내가 다시 저 신을 신을 수 있을까'라는 확신을 할 수 없어서다.  


저자의 어머니도 태아의 귀가 빠지는 고통을 이겨내고 댓돌 위에 벗어놓은 신발을 다시 신으셨다. 댓돌의 신발을 떠올리면 어머니에게 나의 생일은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시간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자녀의 생일을 잊는 경우가 있어도 어머니는 자녀의 생일을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부터 저자는 생일날 아침에 부모님을 모셔놓고 큰 절을 올렸다. 고전(古典) 시간에 부모와 자식 간의 인연에 대해 배우고 나서였다. "아버지, 어머니 저를 낳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말과 함께 두 분의 손을 잡아드리고 안아드렸다. 부모님은 금세 눈시울이 붉어지셨고 '무탈하게 자라주어 고맙다'라는 말로 철이 든(?) 아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하셨다(첫 해는 자기 생일날 부모님을 모셔놓고 감사의 절을 올리는 것이 쑥스럽고 어색하였지만, 해가 지날수록 그 의미는 훨씬 더 컸다. 그러나 내 자녀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했으나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인간의 의식이 행동으로 옮겨지기까지는 특별한 동기, 성찰, 각성이 필요한 법이다). 부모 곁을 떠나 살 때는 전화를 드려 감사하다는 말을 전해드렸다. 부모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나라는 존재가 없다고 생각할 때 얼마나 소중한 관계인가 싶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하늘이 내린다는 천륜(天倫)이라는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때 학교에서 배웠던 사자성어가 '풍수지탄(風樹之嘆)'이다. “나무는 조용히 하고 싶어도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려 하지만 기다려주지를 않는다(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 세상은 절대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 뜻대로 하게 내버려 두지 않는지도 모른다. 출세해서 돈 많이 벌어서 부모에게 효도하려고 하면 이미 부모는 저 세상 사람이 되고 만다. 청소년 시절에 배웠던 풍수지탄은 진리다. 그 진리를 부모님에게 잠깐 실천했지만, 잘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면 후회와 한으로 남아 있다. 지금은 진실된 마음을 다해 부모님을 생각하고 추모할 뿐이다.


귀가 빠져야 살아난다. 귀는 태아와 산모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얼굴의 생김새를 표현할 때 귀를 제일 앞에 놓고 이목구비(耳目口鼻)라고 하는가.  특히 관상학에서는 이목구비를 가장 중요시 여긴다. 그러나 이목구비가 귀, 목, 입, 코를 뜻하는 한자어지만, 얼굴이 놓인 위치로나 이치로 보았을 때는 이목비구(耳目鼻口)가 맞을 듯싶다. 사람은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코로 분위기(냄새)를 살핀 후 상황을 종합하여 입으로 말하는 것이다(어감으로는 이목구비가 낫기 하다). 사람들은 귀(耳)를 맨 앞에 놓은 이유를, '세상일에 귀를 기울이며 살아야 한다'로 풀이한다. 또 얼굴의 귀퉁이에 붙어있지만 두 개가 있는 것은, '말하는 것보다 듣기를 두 배 하라는 의미'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늘 하는 말이지만 선조들의 해학적인 의미 부여는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귀가 나오면 공자의 이순(耳順)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순은 60세를 가리키며 글자 그대로 '귀가 순해진다'는 뜻이다. '귀가 순해진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사실, 귀가 양쪽으로 열려있으면 가려들을 수 없다. 대화를 하면서 말하고 싶지 않으면 입을 다물면 그만이다. 상대방의 말을 듣고 싶지 않으면 귀를 막으면 되겠지만, 그것은 상대에게 의도적인 모욕감을 주는 튀는 행동이다. 공자는 나이가 육십 정도 되면 생각이 원만(圓滿)하여 어떤 말을 들어도 순리대로 이해하고 사사로운 감정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는 의미로 귀가 순해진다고 말한 것이다. 공자 시대에 평균연령을 사십 세 안팎으로 보면 이순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육십이 지난 나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이순의 경지에 오르려면 각고의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이가 먹을수록 귀가 순해지기는커녕 자아가 더 경직되어 귀가 더 딱딱해지는 경우도 있다. 성현의 말씀은 범인(凡人)이 일생 좌우명으로 삼고 도달해할 목표는 될 수 있을지언정 보편적인 진리는 아닌 것 같다. 듣고 싶은 말만 듣는지, 귀보다 입을 앞세우는지 경계할 일이다.


산모의 고통이 가장 클 때는 태아의 귀가 빠지는 순간이라고 했다. 그래서 남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 가장 어렵고 가끔은 고통스러울 때가 있는 것인가 싶다. 현대인의 인간관계에서 가장 필요한 덕목으로 경청과 소통을 꼽는다. 경청을 잘해야 소통이 잘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원리다. 대부분 사람들이 잘 들은 후 소통하려고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고 고백한다. 사실, 듣는 것보다는 말하는 것이 더 쉽다. 듣는다는 것은 배려, 인내, 관용, 절제 등 수많은 무형의 덕목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잘 나가는 기업에서는 CEO가 자신의 주요 업무를 직원의 이야기를 잘 듣는 최고경청책임자(Chief Listening Officer)로 생각한다고 한다. 별별 책임자가 다 생긴다.


말을 배우는 데는 2년이면 충분하지만, 듣기를 배우는 데는 60년(耳順)이 걸린다고 한다. 공자가 말한 이순을 기준으로 한 말이다. 이제부터는 이목구비(耳目口鼻)에서 이목비구(耳目鼻口)로 순서를 바꿔보자. 먼저 듣고 보고 분위기도 맡아보고 최종적으로 말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어머니가 목숨을 걸고 빼내준 귀를 소중하게 여긴다면 말이다. "지혜는 듣는 데서 오고 후회는 말하는 데서 온다"라는 속담도 듣는 것의 소중함에 힘을 보탠다. 말하기 전에 우선 듣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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