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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Mar 19. 2024

멘토링, 어떻게 할까?

온고지신(溫故知新)을 넘어 법고창신(法古昌新)으로

현대사회에서는 직장의 구직, 학교의 진로진학, 개인의 잠재력 개발, 인간관계 등 다양한 분야와 영역에서 멘토링(mentoring)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사전적 의미로 멘토링이란, 경험과 지식이 많으면서 현명한 사람이 멘토 역할을 하여 멘티에게 적절한 지도와 조언으로 그의 능력과 잠재력을 향상시키는 것을 말한다. 멘토링의 유래가 된 멘토(mentor)는 사람의 이름이다. '멘토'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오디세우스의 친구 멘토르(Mentor)에서 유래하였다. 멘토는 오디세우스가 트로이전쟁에 출정하여 20년이 되도록 귀향하지 않는 동안 그의 아들 텔레마코스를 돌보며 가르쳤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적절한 멘토링 사례로는 왕조시대의  왕세자를 가르치고 돌본 스승을 들 수 있을 것이다(조선에서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을 설치하고 관료를 배치하여 조직적, 체계적으로 세자를 멘토링했다). 저자가 기억하는 멘토의 인상적인 행동은, 오디세우스가 친구 멘토에게 고마움에 대한 답례로 국가의 고위직을 제안했지만 정중하게 거절하고 조용히 물러났다는 점이었다.


저자는 서양식 멘토링을 우리식으로 해석, 적용하고자 할 때 금방 떠오르는 사람과 그의 철학이 있다. 조선 후기 실학파의 중심에 섰던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 주창했던 법고창신(法古昌新)을 두고 하는 말이다. 법고창신은 연암이 제자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 1750~1805)의 문집인 <초정집 서문>에서 밝힌 것인데 핵심은 이렇다. ‘옛것을 본받는(법고, 法古) 사람은 겉모습이나 형식에 얽매임이 병통이 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창신, 昌新) 사람은 법도가 없는 것이 폐단이다.’ 법고창신은 옛것을 본받되 과거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옛것 중에 없애야 할 것은 과감히 버리되 좋은 취지와 근본은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것은 옛것을 몽땅 버리고 얻는 새로움이 아니다. 혁신을 기하지만 예전의 법도와 정신을 담은 재창조다. 법고창신은 연암이 문장을 작성하는 방법론을 제시한 문장론이지만, 오늘날에는 급변하는 세계에 전통과 변화를 어떻게 해석하고 변용할 것인가에 대한 관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것이다.


법고창신은 “옛것을 익히고 나아가 새로운 것을 안다”는 <논어>의 온고지신(溫故知新) 보다 더 적극적인 표현이다. 온고지신이 옛것을 알아야 새로운 것에 대한 분별력이 생긴다는 앎(지식)의 문제라고 한다면, 법고창신은 옛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실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연암은 법고창신에서 옛것에만 얽매이면 구차한 인습으로 전락하고, 새것에만 힘을 쏟다 보면 정체불명의 얼치기가 된다는 점을 경계했다. 

 

박지원은 친절하게도 법고창신에 해당하는 두 가지의 역사적 사례를 들었다. 첫 번째는 한나라의 한신(韓信, ?~기원전 196) 장군을 보기로 들었다. 한신의 군대는 연전연승하면서 조나라에 쳐들어갔다. 한신의 군대는 정형(井陘) 지역, 즉 좁고 긴 통로를 빠져나가야 해서 군대 행렬이 길게 늘어질 수밖에 없었다. 조나라에선 이를 노려 후미를 기습하여 보급선을 끊어 기세등등한 한나라 군대와 정면 대결하는 것보다 포위하여 굶주림에 빠뜨리자는 계책을 세웠다. 그러나 이 계책은 채택되지 않았다. 만약 이 계책을 사용했다면 한나라 군대는 큰 위험에 직면했을 것이다. 첩자를 통해 이 소식을 들은 한신은 기뻐했다.


정형을 무사히 통과한 한신은 강을 등지고 진을 치게 했다. 이른바 ‘배수진(背水陣)’이다. 한신은 또 기습할 병사 2천 명을 선발해 조나라 진영 부근 산속에 매복시켰다. 그리고 조나라 진영을 공격했다가 여의치 않은 듯 강가의 진영으로 달아났다. 조나라 군대가 진영에서 나와 한나라 군대를 한참 공격했지만 배수진을 깨뜨리지 못했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자기 진영엔 온통 한나라의 붉은 깃발이 펄럭이고 있지 않은가. 그 틈에 한나라의 매복 병사들은 당황한 조나라 군대를 협공하여 승리했다.


승리한 후 장수들이 물었다. “병법엔 산을 등지고 물을 앞에 두고 진을 치라고 했는데, 배수진은 어찌 된 술책입니까?” 한신이 말했다. “병법에 있는데, 그대들이 살피지 못했을 뿐이다. 사지(死地)에 빠진 후에 산다 하지 않았는가? 살 곳이 있으면 병사들이 달아나 오래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훗날 조선의 신립(申砬) 장군이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쳤다. 파죽지세로 북상하는 일본군에 대한 결사항전의 투지였다. 그러나 결정적 패배를 당했다. 다산 정약용은 당시 조선이 중국의 조나라 처지에 있었는데도 거꾸로 한나라 계책을 사용했다고 한탄했다. 탄금대에 이르기 전에 험한 문경새재를 길게 넘어오는 적군을 공략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신립은 한신의 배수진을 고지식하게 사용했다. 옛것을 흉내 냈지만 잘못 배운 것이다.     


두 번째 법고창신의 역사적 주인공으로 우후(虞侯, 생몰연도 미상)를 보기로 들었다. 우후는 손빈(孫臏, 기원전 382년 ~ 기원전 316년)의 아궁이 작전을 변통했다. 손빈은 군대를 이동하면서 아궁이 수를 줄였다. 도망병이 속출하는 것처럼 보여, 추격해 온 적군을 함정에 빠뜨렸다. 병력이 열세였던 우후는 오히려 아궁이 수를 늘렸다. 구원병이 온 것처럼 보여, 적군이 추격을 포기하게 했다. 정반대였지만 옛것을 제대로 배운 것이다. 연암은 "옛것을 배우되 변용할 줄 알고, 새것을 만들되 전범(典範)이 될 수 있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법고가 곧 창신이요, 창신이 곧 법고라는 말이다. 새것을 만들려면 옛것을 변화, 변통, 변용할 수 있어야 한다.      


저자는 법고창신의 본보기를 추가하고 싶다.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를 개척한 겸재(謙齋) 정선(鄭歚, 1676∼1759)의 이야기다. 겸재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는 비 온 뒤의 인왕산 모습을 직접 보고 그린 진경 산수화(眞景 山水畵)다. 화가가 직접 경치를 보고 그림을 그린 것은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당시의 화풍으로는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때에 산수화는 중국의 화풍을 모방하여 실제 경치가 아니라 화가의 의식 속에 존재하는 이상적인 자연을 그린 이념 산수화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조선시대에 중국에 대한 사대(事大)는 국정운영은 물론이고 예술작품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스며들었다.     


정선의 <인왕제색도>가 우리나라 전통 회화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공간감과 실체감, 그리고 먹의 깊이 때문이라고 한다. 진경 산수화의 매력이다. 그림 앞에 서면 내 앞에 산이 펼쳐진 듯 가상의 공간이 만들어집니다. 화면 아래쪽 안개구름을 따라가다 고개를 들면 우뚝 솟은 검은 바위가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338.2m 높이의 인왕산 주봉인 치마바위입니다. 그림에서 느껴지는 인왕산 규모는 인근에서 인왕산을 바라봤을 때의 느낌과 크게 다르지 않다. 웅장한 인왕산이 가까이 다가오는 느낌을 잘 살렸다.


또한 겸재는 비 온 뒤 안개가 피어오르는 인왕산의 인상적 순간을 포착하여 그 느낌을 잘 표현하였다. 겸재는 진한 먹을 묻힌 붓을 여러 차례 쓱쓱 그어 내려 치마바위를 표현했다. 검게 칠해 물기 머금은 상태로 표현함으로써 바위의 존재감을 드러내려고 했을 것이다. 높고 낮음이 반복된 치마바위 주변 산세 표현도 거침이 없다. 먹물을 묻힌 붓질을 덜 하여 바위가 솟아 보이도록 하고, 붓질을 더 하여 그늘진 골짜기를 표현했다. 군데군데 나무를 간략하게 그려 넣고 여기저기 점을 찍어 산의 표면을 더 풍부하게 했다. 물기 많은 붓을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거칠게 다루면서 화면에 공간과 깊이를 연출했다(이수경, 국립중앙박물관). 이러니 정선은 진경 산수화의 창시자이자 동시에 완성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법고창신의 역사적 사례로 꼽힌 인물들은 현대사회에서 개인의 능력과 잠재력을 향상시키는 효과적인 체계로 자리잡은 멘토링의 관점에서 몇 가지 교훈을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는 멘토는 자신의 성공 경험에 얽매이지 말라. 멘토가 처했던 환경과 멘티가 현재 처한 환경은 다를 수 있다. 한신이 배수진을 치고, 우후가 아궁이 숫자를 늘이고, 정선이 중국 모방 화풍에서 실경 화풍으로 바꾼 것처럼 멘토는 멘티가 처한 환경을 적절히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둘째는 멘티는 멘토에게 배우되 변용할 줄 알아야 한다. 멘티는 임진왜란의 신립이 되어서는 안 된다. 모방이나 과거 답습에서 벗어나 새로운 환경을 정의 내릴 줄 알아야 하고 그에 적절한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셋째는 멘티는 자신만의 능력 향상 방법을 개발해야 한다. 임모(臨摸)와 모사를 넘어 자신의 습관, 기질, 개성, 취향, 의사결정 방식 등을 조합한 자신만의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온고지신의 단계를 넘어 법고창신으로 옛것을 배우되 새롭게 변통할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멘토가 지향해야 할 행동의 본보기는 오디세우스의 친구 멘토르에서 찾을 수 있다. 멘토르는 멘티의 성장과 발전을 목표로 멘토링을 한 뒤 보상이나 자리에 연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박종채. (2018). 나의 아버지 박지원. 박희병 옮김. 파주: 돌베개.

오주석. (2015).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2. 서울: 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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