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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Mar 20. 2024

화초(花草)의 이불을 거둔 날

감기라도 걸릴까 봐 잠을 설쳤다

꽃샘추위의 기승이 유별나다. 3월 하순인데도 날씨를 종잡을 수가 없다. 꽃을 피우는 것을 시샘하는 애교 섞인 추위가 아니라 아예 봄이 오는 것을 거부하는 듯한 불편함을 느낄 정도다. 이 정도면 꽃을 시샘하거나 질투하는 수준이 아니라 겨울의 남아 있는 기운(세력)의 조직적인 저항으로 볼 수밖에 없을 지경이다. 동장군(冬將軍)이 매서운 추위(권력)를 휘둘러 대지의 생명들을 꽁꽁 얼게 만들었던 위력에 취해 아직도 저 세상인 줄 아나 보다. 기후변화에 따른 날씨의 변덕을 십분 이해한다고 해도 임명권자인 대자연의 섭리는 동장군의 임기를 종료했음에도 그 자리에 연연하는 모습이다. 모순이고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역모다. 겨울은 귀로 듣고 봄은 눈으로 본다고 했는데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은 느닷없는 거센 바람소리도 듣기 지겨울 정도다. 이제는 눈으로 봄의 진경(眞景) 산수화를 보고 싶다.


3월 하순 낮기온이 15도를 넘기면서 우리 집 정원도 제법 온기로 채워졌다. 반팔을 입어도 거뜬할 정도다. 겨우내 창문을 닫고 열기를 반복했던 온실도 열기로 후끈했다. 겨울 추위로부터 화초들을 보호하기 위해 덮어주었던 왕겨며 솔잎을 언제 거둬내야 할 때를 재고 있었는데 이때다 싶었다. 정원에 화초를 심고 두 해째 맞이하는 겨울이지만 속으로는 지난겨울에 지나치게 두꺼운 방한복을 씌워준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뾰족한 호미로 조심스럽게 솔잎과 왕겨를 거둬냈다. 겉에서는 죽은 듯이 보였던 화초들 가지에 새싹이 붙어 있었다. 연 노란빛을 띤 생명체였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부지런히 손을 놀리면서 마치 가뿐 호흡을 하며 숨이 멎을 것 같은 사람을 살리는 기분으로 숨구멍을 만들어주었다. 이맛으로 정원을 돌보는가 보다 싶다. 그 추웠던 겨울을 무사히 견뎌냈을까 걱정을 많이 했는데, 움튼 싹을 보는 마음은 내내 환희와 안도감, 그리고 반가움으로 가득했다. 봄의 정원에서는 그 어떤 것도 함부로 밟지 말라는 노련한 정원사들의 말이 맞는 것 같다. 


우리 집 정원의 화초들은 과잉보호를 받고 있을 정도다. 사실 화초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많으면 과잉보호를 할 필요가 없을 것이지만, 재작년 월동을 하는 화초와 월동을 하지 못하는 화초를 구분하지 못해 아끼는 화초들을 적잖이 얼려 죽이는 어리석음을 범한 터라 작년에는 유달리 월동에 신경을 많이 썼다. 그래서 아예 추위로부터 화초를 보호하기 위해 왕겨와 솔잎을 두껍게 덮어주었다. 자연산 밍크코트를 걸친 격이다. 얼마나 두껍게 덮어주었던지 무덤 형상의 봉분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봉분에서 거둬낸 왕겨와 솔잎만 해도 열 포대가 넘게 나왔다. 아마 조금만 더 늦었다면 어린 새싹들은 숨이 막혀 질식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하며 올 겨울에는 과잉보호을 삼가자고 다짐했다. 사람도 이불이 두꺼우면 자면서 자신도 모르게 걷어내 감기에 걸리지 않던가. 뭐든 적당한 것이 좋은 법이다. 화초들은 얼마나 답답했을까 싶다. 좀 더 일찍 밍크코트를 거둬주면 좋겠지만 어디 내 마음대로 되는가. 꽃샘추위가 제때 물러가지 않으니 말이다. 솔직히 정원에서 돌봄을 받는 화초들과 달리 들판의 화초들이 추위에 용감하게 맞서며 초록의 싹을 틔워내는 것을 생각하면, 화초의 생태를 제대로 알고 처방하는가에 대해서도 여전히 확신이 서지 않는다. 배우면서 시행착오를 바로잡을 수밖에 없다.


화초에서 두꺼운 이불을 거둬내는 날 하필이면 거센 바람이 불고 다음날 아침에는 영하권의 날씨를 보였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던가. 밤새 화초들이 얼마나 추웠을까 생각하며 잠을 설쳤다. 지금이라도 거둬들인 왕겨와 솔잎을 다시 덮어줄까도 생각했지만 참았다. 추운 밖에서 잠을 재워 감기나 들지 않는지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부모가 사랑하는 자식을 엄하게 다루어야 할 때가 있듯이, 이제는 어린 화초들도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 최고의 면역강화제와 영양제는 봄햇살과 봄기운일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 그린 <천지창조>가 있다. 하느님이 최초의 인간 아담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장면을 화폭에 담았다. 겨우내 화초에 덮어주었던 이불자리를 거둬내면서 정원사 역시 조물주를 대신하여 땅속의 생명들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천지창조'가 아니라 '정원창조'다. 심어진 곳에서 꽃을 피우는 평범하지만 위대한 섭리를 확인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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