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중에 '좌우지간'이라는 말이 있다. '자우지간' 또는 '자오지간'이라는 사투리로도 사용된다. 저자도 대화 중에 자주 사용하는 단어다. 대략 이런 상황이다.
A: 이 사람아. 왜 그런 일을 했어?
B: 좌우지간 나는 윗분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야. 어떤 결과가 나오든 난 잘못이 없어.
두 사람 이상이 대화 중에 앞 내용을 막론하고 뒤 내용을 말할 때 쓰여 앞뒤 문장을 이어 주는 말이다. 즉 '모양, 형편, 정도나 조건 따위가 어떻게 되어 있든지 간에’의 뜻으로 쓰인다. 화자가 청자에게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기 난처한 상황이나 입장에 놓였을 때 앞의 말과는 무관하게 말을 서둘러 끝내고자 할 때 자주 사용하는 말이기도 하다. 좌우지간과 유사한 단어는 아주 많다. 아무튼, 어쨌든, 여하간(如何間), 하여튼, 어쨌거나, 하여튼지 등 일상생활에 자주 사용하는 말이다. 그리고 좌우지간은 본래 좌우간(左右間)에서 비롯된 말로 좌우지간에서 지(之)는 아무 뜻이 없는 이음 말이다. 이 말은 '좌우지간'에 '말이야'를 붙여 '좌우지간에 말이야'로 말하면서 뜸을 들이면서 뭔가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할 것 같은 제스처를 취할 때가 많다.
왜 우좌지간이 아니라 좌우지간이라고 했을까? 그 이유를 조선시대 관리들의 벼슬 이름에서 찾기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 삼정승을 두었는데, 영의정은 국무총리, 좌의정과 우의정은 부총리에 해당된다. 같은 직급이지만 통례상 좌의정이 우의정보다 서열이 높았다. 또 삼정승을 보좌하는 좌찬성과 우찬성을 두었는데 여기서도 좌찬성이 우찬성보다 서열이 높았다. 언어의 유래를 신분계급사회의 질서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 누군가 한번 사용한 말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다 보면 관행으로 굳어지는 것 또한 언어의 속성이기도 하다. 미술에서 인상주의 화파가 있는데, 한 비평가가 조롱과 야유의 뜻으로 "대강 그린 그림이 참, 인상적이네"라고 말한 것에서 인상주의가 유래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니 말이다.
좌우지간에서 좌우(左右)는 왼쪽과 오른쪽의 방향을 의미하는 것보다는 정도나 조건을 뜻하지만 단어 그 자체를 보면 언뜻 좌측 혹은 우측 방향을 가리키는 뉘앙스를 풍긴다. 그래서인지 선거철이 되면 '좌우지간'이라는 단어가 유독 눈에 띈다. 언뜻 보기에 좌파 또는 우파를 연상시키는 말이기 때문일 것이다. 선거를 치르기 두어 달 전부터 걸려오는 전화를 받기가 부담스럽다. 하루에 두서너번은 여론조사 다 뭐다 해서 선거와 관련된 전화에 짜증이 날 정도다. 발신자가 확인되지 않은 전화는 받질 않는다. 좌우지간 받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주요 정당의 패널들이 텔레비전에서 토론을 벌이는 중에도 좌우지간이라는 단어가 자주 들린다. 쌍방의 의견이 극단으로 치닫고 감정이 격화됐을 때 대화를 서둘러 마무리할 만한 적당한 말이나 구실을 찾지 못할 때 '좌우지간'을 슬며시 끼어넣고 대화를 끝낼 속셈이다. 대화에서 좌우지간은 약방의 감초와 같은 효능이 있다.
좌우지간은 평형을 필요로 하는 생물과 무생물 모두에게도 좌우지간이 필요한 법이다. 고인이 되신 이어령 선생은 좌우지간을 흥미롭게 풀이한다. 그는 좌우지간을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공통언어'로 간주한다. "인간은 물론이고 크거나 작거나 생명이건 무생물이건, 자연물이든 기계든 이 세상 모든 것엔 조타수처럼 키를 움직여 평형을 유지하려는 '좌우지간'의 공통언어가 있다." 그러면서 이어령 선생은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좌우지간에 말이야'는 좌와 우 사이에서 뭔가를 찾자는 거지. 너와 나의 입장 사이에 싸움을 푸는 무엇인가 있다는 생각이야. (...) 우리는 극단적 이항대립에서 벗어나 제3항의 ‘거시기 뭐’를 찾으려고 했어. 말이나 논리로는 꼭 찍어낼 수 없는 세상이 분명 존재한다. 그것을 찾는 것이 창조적 삶이다"라고 말했다. 좌우지간으로 이쪽과 저쪽 사이, 즉 이 사람의 주장과 저 사람의 주장 사이에서 절충점을 찾아낼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버는 것이다. 시대의 지성이 보여준 혜안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사회는 언제부턴가 편을 가르는 진영으로 쪼개지고 말았다. 진영이란 글자 그대로 전쟁을 하면서 아군과 적군이 대결하기 위해 군대를 배치하는 모양이다. 보수 혹은 진보로 진영을 짠 사회 구성원은 서로 대면하길 불편해하고 심지어는 밥도 같이 먹지 않는다고 한다. 다양성과 다원성을 중시하는 사회에서는 중립적인 사고와 언어가 설자리가 많아야 하는데 점점 좁아지고 있다. 서로 다른 신념체계들을 가진 사람들이 살기 어려운 형편이다. 좌우지간의 평형을 이루려는 치열한 노력을 해도 부족한 마당에 내편, 네 편을 가르면서 진영 대결로 치닫고 있는 형국이 안타깝다. 실제 통계청이 발표한 2023년 한국의 사회지표 자료에 따르면, 우리 사회에서 가장 갈등이 심하다고 인식되는 주제는 보수와 진보인 것으로 나타났다. 갈등 인식률은 82.9%를 보였다(삶에 만족하는 사람의 비율은 74.1%로, 1년 전보다 1.3% 감소했다). 이념갈등이 가장 심하다는 이야기다. 갈등이 심화되고 그 갈등을 풀지 못한 채 방치하거나 증폭하게 되면 사회는 혼란하고 우리의 삶의 수준은 퇴보할 수밖에 없다. 고(高) 갈등은 곧 고(高) 비용 사회가 되고 만다. 갈등해결은 국방이나 수출보다 훨씬 더 중요한 영역이다.
'연잎현상'이 있다. 연잎이 웅덩이의 반쯤 덮었던 시점에서 바로 그 다음날 웅덩이 전체를 덮는다는 비유다. 우리 사회의 갈등 수준을 보면 연잎이 수십 개의 웅덩이를 덮고도 남을 지경이다. 갈등의 임계점이 어느 선을 넘어버리면 백약이 무효가 될 수 있을 터인데 심히 우려된다. 갈등수위를 높이는 건 정치, 그것도 선거다. 누가 더 악마인가, 누가 더 친일인가, 누가 더 종북인가의 프레임을 씌워 상대방을 걸고넘어진다. 선거는 시민의 혈세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방을 악마화, 혐오화하면서 증오와 비방의 언어로 꾸며진 아수라장의 무대가 되고 만다. 젊은 세대가 선거 행태를 보면서 "넷플렉스 영화를 보는 것 같다"라는 말을 괜히 하는가 싶을 정도다. 오로지 당선만 될 수 있다면 '너 죽고 나 살자'라거나 '아니면 그만 이고'라는 식의 저급하고 비열한 행태를 반복한다. 이런 무대에서 대화, 타협, 상생, 공존, 공동체와 같은 이야기를 꺼낼 수 있겠는가. 미래지향적인 언어나 중립적인 언어는 찾아보기 어렵다.
자전거를 배울 때 좌우로 심하게 움직이는 앞바퀴의 핸들을 좌우지간으로 평형을 유지하지 않으면 넘어지고 만다. 바다에서 서핑(파도타기)을 하는 서퍼 역시 좌우지간으로 평형을 잡아야 한다. 우리 사회가 진영의 대치를 풀고 극단적 대립에서 벗어나 '좌우지간에 말이야'에서 의미하는 창의적 대안을 모색하는 문화를 만들면 좋겠다. 좌로든 우로든 국민을 극단으로 내몰지 않았으면 한다. '좌우지간에 말이야(여)'가 작동하면 좋겠다.
김영란. (2024). 판결 너머 자유. 파주: 창비.
변동빈. (2023). 장성군민신문. 좌우지간(左右之間). 8월 28일.
이어령. (2008). 디지로그. 서울: 생각의 나무.
정형모. (2015). 중앙선데이. 좌우지간에 마음 놓고 생각해 봐. 1월 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