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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Mar 28. 2024

동백꽃과 동박새

공생이란 이런 것

동백((冬柏). 동백은 겨울에도 늘푸른 진녹색 잎을 간직하고 있다. 이파리는 단단하고 기름을 칠한 듯 반지르하다. 동백의 붉은 꽃이 눈 속에서 자태를 드러내면 발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다. 동백은 대지의 생명들이 혹한에 떨며 동토(凍土) 아래 숨죽이고 있을 때 보란 듯이 꽃망울을 터트린다. 시인 용혜원의 <선운사 동백꽃>의 한 구절이다. "가슴 저린 한이 얼마나 크면/ 이 환장하도록 화창한 봄날에/ 피를 머금은 듯 피를 토한 듯이/ 보기에도 섬뜩하게 검붉게 검붉게 피어나고 있는가" 시인의 눈에는 동백의 붉은 꽃이 마치 사람이 입안에 머금고 있거나 토한 피와 같이 검붉게 보였다. 검붉은 피는 가슴 깊이 한 맺힌 사람의 피다. 생태적으로 동백꽃이 붉은색인 것에는 이유가 있다. 새들도 색깔을 알아채는 방식이 사람과 비슷하여 파장이 긴 빨간색에 더 민감하다고 한다. 동백꽃은 새의 눈에 잘 띄도록 진녹색 잎 사이로 빨간색 꽃을 피운다. 


겨울은 동백이 꽃을 개화하는 데 너무 가혹한 환경이다. 힘들게 핀 꽃 향기를 쫓아 찾는 나비와 벌 같은 곤충도 없는 추운 계절이 아니던가. 아무리 강인한 동백이라도 꽃가루받이(수분) 역할을 해주는 매개체가 없으면 종족 보존과 번식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동백이 엄동설한에 꽃망울을 터트리는 데는 믿는 구석이 있다. 자연의 섭리는 동백꽃의 붉은 자태와 동박새를 등장시킨다. '동'씨 성을 가진 한 가족같다(강원도에서는 머릿기름을 짤 수 있는 '생강나무'를 동백나무(동박나무)라고 하는데 동박새를 동백새로 불러도 손색이 없을 듯 하다). 동박새는 추운 겨울을 나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얻기 위해 동백꽃의 꿀을 빨아먹고 동백나무의 수분 매개자가 되어 준다. 서로에게 가장 필요한 역할을 한다. 공생 관계의 본보기다. 시인 이산하는 <선운사 동백꽃>에서 동백꽃과 동박새의 관계를 이렇게 읊고 있다.  


나비도 없고 벌도 없고 동박새뿐

그 동박새에게 마지막 씨를 남기고
흰 눈 위에 떨어진 한 치 흐트러짐 없이
통째로 툭 떨어진 선운사 붉은 동백꽃

떨어지지 않은 꽃보다 더 붉구나



동백꽃과 동박새는 워낙 특별한 관계를 맺다 보니 전해져 오는 전설도 꽤 있다. 하나만 소개해보자. "옛날 어느 나라에 포악한 왕이 살고 있었다. 이 왕에게는 자리를 몰려줄 후손이 없었으므로 자신이 죽으면 동생의 두 아들이 왕위를 물려받게 되어 있었다. 욕심 많은 왕은 그것이 싫어 동생의 두 아들을 죽일 궁리를 하였고 동생은 이를 알고 자신의 아들을 멀리 보내고 대신 아들을 닮은 두 소년을 데려다 놓았다. 그러나 이것마저 눈치챈 왕은 멀리 보낸 동생의 아들 둘을 잡아다가 왕자가 아니니 동생에게 직접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차마 자신의 아들을 죽이지 못한 동생은 스스로 자결을 하여 붉은 피를 흘리며 죽어 갔고 두 아들은 새로 변하여 날아갔다고 한다. 동생은 죽어서 동백나무로 변했으며 이 나무가 크게 자라자 날아갔던 두 마리의 새가 다시 내려와 둥지를 틀고 살기 시작하였는데 이 새가 바로 동박새라는 전설이다"(위무량, 2007 재인용).    

  

영화나 드라마에서 왕좌의 게임을 보는 듯은 슬픈 전설이다. 권력자가 권력 연장을 위한 탐욕을 부릴 때는 주변의 그것도 형제와 가족조차도 희생양이 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이 전설을 듣게 되면 왜, 동백꽃이 검붉은 피를 닮았는지 동박새가 동백꽃을 찾게 되는가를 이해하게 된다. 동백꽃과 동박새는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부성애를 간직하고 있다. 동박새가 동백꽃 속으로 부리를 박고 꿀을 채취하는 모습을 보면 어린 아들이 아버지의 가슴팍에 안겨 어릿광을 부리는 것 같은 연상을 하게 된다. 이산의 슬픔과 휴머니즘을 간직한 동백꽃과 동박새는 애잔한 울림다.


동백꽃이 화려한 꽃을 피우는 이유는 인간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식물 세계에서 작동하는 종족 보존과 번식의 메커니즘 때문이다. 동백은 동박새의 환심을 사기 위해 검붉은 꽃을 피운다. 식물의 세계를 관찰하면 제 혼자 힘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 서로 돕고 나누며 '공생'하며 산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다'라는 말이 있다. 영어로는 'A friend in need is a friend indeed'다. 동백꽃과 동박새의 관계는 서로가 가장 어려울 때 필요로 하는 친구라는 사례를 알려준다. 인간관계에서도 어려운 환경에서 형성된 우정은 더 오래간다.


눈 속에 핀 동백꽃의 붉은 빛깔은 동박색을 불러들이는 자연의 섭리이지만, 매서운 추위에도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 용기의 표상이다. 또한 동백꽃과 동박새는 서로 협력하고 협업하면 어떤 역경과 고난도 이겨낼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특별히 동백꽃의 마지막 산화(散花) 장면, 즉 꽃봉오리가 통째로 톡 하고 떨어지는 모습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깊은 여운을 남긴다. 어떻게 핀 생명인데 질땐 모질도록 단호하다(그래서인지 노인의 방에 동백꽃을 들여놓지 말라고 한다. 톡하고 떨어지는 모습이 죽음을 연상한단다. 동백꽃을 좋아하는 노인이라면 꽃잎이 한 장씩 떨어지는 애기동백꽃을 들여놓는 것이 센스일 것이다). 


문정희 시인은 <동백꽃>에서 동백꽃이 떨어지는 순간을 시각적으로 리얼하게 노래했다. 동백꽃을 위한 절명시다. "가장 눈부신 순간에/ 스스로 목을 꺾는/ 동백꽃을 보라// 지상의 어떤 꽃도/ 그의 아름다움 속에다/ 저토록 분명한 순간의 소멸을/ 함께 꽃 피우지는 않았다//" 동백꽃처럼 개화에서 소멸까지 시종일관 강인함과 단호함을 보여준 꽃도 드물 것이다. 장렬하고 극적인 마감이다. 동백꽃의 일대기는 우리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에 대한 강렬한 여운을 남긴다. 



박상진. 우리 나무의 세계 1, 2. 파주: 김영사.

위무량. (2007). 숲 이야기. 서울: 일진출판사.

이소영. (2018). 서울신문. 동백나무와 동박새의 공생. 1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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