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친은 소천하시기 5년 전 선산에 자신과 모친이 묻히게 될 봉분을 조성해 두셨다. 위치는 아버지의 아버지와 어머니, 즉 할아버지, 할머니 봉분 바로 옆이었다. 아버지는 고인을 안치하기 전에 임시로 만든 가묘(假墓) 또는 허묘(虛墓)를 조성하셨다. 죽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죽음을 대비해 자신과 모친의 가묘를 직접 준비하셨다. 자식이라도 구순을 넘긴 부친이 자신의 봉분을 만들 때의 그 마음을 헤아릴 수는 없을 것이다. 선산에 올라 가묘를 보면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언젠가 부딪힐 부모님과의 이별을 미리 연습하는 장소가 되었으며, 그때를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죽음 앞에서 당당하게 미리 대비하여 자신과 모친의 장례에 따른 자식들의 고민을 해소해 주신 부친의 결단 앞에 존경하는 마음이 더 커졌다. 부친은 가묘 앞에 놓인 상석(床石)에 '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라고 써넣으셨다. 부친은 스스로를 '학생'이라는 단어로 자신의 일생의 의미를 담았다. 조부모님의 제사를 모실 때 지방(紙榜)에서 보았던 '현고학생부군신위'를 부친의 가묘에서 보았을 때는 그 글씨가 그렇게 크게 다가왔다.
한자에 익숙하지 않은 저자지만, 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 중에 '학생(學生)'이란 단어에 눈이 멈췄고 동네 어른들에게 그 의미를 물었던 기억이 난다. 동네에서 지식인으로 통했던 어른들도 확신을 가지고 대답을 하지 못했다. 대강 이런 뜻이다. "배우는 학생으로 평생을 살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신령이시여 나타나서 자리에 임하소서." 평범한 삶을 살다 돌아가신 분들에게 붙이는 일종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낸다고 한다. 더 솔직하게 해석한다면, 조선시대와 같은 신분계급사회에서는 "관직을 하지 못하고 품계도 없지만 평생 배우다 돌아가셨다'라는 내용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단어를 하나씩 풀이하면 현(顯)은 나타나다, 고(考)는 돌아가 아버지를 뜻하는데 생전에는 父라 하고 사후에는 考라 한다. 학생(學生)은 생전에 관직이 있으면 관직을 쓰고, 관직이 없으면 학생을 쓴다. 부군(府君)은 돌아가신 조상을 높이어 부르는 말이다(같은 말이라도 한자어에 따라 뜻이 다르다. 부군(父君)은 아버지의 높임말이고, 부군(夫君)은 남의 남편(男便)의 높임말이다). 신(神)은 신령을, 위(位)는 자리를 말한다. 글자 하나하나마다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관직은 오늘날의 공무원에 해당한다. 품계는 요즈음의 이사관, 서기관, 사무관, 주사, 서기 등 직위에 해당할 것이다. 예를 들어, 공무원으로 서기관을 했으면 '현고서기관서울특별시 OO과장부군신위'로 적는데 ‘학생’이 빠지고 ‘서기관’이 들어간다. 지금은 관직을 써넣는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묘비에는 '학생'이라는 단어를 써넣는 것 같다. 왜, 묘비에 학생이란 단어를 사용하게 되었는가? 조선시대에 학생은 두 부류가 있었다. 하나는 성균관, 사학, 향교에 소속된 유생과 전의감(典醫監) 등에 소속된 생도로서 공부하는 사람을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품계가 없는 사람(無品者)을 가리켰다. 유학을 국시로 정했던 조선에서 학생이란 유생, 생원, 진사, 생도 등 각 학교에 소속되어 있는 유생(儒生), 즉 관직에 아직 오르지 않았거나 과거를 준비하며 학교에 재학 중인 자를 통칭하였다. 이 학생들 중에는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자가 있었는데 이들을 어떻게 칭할 것인가? 무관(無官)으로 죽은 자는 학생이라 칭하지 않으면 다른 칭호가 없으니, 부득이 학생으로 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17세기 이후 조선에서는 '살아서는 유학, 죽어서는 학생'으로 칭하는 관습이 유행했을 정도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유학의 본분을 다하는 것이 삶의 이유고 목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다 보니 조선 후기에 서인 신분에까지 가례가 깊숙이 파급되고 실천되면서 무관자인 일반 서민들도 죽으면 위패에 ‘학생부군신위(學生府君神位)’라 쓰는 관습으로 확대되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아버지도 한국인에게 600백 년 넘게 계승되면서 보편적인 정신문화로 자리 잡은 묘비명의 관습, 즉 '학생'으로 표기해야 했을 것이다.
묘비명에 사용된 학생이란 유래를 알게 되면, 조선 시대에 유생들은 유학을 공부하여 관직에 오르고 품계를 받는 것을 일생의 목표로 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엄격한 신분계급사회에서는 묘비에도 상하서열을 매겼다. 한번 금수저이면 영원히 금수저로 살았고, 흙수저로 태어나면 죽어서도 흙수저였다. 숨이 막힐 것 같은 사회질서체제였다. 사람으로 태어나면 누구나 예외 없이 죽는 것이 우주의 질서요 자연의 이치인데 죽어서까지 서열을 나누는 상석의 묘비명이 달갑지만은 않다. 그러나 저자는 묘비명의 '학생'이라는 말에 다른 의미를 부여해보고 싶다.
유교를 국시로 하는 국가에서 망자의 묘비명에 적어 넣은 '학생'이라는 단어는 유교적 사고체계가 나은 사회적 신분과 위계를 상징한다는 점에서는 폐쇄적 사회의 단면을 나타내고 있지만, 평생학습사회와 관련지어서는 꽤 의미 있는 단어로 수용할 만하다. 우리 조상들은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배우는 학생으로 자신을 규정했다. 당시 개인이 평생 배울 내용은 유교가 이상으로 추구하는 윤리 덕목이 될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관직에 오르고 품계도 받았지만 유교적 사고에서 벗어난 선조들도 많았다. 우리 선조들은 생전에 자신의 삶을 자평하는 자찬묘비명을 지었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자찬묘비명(自撰墓誌銘)의 일부다. “너는 말하지, 나는 아노라 사서와 육경을. 하지만 행한 바를 살펴보면 어찌 부끄럽지 않으랴. 너는 명예를 바라겠지만 찬양할 것 하나 없다.” 유학의 요체에 해당하는 사서삼경(논어, 맹자, 대학, 중용, 시경, 서경, 역경)을 넘어 육경(시경, 서경, 예기, 악기, 역경, 춘추)까지 공부하여 해박한 지식을 가졌지만, 실천하는 지식인으로서는 부끄럽다는 자기 고백이다. 자신의 삶을 반성과 성찰로 마무리지었다. 저자는 자찬묘비명 중에 박필주(1665~1748)의 묘비명을 좋아한다. "험흔과 상난, 질병과 슬픔, 누가 알아주랴. 오직 귀신이 있을 뿐. 이처럼 살다가 이처럼 죽어, 태허(太虛, '하늘’을 달리 이르는 말)로 돌아가니 무어 걸릴 것 있으랴." 심플하면서 자연의 섭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좋은 것이다.
현대사회를 '평생학습사회'라고 한다. 급격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놓여 있는 현대사회에서 개인은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배우지 않으면 잘 살 수 없다. 심하게 말하면, 요람에서 무덤까지 배워야 한다. '배우고 때때로 이를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마음으로 공부해야 한다. 어떤 이는 학교에서의 공부도 지긋지긋하였는데 평생 동안 공부하란 말이냐고 우스개 소리를 하지만 세상이 평생 배움을 요구하는데 어쩔 도리가 없는 것 같다. 평생학습사회에서 평생을 떼고 '학습사회'라고 해도 무방할 듯싶다. 평생학습사회의 든든한 사상적 배경이 되어준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인간과 학습의 관계를 이렇게 규정했다. "인간은 교육의 산물이며, 교육을 필요로 하는 유일한 동물이다." 곧 인간이 인간답게, 인간다움을 구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 교육은 반드시 학교교육 같은 형식교육일 필요는 없다. 밥상머리에서 이루어지는 무형식교육도 중요하다. 인간은 학습동물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인간이 학습동물이다'라는 명제는 금세 확인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수백 개에 달하는 문해학교가 산재하고 있다. 지역의 문해학교를 가보라. 학교에서 배움의 기회를 놓친 성인학습자들이 주경야독으로 배움의 꿈을 좇고 있다. 그들의 사연을 들어보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 전쟁으로 배움의 때를 놓친 사람,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교를 아예 다니지 못했거나 중도에 포기한 사람, 남존여비 사상의 영향으로 여성이라는 이유로 부모가 가르치지 않았던 사람 등 다양한 이유로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했던 만학도들이 공부하고 있다. 학생들 대다수가 여성이라는 점에서 전통사회에서 남녀차별이 얼마나 극심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대구의 어떤 문해학교에서 다니는 할머니는 얼마나 학교에 다니고 싶었던지 방에 교복을 입고 가방을 든 인형을 세워놓았다고 한다. 학교에 다니는 꿈을 이룬 할머니는 지금도 서있는 인형을 보며 포기하지 않고 배움의 길을 걷는 자신이 대견스럽게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고 말씀하신다.
유교적 철학과 신분 질서의 산물인 '학생'은 근현대를 거치면서 한국인 특유의 교육열로 승화된다( 물론 조선시대 학생이 배우는 지식과 현대 한국의 학생이 배우는 지식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다). 그리고 그 교육열은 부존자원이나 물적자원이 턱 없이 부족했던 한국이 정치적으로 민주주의를 쟁취하고 경제적으로도 중견 국가로 도약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를 침략했던 프랑스 병사가 민가를 약탈하던 중에 안방 서가에 꽂혀있는 책들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는 대목이 나온다. 준비된 사람에게 찾아온 우연은 필연이다. 오늘날 한국이 세계가 부러워하는 나라가 된 데에는 전쟁, 기아, 식민통치 등 수많은 내우외환을 겪는 과정에서도 살아서나 죽어서나 오직 '학생'으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저러나 저자도 자찬묘비명을 준비해야 할 것 같다. 자신의 봉분을 준비하면서 몇 날 며칠 밤잠을 설쳤을 아버지가 더 존경스럽고 더 그립다.
심경호. (2022). 내면기행. 서울: 민음사.
H. 쥐베르. (2010). 프랑스 군인 쥐베르가 기록한 병인양요. 유소연 옮김. 파주: 살림.
최승희. (1989). 조선후기(朝鮮後期) ‘유학(幼學)’·‘학생(學生)’의 신분사적(身分史的) 의미(意味)」. 『국사관논총』1, 국사편찬위원회.
<학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