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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Sep 24. 2020

우정은 함께 가꿔 나가는 것이다

조선인 홍대용과 중국인 엄성의 이야기

우리나라는 18세기에 이르러서야 실사구시의 실용적인 학문(실학)을 추구한다. 물론 이전에도 전통적인 성리학을 진보적인 차원에서 해석하여 학문이 나라를 다스리는 데 도움을 주고 백성의 삶에 유익함을 주고자 했지만 대세를 이루지는 못했다. 실학을 주도적으로 추진한 사람들을 북학파(北學派)라고 부른다. 북학(北學)의 목적은 청나라의 문명과 문화를 수용하여 나라를 부강케 하고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데 있었다. 이 북학의 비조(鼻祖)가 담헌 홍대용(1731-1783)이다. 실학파나 북학파를 이야기하면 연암 박지원이나 초정 박제가가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 산파역을 담당한 인물은 담헌이다.


담헌은 전라도 화순 동복의 물염정(勿染亭)을 직접 찾아가 재야 과학자 나경적에게 과학 기술에 관한 지식을 전수받았다. 담헌은 장영실에 이은 조선 최고의 과학자이라고 할 수 있다. 담헌은 1766년 사신단의 일원으로 청나라 연경(북경)에 갔다. 연경에 도착하여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지금의 서울 인사동처럼 각종 고서적과 골동품이 즐비한 유리창(琉璃廠)이었다. 이때 북경의 서점가는 세계 최대의 지적 자원이 모여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그곳에서 담헌은 천애지기(天涯知己)가 되는 청나라 사람 엄성(嚴誠 1732∼1767)을 만나게 된다. 천애지기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서로를 알아주는 각별한 친구를 말한다. 엄성은 항주 사람으로 연경에 과거 시험을 보러 왔다가 담헌과 만나 의기투합하고 의형제를 맺고 한·중 문인 교류의 첫 물꼬를 텄다.


 두 사람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서는 편지로 우정을 나누었다. 당시 서울과 항주는 8천 리 거리다. 헤어진 지 2년 만에 담헌은 엄성이 학질에 걸려 35세의 짧은 생애를 마쳤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다음은 엄성이 담헌에게 보낸 편지 글이다.


“병이 위중하던 저녁, 제가 침상 곁에 앉아 있는데, (엄성이) 그대의 편지를 꺼내더니 나더러 읽어달라고 했습니다. 읽기를 마치자 눈물을 떨궜습니다. 이불속에서 그대가 선물한 먹을 찾아 그 고향(古香)을 아껴 취해 향기를 맡고는 이불속에 간직해두었습니다.”


엄성은 친구 담헌이 선물한 먹과 편지를 가슴 위에 얹은 채 세상을 떠났다. 천애지기를 잃은 담헌은 엄성을 위한 조문을 지어 인편에 붙였는데 마침 조문이 도착한 날이 엄성의 2주기라고 하니 그 타이밍이 놀랍다. 이는 참석한 조문객들의 심금을 울렸고 두 사람의 우정은 하늘이 맺어준 것이라고 부러워했다. 엄성의 아들은 담헌을 백부(伯父)라고 써서 아버지의 ‘철교유집(鐵橋遺集)’을 부쳤는데, 무려 9년 만에 담헌에게 전해졌다. 유집 중에는 엄성이 손수 그린 작은 영정이 있었다. 담헌도 향년 53세로 임종을 하게 되고, 절친이었던 박지원은 이 소식을 항주의 엄성 가족에게 알렸다. 국경과 인종을 초월한 아름다운 우정이 아닐 수 없다.


코로나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면서 전례 없이 비대면(untact)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지금처럼 인터넷도 SNS도 없던 시절 홍대용과 엄성이 시공간을 뛰어넘어 서울과 항주 간에 오간 아름다운 우정을 생각하면서 마음의 거리를 줄이려는 노력을 해보면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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