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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Oct 12. 2020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

음악을 통한 조국애

박웅현은 광고 카피라이터이면서 베스트셀러 작가다. 그의 '여덟 단어', '책은 도끼다'는 많은 사람들의 필독서가 될 정도다. 카피라이터가 쓴 글을 읽다 보면 유독 밑줄을 그으면서 곱씹어볼 행간이 많다. 그가 체코를 여행하면서 하멜 국제공항에 착륙할 때 기내에서 들려주던 음악이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이었다. 프라하에서 들었던 스메타나의 교양시곡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강렬했단다. 


이 계기가 되어 스메타나(Bedřich Smetana 1824-1884)의 '나의 조국(My Fatherland)'을 즐겨 듣는다. 웅장하면서도 에너지를 샘솟게 하는 선율이다. 나의 조국은 6부(비세흐라트, 블타바, 샤르카, 보헤미아의 목장과 숲, 타보르, 블라니크)로 구성된다. 체코의 국토와 역사, 그리고 전설을 주제로 한 교향시(symphonic poem)다. 음악으로 체코의 정체성과 조국에 대한 자부심을 표현했다. 특히 2부 블타바(흔히 독일어로 '몰다우(Die Moldau)'로 알려짐)는 강렬한 리듬에 마치 여름 홍수철 댐을 방류했을 때의 강줄기를 연상시키는 장엄미를 연출한다. 가슴이 울컥해지고 감정이 몰입된다. 체코의 블타바는 우리나라의 한강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체코 역사의 산증인이고 동맥이다.


스메타나가 활동하던 젊은 시절 그의 조국 체코는 오랫동안 오스트리아의 지배(1620년 합병)를 받고 있었다. 이 음악가는 민족 의식에 눈을 떴다. 혁명에 직접 뛰어들어 민족적인 자부심을 고양하는 음악을 작곡하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조국이 압제와 착취에서 벗어나 홀로 서는 데는 유무형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고 음악으로 힘을 보탰다. 국민 의용군 행진곡이 대표적이다. 


스메타나는 음악학교를 세워 음악 인재를 양성하고 싶은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자신도 신동이란 말을 들으면서 음악가로 성장했지만, 재능 있는 후배들은 좀 더 체계적인 음악 교육을 받았으면 하는 열망해서 였다. 본래 식민 제국주의 국가는 피지배 국가의 국민들에게 인문 교육을 금지하는 통치술을 가지고 있다. 인문학이 인간의 비판적 사고 능력을 키우고 감수성을 풍부하게 하기 때문이다. 내면에 잠자고 있는 의식이 잠을 깨면 독립 운동에 뛰어든다는 우려에서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 역시 한국 젊은이들에게는 인문학교보다는 실업학교에 다니게 했다. 스메타나는 프라하에도 음악학교를 세웠지만 박해를 피해 스웨덴에 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당시 유럽에는 리스트(1811-1886)와 쇼팽(1810-1849)이란 걸출한 음악가가 용호상박의 재능을 펼치던 때였다. 스메타나는 리스트의 음악 세계를 존경했다. 그는 프라하에 순회공연차 방문하는 리스트를 만나는 행운을 누린다. 리스트는 음악에서도 대가였지만, 국적이 다른 스메타나의 젊은 열정을 높이 평가하고 힘닿는 데까지 도움을 주었다. 스메타나는 리스트의 도움으로 자신이 작곡한 곡을 출판하기도 하고 음악학교를 세운다.   


스메타나는 리스트가 구축한 인적 네트워크의 도움에 그치지 않고 리스트가 창시한 교향시에 매료된다. 현재의 틀을 벗어나 새로운 틀을 만드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법고창신하기란 어려운 법이다. 스메타나는 교향곡(일반적으로 4악장) 보다 자유롭고 경쾌한 교향시(1악장의 관현악곡)를 창시한 리스트 학파의 일원이 된다. 그는 타국의 지배를 받는 조국이 해방되는 희망찬 미래를 6부작 교향시를 통해 작곡했다. 만국 공통어 음악의 선율로 만들어낸 조국 사랑이다.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은 1946년 이후 매년 개최되는 '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축제의 오프닝 곡이기도 하다. 체코인의 최고의 애창곡이다. 일부에서 애국가 작곡가 안익태 선생의 친일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애국가의 정통성이 도전받는 시점에 스메타나의 음악을 통한 조국애가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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