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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Oct 18. 2020

인간의 근원적 질문,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빅터 프랭클(V. E. Frankl 1905~1997)의 로고테라피

프랭클 박사는 오스트리아 빈 태생의 유대계 의사였다. 2차 세계 대전 중 나치에 의해 무려 네 군데의 강제수용소를 옮겨 다녔다. 매일 매 시간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놓여 있는 수용소에서 기적적으로 살아 난 그는 인간의 실존적 분석, 즉 로고테라피(Logotherapy)를 창안해냈다. 로고테라피는 정신치료법의 제3학파로 부른다. 제1학파는 프로이트, 제2학파는 아들러. 로고테라피의 포인트는 '산다는 것은 곧 시련을 감내하는 것이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시련 속에서도 어떤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로고테라피는 극한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프랭클 박사가 생생한 체험을 통해 완성한 이론이다. "왜 살아야 하는 가를 아는 사람은 어떤 시련도 견뎌낼 수 있다"라는 니체의 말과 상통한다. 삶의 의미를 상실한 순간 인간은 실존할 수 없다. 


수용소의 포로는 언제든 가스실로 보내 질 수 있는 일시적 존재(provisional existence)다. 나치에 의해 노동자로서 이용의 가치가 없거나 떨어졌다는 조짐이 보이는 순간 그의 삶은 종말을 맞게 된다. 프랭클 박사의 관찰에 따르면 미래에 대한 기대와 믿음의 상실은 삶을 자포자기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한 수감자는 꿈속에서 자신이 예언자로부터 포로 생활에서 풀려날 날을 약속받았다. 철석같이 믿었던 그날에도 풀려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다음날 그는 숨을 거두었다. 직접적인 원인은 발진티푸스였다. 그의 근거 없는 낙관론이 신체의 면역체계를 뚝 떨어뜨린 것이다. 


이는 '스톡데일 패러독스(Stockdale Paradox)'와 비슷하지만 결이 다르다. 제임스 스톡데일은 베트남 포로 수용소에서 8년을 보냈다. 스톡데일은 포로 수용소에서 일찍 죽는 사람은 비관론자가 아니라 근거 없는 낙관론자라고 말한다. 낙관론자들은 자신이 믿는 날(예컨대 '성탄절')에 석방이 안되면 좌절한다. 곧 풀려날 것이라는 섣부른 희망을 품다 좌절을 반복하다 죽어갔다. 비관론자들은 석방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보고 하루하루 수용소 생활을 잘 견뎌냈다. 중요한 것은 막연한 낙관을 버리고 현실을 냉정하게 판단하는 것이다. 어떤 전제를 두느냐가 중요하다. 프랭클 박사는 살아남기 위해서는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실을 뛰어넘는 낙관주의다. 반면 스톡데일 패러독스는 막연한 미래의 기대와 낙관이 장기간의 포로 생활에 방해가 될 수 있다고 한다. 냉혹한 현실주의다. 


강제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생존자들은 왜 살아야 하는가 하는 삶의 의미를 알고 있다. 삶에 대한 의지가 있기 때문에 어떤 시련과 고통도 이겨낼 수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자신이 삶 속에서 이루어야 할 목적이나 목표 그리고 의미를 발견해내지 못한 사람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프랭클 박사의 로고테라피 이론의 핵심은 다음 문장으로 압축된다. "우리(내)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나)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를 찾아내는 것이다. 우리가 삶에게 그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그 질문에 답을 할 필요가 있다." 결국 인생이란 삶으로부터 받은 질문에 대한 올바른 답을 찾는 여정이고 그 여정의 인솔자이며 책임자는 그 자신이다. 자신의 삶은 자신이 책임지고 지켜내야 한다. 


프랭클이 주창한 실존 분석의 출발은 삶에 대한 질문의 주체와 대상을 바꾸는데서 시작한다. 내가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삶이 질문을 던지도록 하는 것이다. 유의할 점은 추상적인 질문을 하는 것은 금기다. 우리는 주객이 전도된 질문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삶의 의미가 없거나 부재할 가능성이 높다. "내 인생은 왜 이렇게 꼬이지?" "왜 나에게만 이런 문제가 생겨?" 자신이 자신의 삶에 던지는 전형적인 질문이다. 삶에 대해 누가 질문할 것인가? 질문자를 바꿔보자. "이번 일로 나의 삶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의 삶을 가치 있고 보람 있게 하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삶의 의미는 사람마다 각각 다를 수 있다. 찾아낸 해법도 각양각색일 것이다. 질문을 바꾸면 각자의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진다. 지하에 갇혀 있던 어두컴컴한 삶이 지상의 밝은 햇살을 받고 있는 듯하다. 


프랭클 박사에 따르면 인간이란 존재는 실존 안에 숨겨져 있는 logos(그리스어 '의미')를 스스로 찾고자 하는 원초적 동력을 가지고 있다. 이 동력은 곧 '인간의 존재 의미를 찾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다. 삶의 의미를 어떻게 찾을 것인가? 프랭클 박사는 세 가지 방식을 제시한다. 첫째,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둘째,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대표적으로 '사랑')으로써, 셋째,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첫째와 둘째는 쉽게 이해된다. 셋째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관련된다. 인간의 자유는 어떤 조건을 피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 그가 어떤 조건에 처해 있든 그것에 대해 자신의 태도를 결정할 수 있는 자유다. 결국 인간에게 있어 진정한 의미의 자유란 어떤 일에 대해 방임이나 회피할 자유가 아니라 자신의 입장을 천명할 의지를 말한다. 로고테라피에서 기본 신조로 삼고 있는 '자신의 삶은 자신이 책임자다'라는 말과 상통한다. 


장황하게 프랑크 박사의 로고테라피에 대해 설명했다. 이 이론에 근거하여 우리나라의 현실을 직시해보자. 우리나라는 자살률이 높다. 경제적으로 잘 산다는 OECD 국가 중에서 제일 높은 꼭대기에 놓여 있다. 부끄러운 성적표다. 우리 사회가 삶의 의미보단 계량화된 지표만 보고 달려온 것에 대한 대가가 아닌가 싶어 더 무섭다. 물질적으로는 풍요를 누리고 있지만 실존적 공허가 이런 비극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 정책 당국과 학계가 힘을 합쳐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내고 최우선적으로 치유해야 할 국가적 시련(과제)이다. 삶의 의미가 부족하거나 부재하면 외부 환경에서 가해지는 약간의 압박에도 쉽게 포기하고 만다는 실증적 지표이기도 하다.


'자살'이란 우리말을 거꾸로 보면 '살자'이다. 무엇이 삶의 의미를 충만케 할 것인가? 앞에서도 강조했지만 나와 삶의 관계를 바꿔보자. 내가 삶에게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나에게 질문하게 해 보자. 학교와 사회는 과도한 경쟁에 내몰려 있다. 과잉 경쟁의 시대다. 한 줄 세우는 학교 시험과 대학 입시, 1등에 환호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정글의 약육강식 생태계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야만을 탓할 바가 아니다. 먹이사슬과 같다. 숨 쉴 여지가 없다. 자살하려는 사람은 옆에 누군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준 것만으로도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바꾼다고 한다. 실존적 존재로서 인간은 자살하려는 이유가 한두 가지라면 살아나야 하는 이유는 수십, 수백 가지다. 인간이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의지는 인간에 부여된 원초적 동력이라는 것을 깨닫고 이를 실행에 옮기려고 하는 한 살아남아 행복할 이유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일 것이다. 


학생에게는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미를 먼저 배우게 하는 것이 공부의 순서다. 왜 수학을 배워야 하고 왜 국어 외에 외국어를 배워야 하는가에 대한 그 의미를 먼저 가르쳐보자. 학교를 중도에 그만두거나 포기하는 학생들에게 왜 학교를 다녀야 하는가에 대한 의미에 대해 진지한 상담이 필요하다. 청소년 시기에 맺은 친구가 그들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에 대해 알려줄 필요가 있다. 오늘날 학교 위기가 일반적인 말이 되고 청소년 문제가 사회 문제로 급부상한 것은 전적으로 어른들 탓이다. 어른들은 청소년들이 그들의 삶에 대한 의미를 찾고 있을 때 그 갈증을 해소시켜 주기는 커녕 무관심하게 방치했다.   


빅토 프랭클 박사가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체험을 통해 완성한 로고테라피는 현대인이 직면한 실존의 문제를 해결하는 한 가지 대안이 될 수 있다. 프랭클 박사가 수용소에서 찾아낸 그의 삶의 의미가 궁금하다. 그는 수용소에 오기 전 쓰다 만 원고도 마감해야 하고 대학에서 강의도 해야 했다. 무엇보다 수용소에서 체험한 실존적 존재로서 인간에 본질에 대해 증언하고 싶었다. 이것이 극단적 시련을 극복하고 살아남은 근본적인 동력이었다. 그를 통해 '희망'과 '꿈'이라는 단어는 그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오늘의 나를 먹여 살리는 실존의 소중한 양식임을 깨닫게 된다.


Frankl, V. E. (1988). The will to meaning: Foundations and applications of logotherapy. 이시형 역(2014). 빅터 프랭클의 삶의 의미를 찾아서. 청아출판사. 

Frankl, V. E. (2005). Man's search for meaning: An introduction to logotherapy. 이시형 역(2014).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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