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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Oct 14. 2020

미처 몰랐습니다 ②

최서면(崔書勉 1928-2020) 국제한국연구원장

최서면 원장의 본명은 최중하이고 최규하 대통령과는 사촌간이다. 그의 청년 시절은 근현대사의 소용돌이와 맥을 같이한다. 연희전문 문과에 다니다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을 중심으로 창설된 한국독립당 산하 대학학생연맹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반탁운동을 하였다. 장덕수 암살 사건에 연루되어 무기징역을 받고 수형 생활을 하다 이시영의 도움으로 형 집행정지로 풀려났다. 서면(書勉)이란 이름은 초대 부통령을 역임한 이시영(임기 1948-1951)이 지어줬다. 옥중에서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 6.25 전쟁 중에는 부산에서 가톨릭 계통의 고아원을 운영한 인연으로 천주교 총무원 사무국장을 맡았다. 가톨릭 신자인 장면 부통령을 돕다 이승만 정부에 요주의 인물로 찍혀 체포 위기에서 일본으로 밀항했다. 1957년 29세.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 격이다. 


정치적 박해를 피해 일본으로 갔지만 민족의식이 강했던 그에게 주어진 소명은 따로 있었다. 그는 일본 외무부와 의회도서관에 파묻혀있던 한일 근현대사 자료를 뒤졌다. 그는 일본이 가지고 있는 방대한 한국 관련 자료를 보고 한국인이면서 한국을 너무 모르는 자신이 부끄러워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선진국의 공통점은 전 세계와 관련된 자료가 많다.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방대한 자료를 토대로 최적의 해결 방안을 찾아낼 수 있다. 미국이 부러운 이유 중 하나는 의회도서관, 대학 도서관에 엄청난 자료들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고인이 느꼈을 자괴감에 짐작이 간다.


는 일본 내 한국학 권위자요 최고의 안중근 전문가다. 40여 년을 안 의사의 옥중 수기, 평화사상, 유해 비밀 매장 과정, 일본인의 안 의사에 대한 이중적인 정서에 대해 조사, 연구했다. 1969년 안 의사의 육필 옥중수기인 <안응칠 역사> 필사본을 도쿄 고서점을 통해 입수해 공개했다. 대개 사람들은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한일합병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는 사실만 알지 안 의사와 관련된 전후 맥락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이즈음 동경에 한국연구원을 열어 본격적으로 한국 근현대사 연구를 시작했다. 1978년 임진왜란에서 함경도 의병대장으로 활약한 정문부의 승리가 기록된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를 야스쿠니 신사 숲에서 찾아냈다. 2005년 우리나라에 반환돼 2006년 북한에 전달됐다. 1994년 이봉창 의사의 옥중수기와 재판기록을 발굴했다. 2004년에는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에 소장된 사료 5만 책을 일일이 뒤져 찾아낸 자료들을 모아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 소장 한국관계 사료 목록 1875∼1945>(국사편찬위원회)를 펴냈다. 무려 5만 권의 자료다. 


고인은 사료 연구자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그는 근기(根器), 즉 역사 공부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근성과 기량에서 본보기가 되었다. 한국 정부에서도 한일 관계가 꼬이면 고인을 찾았다. 고인의 진면목은 일본과의 독도 영유권 문제에서 발휘되었다. 독도 영유권을 입증하는 지도, 자료 20만 건을 발굴, 소개했다. 2006년 10월 고인이 일본 시마네대 나이토 세이추 명예교수(일본 정부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비판해 온 학자)와 가진 독도 영유권 관련 인터뷰 내용 중 이런 대목이 나온다. "옛 지도는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이다.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즉 누가 왜 어떤 목적으로 이 지도를 만들었는가를 보고 단순히 고지도에 독도가 나온다든가, 다케시마라고 돼있다라든가라는 것으로 우리 것이다 아니다 하는 것은 잘못이다. 예컨대 영유권 다툼에서 제일 권위가 있는 것은 정부가 편찬한 '관찬 지도'다.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는 관찬 지도를 모두 네 번 만들었는데 이 가운데 독도, 울릉도가 나오는 지도는 한 장도 없다." 지도는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이다. 나쁜 의도를 가지면 나쁜 지도가 되고 만다. 국제적으로 영토 문제를 풀어가는 탁견이 아닐 수 없다. 일본인의 주장대로 하면 조선의 옛 지도에 쓰시마가 들어 있는데 쓰시마가 조선 것이 되어야 한다. 


고인과 가나야마 마사히데(金山政英) 주한일본대사(임기 1968-1972)와의 인연은 특별하다. 파주 천주교 하늘묘원에는 두 사람의 묘가 10m 간격을 두고 나란히 누워있다. 언뜻 보아서는 이해가 되지 않은 시추에이션이다. 고인이 동경의 한국연구원 원장으로 있을 때 가나야마 대사가 임기를 마치고 최 원장을 찾아갔고, 둘은 의기투합하여 한일관계를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 고인과 대사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면서 영세명(아우구스티노)도 같았다. 물론 이전부터 둘은 막후에서 양국을 위해 많은 활동을 하면서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최 원장은 "포항제철은 박정희 대통령과 박태준씨가 주도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 이면에는 가나야마 대사의 숨은 공로도 있다"라고 회고했다. 제철소를 건설하는 것 못지않게 기술 지원을 받아야 할 때 가나야마 대사는 일본제철소(신일철)의 협력을 이끌어냈다. 당시 우리나라는 '나사도 제대로 못 만드는 국가'로 낙인이 찍혀있었다. 가나야마는 “1897년엔 일본이 그런 소리를 들었다”고 지적했다. 그에게 설득돼 신일철은 포항제철 설립에 필요한 기술을 제공하기로 했다. 자금은 일본이 제공한 ‘청구권 자금’으로 충당하기로 했다(복거일 2019). 또 놀라운 사실은 가나야마 대사는 1969년 3.1절 기념식에 참석했다. 주한일본대사가 삼일절에 참석한 것을 두고 본국으로부터 질책을 받았지만, "과거를 청산하고 앞으로 한국과 잘 지내기로 해놓고 한국의 기념일을 축하하는 것이 문제가 되나. 8.15 광복절 행사에도 못 갈 이유는 없다"라고 항변했다고 한다(장세정 2015). 한국과 일본 양국의 정서를 생각하면 쉽게 행동에 옮길 수 없는 행동이다. 대사는 최서면 원장에게 한국에 묻어달라고 부탁했다. "나도 죽으면 이 땅에서 묻히고 싶다. 최원장과 이 세상에서 한일 관계에 대해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최 원장도 가족묘원에 대사의 묘지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최서면 원장과 가나야마 대사 묘지 2015년 8월>


90년대 고인을 처음 뵀을 때가 생각난다. 수염이 많은 소탈하고 검소한 할아버지 인상이었다. 청년은 자신을 받아 주지 않은 조국을 떠나 노익장이 되어 돌아왔다.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 싶다. 그의 청춘과 생애를 조국의 역사를 발굴하고 알리는 데 바쳤다. 이시영은 안목이 있었다. 이름 서면(書勉)처럼 그는 도서관에 파묻혀 민족의 역사를 정리, 수집, 발굴, 편찬하는 데 모든 정열을 쏟았다. 미처 몰랐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복거일. (2019). <한국경제>. <[복거일 칼럼] 가나야마 마사히데를 추모하며>. 2월 11일.

심규선. (2020). <신동아>. <한일관계 막후 60년-최서면에게 듣다>. 6월 2일.

장세정. (2015). <중앙선데이>. <가나야마 부른 박정희 "한국 대사 역할 한번 해주시오">.  8월 9일.

최서면(1994). 새로 쓴 안중근 의사. 집문당.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483619.html

http://www.hani.co.kr/arti/society/obituary/946541.html#csidx74bc927b20ea131a782a2c0dde91b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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