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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현하기 Jan 14. 2024

스몰스텝이 어렵다면 마이크로 나노 스텝으로...

1%가 충전되고 전원을 켠 뒤 내가 제일 먼저 한 것은 주변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겨울잠자는 곰마냥 웅크리고 있는 동안 주변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관계들이 대부분이었기에 관계에도 정리가 필요했지만, 특히 엉망이었던 것 집안 상태였다. 

방바닥에는 먼지가 굴러다니고 있었고, 여기저기 옷가지들이 걸려 있었으며, 싱크대에는 설거지 거리들이 산처럼 쌓여있었다. 그 동안 배달음식에 의존했던 터라 분리수거를 기다리는 음식 용기들도 옆에 함께 쌓여있었다. 

'하아... 내일 할까? 이거 언제 다 하냐...'

정리가 정말 시급했지만, 막상 엉망인 상태를 확인하고 나자 어디서부터 정리해야 할지 막막해지면서 잠시 생겨났던 의욕이 다시 사그라들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미 어제도 똑같이 싱크대 앞에 서 있기만 하다가 오늘로 미룬 상태였다. 


'아, 아직 난 충전 중이지'

내게는 이제 1% 남짓한 배터리만 있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우선 하나만 하기로 했다. 

먼저 싱크대 앞으로 가 쌓여있는 그릇 위에 있는 하나만 설거지했다. 다른 그릇들이 보였지만 거기서 멈추기로 했다. 버려야 그릇 중에도 우선 급해보이는 몇개만 분리수거함에 내다 버리고, 널부러진 옷가지들 일부는 세탁기로 일부는 개어두기만 했다. 


'아직 정리되려면 한참이 남았잖아. 시작한 김에 싹 해버릴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예전엔 무엇이든 한 번 시작하면 그 자리에서 끝을 봐야 하는 성격이었다. 

강의 준비를 때도, 제안서를 쓰거나 논문을 때도, 집안을 청소할 때도 그랬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4시간씩 마음에 들때까지 옷장 정리를 하기도 하고, 일을 식사를 거르거나 밤을 새면서까지 자리에서 결론을 지어야 했다. 그렇게 앉은 자리에서 결론을 짓고 나면 뿌듯했다. 뭔가 대단한 낸것만 같았다. 하지만 후유증은 예상치 못한 복병이었다. 


"한번에 많이 하면 뇌가 질리게 되서 다시 그 행동을 하려할 때 힘들다"

TV프로였는지 책이었는지 기억은 나질 않지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다시말해, 질린 음식을 다시 거들떠도 안보는 것처럼, 뇌가 질려버린 행동은 다시 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안가 내 뇌가 일과 관계, 일상에 질려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언제부턴가 일이 주어지면 마감일까지 최대한 미루고미루다 급히 처리하는 일이 많아진 것이다. 일단 시작하면 여전히 4시간 8시간씩 자리 앉아서 끝을 본다. 하지만 자리에 앉기까지 계속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주위만 맴도는 시간도 늘어났다. 뇌는 기획안을 쓰거나 강의안을 만드는 것, 청소를 하거나 정리하는 것에 질린 상태였던 것이다. 그리고 상태는 이내 번아웃으로 이어져 지금까지 방전상태가 아니었던가. 


그러니 한껏 웅크리고 있다가 이제 막 깨어나는 단계에서 '시작한 김에 싹 해버릴까?'라는 생각은 경계 대상 1호였다. 눈에 밟히는 그릇들과 옷가지들을 잠시 외면하고 한잔을 끓여 한권을 집어들고 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창가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한 줄만 읽겠다는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 물론 재미를 느끼면 조금 읽었다. 그래봤자 당시에는 페이지를 넘기기 어려웠지만...


그렇게 대략 짧은독서 시간을 갖고 일어나면서 기지개를 한번 켜 준다. 머리 위로 팔을 뻗어 좌우로 몸을 기울여가며 허리를 주는 동작을 한번만 한다그리고 몸을 돌리면서 거울이 보이면 그대로 자세를 잡고 스쿼트 동작을 1회만 했다. 이어서 하지는 않았다. 그냥 그렇게 한번씩만 했다. 


방에서 거실로 나가는 길에 테이블 위의 빈 잔이나 버릴 것들, 빨래감을 두어개만 집어 들고 나온다. 

욕실에 들어서서 거울 속에 내가 보이면 다시 한번 스쿼트 동작을 한번 더 했다. 

물티슈를 집어들고 딱 타일 한개만 혹은 거울 한 면만, 수납장 문 한쪽만 닦아본다. 

배달음식을 줄이기 위해 반찬을 배달시켰고, 즉석밥을 주문해 두었다. 

별 차이 없을지 몰라도 일회용 용기의 음식을 그대로 가져다 먹는 것이 아닌 냉장고에서 반찬통을 꺼내 예쁜 그릇에 옮겨 담아 먹은 뒤 이를 정리하는 행동에 더 의미를 두기로 했다. 

밥을 먹고 나면 방금 먹은 그릇을 씻는 김에 쌓여 있는 그릇들 중 한개만 더 씻는다. 

나머지는 그냥 내버려 두었다. 


정리를 시작하고 며칠이 지났지만 여전히 개수대에 그릇들이, 바구니엔 빨래감이 쌓여있고, 바닥엔 먼지가 있었지만, 한꺼번에 처리할 생각은 더이상 하지 않았다. 바닥에 쪼그리고 앉았을 때 한 팔로 훑을 수 있을 정도만 먼지를 닦아내고, 맨 위의 그릇 한 개만 닦고, 편의점 가는 길에 플라스틱 그릇 한개만 내다 버리고, 세수하면서 양말 한켤레만 빨았다. 


.

.

.



그렇게 나는 스몰스텝도 아닌 마이크로 나노 단위로 쪼개고 쪼개서 아주 하찮은 작은 행동들을 시작했다. 

가랑비가 내리듯, 먼지가 쌓이듯, 소복소복 첫 눈이 쌓이듯. 그렇게 하찮고 소소한 행동들이 반복될 수록 집안은 정리되기 시작했고 마음도 빠른 속도로 충전되기 시작했다. 


한 줄로 시작한 책 읽기는 한 문단이 되고, 한 페이지가 되고, 한 소챕터를 읽었다가, 이내 한 권이 되었다. 

눈을 감고 깊은 호흡 한 번에 그쳤던 행동은 10분의 명상으로 이어졌고, 매일 하나씩 버리고 닦고 정리하자 했던 싱크대와 빨래 바구니에는 더이상 그릇과 옷가지가 쌓여있지 않게 되었다. 


하찮고 소소한 행동들이 일주일, 한달, 1년 반복되는 동안 소소한 성취감들도 함께 쌓여갔다. 

그리고 그 성취감들은 내 충전기가 되어 주었다. 


여전히 한번씩은 일을 미루기도 하고, 아침에 사용한 그릇이 저녁때까지 개수대에 담겨져 있기도 한다. 

여전히 내 배터리는 100% 상태가 아니고, 충전한만큼 사용하기에 충전기가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나는 하찮을 정도로 작은 행동들이 주는 소소한 성취감을 계속 이어갈 생각이다. 


"소확행"이란 말이 한동안 유행한 적이 있었다. 

하찮을 정도로 작은 행동들이 주는 성취감은 소소하지만 확실한 성취감이었다. 

그래서 조금 더 매 순간 현재에 집중할 수 있고, 조금 더 잦은 빈도로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행동도 어쩌면 "소확성(소소하지만 확실한 성취감)"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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