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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현하기 Apr 23. 2024

우리는 많은 신호에 둘러싸여 있다.

내면아이의 신호

처음으로 연재를 시작해 보려 합니다. 

아직 여러모로 미흡한 부분이 많지만 조금씩 보완해 가며 성장해 가며 

정기적으로 매주 화요일 나와의 화해(내면아이 소통)라는 주제로 글을 올립니다. 

TMI이지만, 글을 미리 써 놓고 묶어서 연재를 하는 것으로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전에 올렸던 "화해"가 들어간 4편의 글은 연재로 묶이진 않았지만,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야, 넌 그만 뛰라니까 왜 한바퀴를 더 뛰고 난리야!!"







중학생 시절 체력장에서 오래달리기를 마치고 헉헉 대며 들어오는 내게 체육쌤은 이렇게 소리치셨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체력장"이라는 학교 행사가 있었다. 

체육대회와는 조금 다른, 오로지 체력검사를 위한 것이었다. 

단거리 & 장거리 달리기, 윗몸일으키기, 오래 매달리기, 멀리뛰기 등 누군가와 겨루는 체육대회와 달리 순전히 내 기록이 남는 그런 행사였다. 


어려서부터 체력이 약했던 나는 대부분의 기록에서 하위권에 맴돌았다.

100미터 달리기는 겨우 20초 안팎이었고, 유연성 테스트는 선생님들이 눈을 비비며 "읭?"하는 반응으로 구경하는 친구들을 웃게 만들정도였다. 멀리뛰기나 턱걸이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 내가 유난히 기록이 좋은 것이 있었다. 바로 오래달리기였다. 

운동장을 4~5바퀴 돌면서 기록을 재는 오래달리기만큼은 이상하게도 기록이 좋아 늘 상위권으로 골인점에 들어왔다. 당연히 다른 종목보다는 자신감이 있기도 했다. 




그런데 정해진 바퀴 수를 다 돌고 들어온 내게 선생님과 친구들의 반응이 내가 한 바퀴를 더 돌았단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헉헉대며 주저앉은 나는 사고가 제대로 돌아가질 않았다. 

이게 도통 무슨 소리인지.. 난 그저 내 앞에 친구 등을 보고 달렸을 뿐이었는데..?


알고보니 내가 등을 보고 있던 친구는 맨 마지막에 달리던 친구였다. 

앞만보고 달리다 보니 어느새 한바퀴 차이가 났었지만, 

나는 그 친구가 선두라고 생각하고 그저 달리기만 했던 것이다. 


마지막 바퀴를 알리는 선생님의 신호를 보고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었다.

분면 이제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한 바퀴가 남았다고?

이상했지만, 내가 착각했나보다 하고 그냥 뛰었었다. 

그 결과 다른 친구들보다 한바퀴를 더 뛴 내 기록은 정확하지 않다. 

다행히도 처음으로 들어온 친구(내 바로 뒤)와 같은 점수를 받기는 했다. 


당시에는 조금 억울하기도 했다. 

그저 열심히 뛰었을 뿐인데 몸은 몸대로 고되고 선생님께 혼까지 났으니 말이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도처에 이런 신호들이 있었다. 


'뭔가 이상한데?'

라던가


'어... 어...?'

싶은 순간들. 


그럴 때마다 난 눈앞에 일어난 상황이나 다른 사람들의 말에 더 집중했었다. 


'내가 착각했겠지'

'내가 잘못생각한 거겠지'

'나보다 선배이니 더 잘알겠지'

'내가 부족한거겠지'

'내가...'

'내가...'

.

.

.


이런 식으로 핑계를 대며 상황과 타인에게 맞춘 선택을 합리화시켜 왔다. 

그렇게 내린 선택들은 때론 나를 안심시키기도 했고, 때론 불만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그 선택들 중 그 어떤 것도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안심하고 안도했다는 것은 그저 '다행이다'인 것이지 만족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은 온전한 내 선택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내가 원한 선택'은 아니었다. 



내 안의 아이는 가끔 이런 신호들을 보내곤 한다. 

주의를 주는 것일 수도 있고, 더 나은 방향을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며, 

때로는 의미 없는 신호이기도 하다. 


나와 화해를 결심하고 나서부터 이런 신호들을 찾는 재미가 생겼다. 

책 속의 구절이 신호가 되기도 하고

누군가의 대화 속에서 신호를 찾기도 한다.

때론 노래 속에서, 때론 명상을 하다가, 때로는 나무나 새에게서도 신호가 숨어있다. 



'이건 무슨 신호일까?'

라는 생각을 하다보면 상황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게 된다. 

불만스럽고 불평하게 될 상황에서도 '신호의 의미'를 생각하는 때부터 부정적인 감정이 조금씩 가라앉는 것을 느낀다. 



이런 신호를 찾게되면 내 안에 있는 아이에게 '신호를 줘서 고마워'라고 말을 건넨다. 

그리고 '지금껏 보내준 신호들을 알아채지 못해서 미안해'라고도 말해본다. 

가끔은 마음이 편안해 짐을 느끼고, 가끔은 아무런 것도 느껴지지 않을 때도 있다. 



이제와서 문득 이런 생각을 해 본다. 

만약 그 때 내 안에서 보내는 신호를 믿었다면 어땠을까?

멈추지는 않았어도 한번 더 뒤는 돌아보지 않았을까?

선생님은 나를 잡으러 몇미터정도 뛰어나와 말리려 하셨다고 하니, 

어느정도 뛰다가 멈추고 돌아왔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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