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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현하기 Apr 30. 2024

나의 안전지대는 어디에 있을까?

퀘렌시아 찾기


퀘렌시아(Querencia)는 회복의 장소이다. 

세상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이 안전하다고 느끼는 곳, 힘들고 지쳤을 때 기운을 얻는 곳, 본연의 자기 자신에 가장 가까워지는 곳이다. 

- 류시화,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 보지 않는다 중 -     




      

어두운 밤 골목길을 걸어가다 뒤에서 저벅저벅 발소리가 들린다. 

뒷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내 앞까지 늘어진 게 보인다. 

덜컥!

겁이 나서 발걸음을 빠르게 옮겨본다. 

후다닥 계단을 올라가 비밀번호를 누르고 잽싸게 현관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근다. 

현관문 너머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을 때, 

그때 비로소 가슴 속에서 무언가 탁! 하고 풀리는 느낌이 든다.      


안도감.

더는 나를 위협할 사람도 상황도 없을 거라는 믿음.      





이처럼 안도할 수 있고 긴장을 풀 수 있는 곳을 퀘렌시아라고 말한다.

퀘렌시아는 스페인어로 ‘애정, 애착, 귀소 본능, 안식처’라는 의미를 가진다. 

투우 경기 중 싸움에 지친 소가 숨을 고르기 위해 본능적으로 삼은 피난처이기도 하다. 

정해진 장소는 아니지만, 소가 퀘렌시아로 파고들었을 때 투우사는 소를 공격해서는 안 된다.  

    

류시화 님의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라는 책에서 퀘렌시아를 처음 접하고 ‘나의 퀘렌시아는 어디일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나의 퀘렌시아’를 찾고 싶었다.      


가장 나다울 수 있는 곳

가장 안심하고 쉴 수 있는 곳

그 누구도 나를 공격할 수 없는 곳     


처음에는 당연히 “집”이었다. 

타인의 명의로 되어 있는 작은 공간이지만 치열하게 하루를 버티고 돌아와 맥없이 쓰러져도 괜찮은 곳은 집이 유일했다. 하지만 언제 이사가야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문득문득 비집고 들어왔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초점은 “장소”를 찾는 것에서 “안도감을 느끼는 순간”으로 이동했다.           


그 다음 찾은 퀘렌시아는 가족이나 친구와의 “관계”였다. 

속내를 모두 털어놓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 그들과 보내는 시간이 안도감을 주는 것 같았다. 그들과의 시간이 끝나고 혼자만의 시간이 되면 ‘아.. 그 얘기는 괜히 했나...너무 내 얘기만 한건 아닌가... 걔도 힘들텐데...’라는 생각들이 들었다.      


일이 많고 잘 풀릴 때는 무사히 일이 끝났을 때 안도감과 성취감을 느끼면서 “성과”가 퀘렌시아인 것 같았다. 하지만 하나의 일이 끝나고 다음 일이 시작될 때, 혹은 일이 끝나기 전까지 늘 긴장상태에 있어야 했다.           

“집”을 퀘렌시아로 여겼을 때는 밖에 나와 있으면 불안했다. 

“관계”을 퀘렌시아로 여겼을 때는 늘 좋은 평가를 받기를 갈구했다. 

“성과”에서 퀘렌시아를 찾으려 했을 때는 결과 없는 과정은 의미가 없어졌다.      


하는 모든 일이 문제 없이 진행되기를 바랬고, 모든 사람에게 인정과 사랑 받기를 바랬다. 

그럴수록 일도, 사람도 어긋나기 시작했다. 

내게 허락된 퀘렌시아는 없는 것 같았다.      


그 실망감은 생각보다 타격이 컸다. 

집에 있는 것도, 사람을 만나는 것도, 일을 하는 것도 만사가 다 싫고 불안하고 두려웠었다. 

그렇다고 내색할 수는 없었다.           



투우 경기에서 이기기 위해 투우사는 소의 퀘렌시아를 찾아내어 차단한다. 

퀘렌시아에 들어간 소를 공격할 수 없으니 아예 퀘렌시아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럼 지칠대로 지친 소는 투우사에게 승복할 수밖에 없다.      


퀘렌시아를 찾아 헤매던 나는 투우사에게 몰려 쓰러지기 직전의 소 같았다.                






나와 화해가 필요하다는 것을 자각하고 여러 가지 방법들을 시도해 봤다. 

혼란과 혼돈의 시간을 거쳐 어지럽게 했던 부유물들이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하자 지금껏 나를 둘러싸고 있던 퀘렌시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10년을 알고 지냈지만 처음으로 한 시간 넘게 대화를 해 본 사람과의 시간 속에도 퀘렌시아가 있었다. 

우연히 집어 든 책 속에서 만난 글귀에서 위로와 위안을 받고, 퀘렌시아임을 느낀 때도 있었다. 


내가 안도감을 느끼는 순간은 모든 장소가 퀘렌시아가 될 수 있었다.      

타인의 시선과 평가, 업무 성과에 대한 압박감과 부담감, 나를 둘러싼 관계에 대한 책임감 등에 시선을 두고 살아갈 때는 느낄 수 없는 순간들이었다.      



눈을 가리고 있으면 보이지 않는다. 

까만 안경을 쓰고 있으면 세상은 까맣게 보인다. 

들으려 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것이고, 느끼려 하지 않으면 느껴지지 않는다.      

너무도 간단하고 당연한 진리다. 


그때의 나는 퀘렌시아에 있으면서도 안전하다는 것을 온전히 알아차리지 못했다.      

보려하니 보였고, 들으려 하니 들렸고, 느끼려 하니 느껴졌다. 

얼마나 많은 퀘렌시아가 나를 둘러싸고 있는가 말이다.           



소가 퀘렌시아에 있을 때 투우사는 공격하지 않는다. 

소는 그것을 알기에 충분히 숨을 고르고 쉬고 다시 투우사와 싸우러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마음놓고 쉴 수 있어야 퀘렌시아이다.      



집에서도, 관계에서도, 상황에서도 퀘렌시아는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 

언제나 어디에나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퀘렌시아 자체가 아니다. 

퀘렌시아를 안전하다고 받아들이는 내 마음이다. 

나를 믿는 마음, 나아가 세상을 믿고 사람들을 믿는 그 마음말이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약하면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마주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믿음도 약할 수 밖에 없다. 





내가 퀘렌시아를 찾지 못했었던 것은 상황이나 눈 앞의 사람들이 때문이 아니었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 자기 확신 부족 때문이었다.          



나는 기왕이면 퀘렌시아가, 내 안전지대가 더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매 순간에 머무는 매 장소가,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그들과의 대화가 모두 퀘렌시아가 되느냐 마느냐는 내가 이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있다.           


새벽기차를 타고 나선 출장길, 오늘 만나게 될 수십명과의 시간이, 그 장소가, 나눈 대화가 서로에게 퀘렌시아가 되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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