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멈춰버렸다, 또다시.
며칠 전부터 치통이 있다.
한쪽은 양치질할 때마다 시큰거려 손을 댈수가 없고,
다른 한쪽은 가만히만 있어도 둔탁한 통증이 턱아래까지 번진다.
시큰거리고 아프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으니 우선은 평소보다 더 신경써서 양치질을 해 본다.
숨을 크게 쉬고 마음의 준비를 한 뒤 시큰거리는 쪽에 칫솔을 가져다 대면서 눈을 질끈 감아버린다.
치아 전체가 흔들리는 기분이다.
치과를 찾는게 생각보다 어렵다.
사는 곳 특성상 미백이나 교정이 많다.
더군다나 내 치아 중 3개는 이미 신경치료와 크라운을 씌운지 10년도 넘은 상태.
분명 이것까지 견적을 낼 것이 불보듯 뻔한 상황이다.
알아보니 일반적인 치료보다 더 어려운 치료라고 한다.
기왕하는 거 잘하는 치과에서 받고 싶다는 욕구는 너무도 당연한 것일테다.
아픈 치아를 부여잡고 치과를 찾아보길 며칠.
시큰거리던 쪽이 좀 가라앉았다.
칫솔을 가져다 대도 잠시 시큰거리지만 못견딜 정도는 아니다.
다행인건가, 무뎌진건가.
반대쪽 둔통은 점점 심해져서 눈 아래쪽 광대와 관자놀이쪽까지 번지고 있다.
결국 집 근처 한 자리에서 15년 이상 오래된 곳 중 지역 커뮤니티에서 추천하는 곳으로 2곳을 선별해 검진을 받아봤다. 치과는 여러곳을 다녀본 뒤 치료를 결정하라지 않던가.
사랑니는 예상치 못한 복병이었다.
한 곳에서는 발치를, 다른 한 곳에서는 모양이 나쁘지 않으니 지켜보자 했다.
결국 지켜보자 한 곳에서 급한 치아부터 치료를 했다.
나이를 먹어도 치과는 무섭다.
요란한 기계음이 두려움을 부채질하고, 치아에 닿는 기계의 감각이 공포심을 불러일으킨다.
예고도 없이 위 아래를 들쑤시는 기계와 목구멍 어딘가 의미 없이 놓여진 썩션(suction)은 혼을 쏙 빼놓기 충분했다. 정신없던 30분이 지나고 진료가 끝났다.
치료를 했으면 통증이 나아져야 할텐데..
여전히 남아있는 통증에 대해 이런저런 설명 없이 약먹고 며칠 두고 보자는 말에 불안감이 엄습한다.
그날부터다. 그렇게 내 시간은 또 멈춰버렸다.
나와 화해를 신청하기 전처럼 새벽 늦게까지 깨어있기 시작했다.
화해를 하겠다며 이것저것 시도하던 초기처럼 하루에도 몇번씩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하기 시작했다.
무력함과 무기력함이 동시에 밀려오니 아무것도 하기 싫어졌다.
처방해 준 진통제를 먹어도 가라앉지 않는 통증에 어쩔줄 몰라했다.
약은 먹어야 하니 밥을 먹고 다시 잠들기를 반복했다.
마치 10여년 전 원인 모를 통증에 수위 높은 진통제조차도 듣지 않아 의사들도 나도 헤맬 때, 딱 그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불안하고 막막하고 두려웠다.
무엇이 원인이 되어 이 상황이 생겨났는지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다른 병원을 찾아보면서도 이 두려움은 쉽게 가시질 않았다.
'다른 병원을 가 볼까? 일주일 정도는 약먹고 기다려 보랬으니, 우선은 기다려 봐야 할까?'
갈피를 잡지 못하는 마음은 별별 생각을 다 하게 한다.
'이러면 안되는데, 할 일들이 많은데, 이러다가 예전처럼 더 무기력해지면 어쩌지?'
'상담이라도 받아봐야 하나..'
그렇게 퇴보한 것 같이 당황스런 현실과 스스로에 대한 자책감을 애써 밀어내며 괜찮다, 괜찮을거야를 되뇌이며 시간을 멈추고 웅크린채 며칠을 지냈다.
문득 특정 패턴이 반복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순항하던 일상에서 '이런 식으로 계속하면 되겠다!'싶은 순간마다 제동이 걸린다.
마치 애써 쌓고 있던 도미노를 누군가 '톡' 건드려 일부를 무너뜨린 것 같은 기분이다.
망연자실 손 놓고 있다 다시 쌓기 시작하면 또 누군가 '톡'하고 건드려 버린다.
그리고 그럴때마다 나는 '왜?'를 찾고 있었다.
이 '왜?'가 납득되지 않으니 '어떻게?'로 넘어가질 못한다.
하지만 삶을 살다보면 원인이 분명하지 않은 일들이 태반이지 않은가.
원인을 알고 제거하면 해결되는 일도 있지만,
원인을 안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일도 있고,
원인 자체를 알기 어려운 일들도 있는 법이지 않은가.
누군가 애써 쌓아놓은 도미노 블럭을 건드려버렸다.
'왜 그랬어?'를 따지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어떻게 해야 다시 내 도미노를 건드리지 않게 할까?'를 고민하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통증이 시작되고 나는 다시 습관처럼 '왜?'를 찾았다.
그리고 만족스럽지 않았던 치과 진료 후 '어떻게 그럴 수 있지?'라며 의사와 의료진의 행동을 곱씹었다.
'과거의 나와 다른 사람에게 신경이 팔려 정작 지금 아픈 내게 신경쓰지 못했구나'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자연스레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며칠 멈춰 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쌓여있던 택배박스들과 배달음식 용기들을 정리해 버리고, 설거지거리와 빨래거리들을 치워버린다.
의자에 쌓아두었던 옷들도 정리해 옷장과 서랍, 그리고 세탁기로 분류해 정리해한다.
빈 밥솥에 밥을 해 넣고, 그나마 남아 있는 몇가지 없는 재료들로 간단히 상을 차려 끼니를 챙긴다.
이번에는 짧았다.
원인도 모른채 아팠을 때나 친했던 이들과 인연이 끊어졌을 때, 기대했던 일의 결과가 좋지 않았을 때마다 내 시간은 수개월 혹은 1~2년 씩 멈춰있곤 했었다.
일만 하는 기계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은채 겉으로는 웃지만 속으로는 울면서 무력하고 무기력하게 멈춰있었다.
하지만 두 손을 놓고 있어도 내 삶은 늘 흘러가고 있었다.
어느 노래 가사처럼 아무 일도 없단 듯이 하루는 또 시작되었다.
'왜'나 '어떻게'가 분명하든 분명하지 않든 마찬가지로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내 마음속 시간만 멈춰있었을 뿐이었다.
나와 화해를 위한 행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이 멈춰있는 시간이 짧아지고 있다.
두 손 놓고 멍하니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나를 휘둘리게 방치하는 기간이 짧아지고 있는 것이다.
정말 다행이다. 그리고 이를 알아차릴 수 있어 정말 다행이다.
여전히 이 통증이 어느 치아에서 시작된 것인지 알 수 없다.
가는 병원마다 의견이 다르다. 어쩌면 잇몸 때문일 수도 있다.
조금 더 치아와 잇몸 건강을 돌보지 않은 과거의 내 행동들 때문이겠지만 이를 탓하지는 않기로 했다.
생각보다 가볍게 치료될 수도 있고, 어쩌면 최악을 상황을 마주할 수도 있다.
이를 지금부터 고민한다고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행동부터 하나씩 해 나가는 것이 더 의미 있을 테니까.
일어날 일은 어떻게든 일어난다고 한다.
그리고 반복되는 상황이 있다면 그 상황에는 반드시 배울 무언가가 숨어있다는 신호라고 한다.
과거의 내가 다르게 행동했더라도 어쩌면 이 일은 일어날 일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또 다시 비슷한 상황이 생길지도 모른다.
배워야 할 것을 온전히 배우지 않았다면 말이다.
다시 그 상황이 오더라도 더는 상황을 탓하고,
스스로를 탓하며 두 손 놓고 시간을 멈추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어쩌면 다시 상황을 탓하고 스스로를 탓하며 시간을 멈춰둘 수도 있겠지.
그러나 그 시간이 길지는 않을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사처럼
멈춰있지만 빛은 또 떠오를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