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만 과거에 머무는 이유
"아, 쫌! 과거에서 좀 벗어나자 우리!!"
가끔 만나는 지인들이 있다.
만나면 삼겹살이나 회에 소주 한잔을 마시는 편하고도 소박한 지인들이다.
어느 덧 인생의 중반부를 달려가고 있다보니 살아온 날들에 대한 자부심과 살아갈 날들에 대한 고민이 맞물리는 시점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함께 알고 지낸 기간이 있다보니 자꾸만 이야기 흐름은 과거로 돌아간다.
"예전에는 그랬어~"
"우리 때는 다 그랬지~"
"야, 그 때 그런게 어디있었냐~"
우리 대화의 반은 이런 말들로 시작하거나 끝이 난다.
주위를 둘러보면 비단 우리만 이러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가족모임을 가도 친구들 모임을 가도 영화나 드라마를 보더라도 과거 이야기는 빠지 않는 소재이다.
그렇게 머무는 과거 이야기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몇가지 특징이 있다.
정말 좋았던 기억이거나 정말 힘들었지만 끝이 좋았던 기억이다.
어찌됐건 결국 긍정적인 감정이 담겨 있는 기억인 것이다.
잘 안풀리고 꼬이기만 하던 프로젝트를 성사시킨 경험이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정이나 찬사를 받았던 시간들, 그리고 그 시간들과 다른 지금의 모습.
즉, 지금 모습이 예전에 비해 만족스럽지 않을 때 과거 이야기를 꺼내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대화의 끝은 말없이 "짠"하고 잔을 부딪히고 목구멍으로 쓰디쓴 소주를 들이키는 것이다.
목구멍으로 소주를 넘기면서 문득 그때는 어떤 마음이었나를 돌이켜보게 된다.
익숙한 가족과 친구들이 있는 고향을 떠나 아는 이 하나 없는 타지에서 시작했던 대학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겉돌던 때, 대학 입학 때까지 꾸던 꿈을 기어이 접고 취준생의 이름으로 했던 백수생활 2년, 그리고 그저 "일"이란 걸 해야하는 나이에 맞춰 친구따라 들어갔던 회사에서의 2년반.
그렇게 20대를 보내고 드디어 꼭 맞는 직업을 찾았다며 들떴다가 한 순간 바닥을 치고 다시 일어나보겠다고 버둥거렸던 30대까지 지나갔다.
늘 입버릇처럼 말했었다.
빨리 40대가 되고, 더 나이를 먹고 싶다고. 지금이 너무 힘들다고. 벗어나고 싶다고.
그렇게 벗어나고 싶어했던 10대와 20대, 그리고 30대였는데, 지금은 그때가 좋았지라며 추억이라며 회상하고 있다.
왜 우리는 자꾸만 과거에 머무는 것일까?
최근 드라마나 영화, 소설 등을 보면 과거로 회귀하는 타임슬립 소재가 많다.
누군가 "넌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어?" 라고 물어봤을 때
"음... 난 돌아가고 싶은 때가 없어. 지금 돌아간다 해도 그때보다 더 잘 살기는 힘들 것 같아"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아, 물론 지금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그대로 갖고 간다면 얘기가 달라질 것 같다. 우선은 주식부터...헙!)
필요한 존재로 인정받고 싶어서 버둥거렸던 20대와 30대에는 아르바이트도 일도 노는 것도 빠지지 않고 비집고 들어가 끼어들었었다. 밝고 사교성 좋으며 자기주장 확실한 그런 사람이고 싶었다. 잘 놀고 똑부러지게 일하는 사람. 그것이 내가 바라는 내 모습이었다.
밤새며 일하고 노는 것이 일상이었던 그 시기 어느때도 돌아가고 싶은 때는 없었다.
그럼에도 지금 나는 그때를 그리워한다.
그때의 열정과 패기, 어떤 자리든 기어이 비집고 들어가 한 자리 차지하고 앉아있어야 직성이 풀렸던 것은 그때였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까짓거 해 보고 안되면 말지 뭐.
무모할 수 있었던 것도, 무식할 수 있었던 것도 그때였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렇게 한참 과거이야기를 떠들다 보면
'아.. 나 참 열심히 살았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그때만큼 열정도 패기도 무모함도 없는 지금 내겐 그때의 그 열정과 패기, 무모함이 필요하다.
안정적이지만 안주하는 것은 겁나고, 새로운 것을 시작할 용기는 없으면서 더 나은 내일을 바라는 지금 나는 그때의 열정있고 패기넘치던, 그리고 무식할 정도로 무모하게 이것저것 시도하던 모습을 바라고 있었다.
그때는 몰랐던 그 모습들을 이제와서 그리워할 줄이야.
자리를 파하고 집에 돌아오면 헛웃음이 나오곤 했었다.
그렇게도 벗어나고 싶었던 시간들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는 스스로를 자조하기도 했었다.
왜 그때는 몰랐을까?
그 시간들이 얼마나 빛나고 아름다웠는지를 말이다.
힘든 일들도 시간이 지나고 보면 자부심 갖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조금은 덜 힘들게 보낼 수 있었을까?
그 시간들 속에서 얼마나 많은 배움이 있는지를 깨닫는다면 조금은 다르게 보낼 수 있었을까?
이제는 과거를 놓아줘야 할 때인 것 같다.
그리워하며 '만약에~'의 도돌이표에 빠져있다가 50대에 돌아보는 40대도 이처럼 그리워하고 싶지 않으니 말이다.
지금의 현실이 어떠하든 모든 상황에서 배움이 있다는 걸것, 힘든 일도 결국 지나간다는 걸, 그리고 그렇게 지나고 보면 잘 버티고 헤쳐온 스스로가 대견해 지는 때가 온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던 것들을 이제는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언젠가 지금 이 시간들을 돌이켜보며
"그때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 내가 이렇게 잘 될 수 있었지! 참 고마운 시간이었어!"
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