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타워라면 예전에 봤던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텔레비전에서 방영해 주는 걸 지나다 봤는데 늙은 엄마가 다 큰 아들의 친구들을 초대해 우스꽝스러운 분장을 하고 웃긴 몸동작을 하는 걸 보고 모두들 박장대소를 하던 떠들썩한 식사 장면이 인상 깊게 기억난다.
할머니가 돼서 저런 코미디를 몸소 보여준다고? 아들은 그런 엄마를 창피해하지도 않고? 아니 아들 친구들과 저렇게 내 친구 마냥 어울리는 게 그게 가능하단 말이야? 정말 영화다, 영화. 저건 너무 억지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번에 책을 읽으며 새롭게 알게 됐다. 영화의 모든 장면들은 작가의 과거 기억을 풀어낸 것이란 걸. 영화는 작가 나카가와 마사야의 긴긴 일기를 그려낸 것이란 것을.
필명 릴리 프랭키의 도쿄타워를 읽었다.
오쿠다 히데오의 공중그네를 읽었을 때도 그랬지만 도쿄타워를 읽는 내내 발가벗겨진 기분을 숨길 수 없었다. 마사야는 무심히 툭 나를 어릴 적 외갓집에서 보냈던 여름방학 속으로 던져놓기도 하고 고모, 삼촌 모두 모여 추수를 하던 어느 가을로 나를 데려가기도 했다. 마사야의 엄니를 보며 양쪽 할머니 집에서 크게 달라지던 엄마의 분위기를 떠올렸고 내가 고등학생 때 도시로 유학을 나간 뒤 빈 밥상 자리를 보며 눈시울을 붉혔을 엄마를 생각했다.
덤덤히 읽으려고 마음먹었다.
그렇지만 죽음의 문턱을 이미 한 발 넘어선 엄니가 잠시 의식이 돌아와 정신없이 내뱉는 말에 움켜쥐고 있던 마음이 스르륵 빠져나가버리는 걸 어찌하지 못했다.
“냉장고에 도미 회가 들어있고만. 그거하고 또, 냄비 속에 가지 된장국 있어. 그거 데워서 먹어라이......”
병실에 누워있는 엄니의 얼굴에 엄마가 겹쳐 보였다. 내 어릴 적 기억으로는 엄마는 평생 허리 통증에 시달릴만치 시달리고 나서야 겨우 수술을 결심했는데 수술 날 마취가 덜 깨 온전치 않은 정신에도 헛소리처럼 식구들 밥걱정을 했었다.
밥이 뭐라고. 가뜩이나 마음 졸이고 있는 사람에게 한가하게 밥 얘기나 하는 상황이 어이가 없어 불쑥 짜증이 났다.
마사야의 엄니가 정신을 잃어가면서도 행복한 얼굴로 아들 밥상을 챙기는 장면을 읽으며 어쩌면 엄마는 자신이 멀쩡히 살아서 식구들 밥을 챙길 수 있는데 기뻤던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사야는 지지부진했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쿄에 있는 대학에 입학해 자취를 하며 자연스레 방탕한 생활에 젖어들었다.
‘봄이 되면 도쿄에는 청소기 모터가 먼지를 술술 빨아들이듯이 일본 각지에서 젊은이들이 술술 빨려 들어온다. 암흑의 가느다란 호스는 꿈과 미래로 이어지는 터널. (중략) 하지만 터널을 빠져나가면 그곳은 쓰레기 하치장이다.’
‘스스로를 훈계할 능력이 없는 자가 소유한 질 낮은 자유는 사고와 감정을 마비시키고 그 인간의 몸뚱이를 길가 진흙 구덩이로 끌고 들어간다.’
릴리 프랭키의 말처럼 ‘느릿느릿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하수 처리장 가까이로’ 실려 가는 마사야 옆에 싸구려 자유를 걸치고 허위허위 떠내려가고 있는 내가 보인다.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않아 졸업을 제때 하지 못할 것 같다는 말이나 한 달 치 용돈을 벌써 다 쓰고 더 보내 달라는 말 따위를 하려고 공중전화기 줄을 배배 꼬고 있는 내 모습도 보인다. 취직에 실패해 도망치듯 학원 강사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도 똑바로 정신 차리지 못하는 모습이 마사야인지 나인지 ‘빙글빙글 빙글빙글’ 머릿속이 어지럽다가 손이 차갑게 식고 가늘게 떨렸다.
릴리 프랭키는 잔인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과거의 나를 대면시켰다. 이제는 다 지난 일이라 그때는 헛바람이 들었었지, 라며 농담거리로 취급해버리고 싶은 내 모습이, 흘러간 시간 속에 버리고 온 줄 알았던 나 자신이 내가 아무리 잊어버리고 살아도 엄마의 인생 속에 문신처럼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웠다.
엄마의 인생 어디쯤, 젊은 시절 한 부분을 떼먹으며 빌붙어 살았던 나는 결혼을 하며 마침내 엄마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몹시 홀가분하게.
나는 지금까지도 홀가분하게 살고 있다. 미뤄둔 책임을 져야 할 날이 언젠가 오겠지 막연히 짐작하면서. 그때는 내 인생의 한 자락을 엄마에게 내주어야 할 때라는 셈을 해가며. 잘 감당할 수 있을지 얼마라도 갚을 수 있을지 아무것도 자신이 없지만 그냥 함께 있고 싶다.
엄마의 딱딱하고 굽은 손을 맞잡은 채로 그냥.
릴리 프랭키는 처음에 책 제목을 ‘엄마와 나, 때때로 아버지’라고 지었다고 한다. 나의 아빠는 마사야의 아버지와는 정반대로 가정에 충실하고 책임감이 강했던 분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과의 관계성을 따져봤을 때 ‘때때로 아버지’라고 불리기에 어색함이 없다. 여담이지만. 사랑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표현할 줄 모르셨다는 것을 이젠 이해한다. 다른 한 손으로 멎적지만 아빠 손을 잡을 수 있을까.
독서수업이 끝나면 이 책을 엄마에게 전하고 싶다. 책 한 귀퉁이에 지나간 드라마 제목처럼 ‘엄마 미안해. 사랑해.’라는 고백을 적지 않아도 엄마는 내 마음을 읽을 것이다.
-5월에 어느 사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