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담 보바리라니! 기대했던 고전 소설 수업 첫 번째 책이 마담 보바리라니. 유명한 19세기 판 아침드라마의 주인공이 아니던가.
독자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주려는 듯한 책 표지를 보고 기대가 되기보다 기가 죽었다. 현대 소설의 기념비를 세운 작가, 사실주의 소설의 시작과 동시에 그 완결을 이룩한 작품, 어디 어디 선정 100대 명저.
눈을 가늘게 뜨고 책 표지만 한참을 노려보다 엉뚱한 호기심이 일었다. 바람을 얼마나 대단하게 피웠길래 고전의 반열에 올랐을까. 귀스타브 플로베르가 현대 아침드라마 작가들의 입이 떡 벌어지는 상상력을 뛰어넘을 수 있을지 두고 보겠다는 심산으로 첫 장을 펼쳤다.
제1부 내내 끝없이 이어지는 묘사에 지쳐 슬슬 지루해질 때쯤 플로베르가 던져 놓은 게릴라 같은 한 문장을 보고 두 눈을 의심했다.
“맙소사, 내가 어쩌자고 결혼을 했던가?”
본격적인 이야기는 하나도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이건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먼저 봐버린 기분이었다. 무릇 주인공이라면 똘스또이의 이반 일리치처럼 죽음에 다다라서야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후회하는 게 정석이 아닌가. 하물며 샤를르는 자신의 인생이 철저히 능욕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마자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죽는다. 그런데 엠마는 결혼과 동시에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것을 깨달아버렸다. 돌아갈 다리를 불사르고 결혼이란 다리를 건너온 엠마에게 너무 잔인한 대사가 아닐까.
엠마는 자각했기 때문에 지옥 속에서 살아야 했다. 따분하기 그지없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한 남자의 아내로 만족하며 살기에 엠마의 이상은 허황되었다. 엠마는 저 너머를 꿈꾸는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샤를르에게 모든 원망의 화살을 돌렸다. 그러나 정작 삶을 불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은 것은 그녀 자신일 테다. 엠마의 현실을 벗어난 자각은 오직 자신의 욕망에만 충실한 기형적인 것이었다.
끝없는 욕망으로 스스로를 파멸로 몰아간 엠마를 편들거나 당시 흔한 부르주아 여인의 안타까운 숙명이라고 퉁쳐주고 싶지 않다. 그러나 예전처럼 엠마를 그저 불륜의 대명사로만 손가락질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보바리즘이란 허황된 꿈을 꾸는 누구나 걸려들 수 있는 병이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의 통과의례와 같은 그 환상통을 통해 우리는 성숙한 인간이 되어가는 것이 아닐까. 비록 엠마는 무르익지 못하고 썩은 열매가 돼버렸지만.
시대에 녹아들지 못하고 현실에 발붙이지 못한 탓에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는 엠마 보바리는 지금도 끊임없이 생산되고 있다.
책을 읽어나가도 좀체 플로베르의 사실주의가 어떤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다른 소설과 뭐가 다른지 느끼지 못했다. 현대 소설과 형식면에서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라는 걸 배우고 나서야 고개가 끄덕여졌다. 요즘은 다 이런 식으로 쓰는 소설을 플로베르가 처음으로 그렇게 쓴 것임을 간과했던 것이다.
작품 해설을 통해 플로베르의 독창성이 적확한 단어와 문장을 찾고자 하는 작가의 끈질긴 노력 끝에 완성된 것임을 알게 됐다.
써 놓은 글을 크게 소리 내 읽으며 리듬의 효과까지 살폈다고 하니 플로베르, 이 시대에 태어났으면 힙한 래퍼로도 이름 좀 날렸을 텐데.
또 고통스러울 정도로 문장을 다듬고 또 다듬어 종이에 누웠던 글을 벌떡 일으켜 생생하게 살려냈으니 플로베르를 19세기 프랑스의 화타라 부르지 못할까 싶다.
책을 다 읽고 나서 표지 글을 다시 보았다. 그제야 이 글에 대한 모든 찬사가 이해되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런 생각이 든다. 내 글 중 단 한 줄이라도 플로베르와 같은 고민 속에 쓰인 문장이 있을까.
책을 펼치기 전 표지를 마뜩잖게 노려보고 있던 내게 돌아가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괜찮아. 마담 보바리여서 다행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