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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유미 Mar 30. 2021

'오늘' 실종 사건

-엠마누엘 레비나스의 '시간과 타자'를 읽고-




창밖으로 어슴푸레 여명이 비치자 앨리스는 결국 잠들기를 포기하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벌써 며칠 째 계속되는 불면증에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깨어 있어도 꿈속에 있는 듯 정신이 또렷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꿈과 현실 경계 어디쯤 있다고 생각되었다.
“째깍째깍째깍”
역시나, 저 시계 소리. 이제 곧 토끼가 나타나겠군.’
불면증이 시작되고 토끼가 나타나기 시작했는지 토끼를 본 뒤 불면증이 시작됐는지 선후를 알 수 없지만 어김없이 아침이면 시계 소리와 함께 토끼가 나타났다. 처음엔 꿈인 줄 알았지만 곧 그게 아니란 걸 알았다. 또 토끼에게분명한 자기 역할이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는 앨리스의 질문에 대답해 줄 유일한 존재였다.

“바쁘다 바빠.”
“지금은 언제죠?”
“지금은 어제야.”
“오늘은 언제 오죠?”
“그건 나도 몰라. 이런 늦겠군.”
토끼는 아침마다 반복되는 자신의 대사를 훌륭히 소화해내고 바삐 사라졌다.

토끼가 사라지고 잠시 멍하게 있던 앨리스는 침대에 걸터앉아 두 번째 할 일, 휴대폰으로 뉴스를 검색했다. 사회면을 찾아보는 그녀의 손길이 유독 떨렸다.
‘아닐 거야. 이번엔 다를 거야, 분명히.’
사회면 첫 번째 뉴스를 보는 순간 그녀는 숨이 멎는 듯했다. ‘10세 추정 아이, 길거리에서 굶어 죽다.’
아이의 얼굴 사진 아래로 10월 날씨에 맞지 않는 얇은 옷가지를 걸친 채 맨발이었다는 아이의 행색에 대한 설명과 발견 장소가 편의점 앞이었다는 것까지 기사 내용은 한 줄도 달라지지 않았다.
“도대체 왜? 왜 달라지지 않는 거지? 왜 그래도 굶어 죽는 거야! “
그녀가 짧은 탄식을 하며 마른 얼굴을 쓸어내리다 사진에서 한 가지 달라진 점을 발견했다.
CCTV 영상에 찍힌 모습에서 전과 다르게 아이 옆에 지폐 한 장이 놓여있었다. 그녀는 힘이 죽 빠져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마냥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또 수업시간에 늦을 수 없는 노릇이라 그녀는 서둘러 나갈 채비를 했다.
이번 학기에 철학 분야에서 세계적인 석학인 엠마누엘 레비나스 교수의 ‘시간과 타자’ 강의가 개설된다는 소문을 듣고 앨리스는 무척 기대했다. 어렵게 수강신청에 성공하고 첫 강의 날만 손꼽아 기다렸는데 무슨 영문인지 그녀는 아직까지 한 번도 수업시간에 들어가지 못했다. 아무리 일찍 출발해도 학교에 도착하면 항상 지각이었고 강의실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이번엔 기필코 제시간에 도착하겠다고 다짐을 하며 전날보다 20분 더 일찍 집을 나섰다.

버스 정류장이 가까워오자 그녀는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모퉁이에 편의점이 보인다. 이제 편의점 앞 계단에 앉아있는 그 아이가 보일 차례이다.
아이는 여전히 맨발이었다. 날씨가 꽤 쌀쌀해 거리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두툼한 외투를 걸치고 다니는데 아이는 비쩍 마른 몸을 겨우 가릴 만한 티셔츠 한 장에 낡아빠진 바지 차림이었다. 그녀가 큰 맘먹고 옆에 두고 온 오만 원은 어디로 가고 없었다. 얼굴을 보아하니 그 돈으로 허기를 달랜 것 같지도 않았다. 아이는 움직일 기력이 조금도 남아있지 않아 보였다. 주변을 살피지도 않고 그저 한껏 웅크리고 앉아 멍하니 앞을 보고 있었다.

그녀가 처음 아이를 보았을 때 아이의 행색에 너무 놀란 나머지 죽은 게 아닐까 생각되었다. 다행히 아이는 가끔씩 눈을 깜빡거려 살아있다는 걸 알려 주었는데 그녀와 한 번 눈이 마주친 뒤로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아  무척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그건 그녀가 살면서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눈길이었다. 스스로를 방어할 의지가 애초에 상실된 눈빛, 그건 곧 무력함 자체였다.
아이는 눈빛만으로 그녀에게 무언의 압박감을 주었다. 부담스러운 눈길에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곁눈질해보니 아이는 여전히 그녀를 응시하고 있어 심장이 덜컹했다. 마침 버스가 도착한 덕분에 곤란한 상황에서 빠져나오게 돼 그녀는 안도했다. 그때 앨리스는 일종의 공포심을 느꼈다.


다음 날 아침 여느 때처럼 그녀는 뉴스를 훑어보고 있었는데 우연히 아이의 죽음에 관한 기사를 발견하고 충격에 휩싸였다.
‘내가 본 그 아이가? 아! 그때 내가 뭐라도 도와줬더라면......’하는 죄책감이 그녀를 괴롭혔다.
그러나 불과 몇 십분 뒤 버스정류장 옆 편의점 앞에 똑같이 앉아 있는 아이를 발견했을 때 그녀가 받았을 충격을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그 뒤로 지금까지 그녀의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었다. 아침마다 오늘이 오지 않았다는 소식을 전하러 등장하는 토끼를 만나고 뉴스 기사에서 굶어 죽은 아이의 소식을 접하고 등굣길에 버젓이 살아있는 그 아이를 다시 만나게 된다. 그리고 여전히 수업시간에 지각이다.
이상한 것은 자신 외에는 그 아이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아이는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존재나 마찬가지였다. 아이는 죽어서야 자신의 존재를 알릴 수 있었다.
아이는 오직 그녀에게만 끊임없이 눈길을 보낼 뿐이다. 경찰에 신고도 해보고 아이 손에 먹을 것을 쥐어도 줘보고 돈도 줘봤지만 소용없었다. 그렇게 그녀가 망설이고 있으면 버스가 도착해 고통스러운 순간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늦으면 수업을 듣지 못한다는 이유가 매번 양심의 가책을 덜어주었다.

아이가 그녀를 발견하고 반응했다. 이번에는 그녀도 응시하는 눈빛을 피하지 않고 아이를 똑바로 바라보며 다가갔다.
“내가 준 돈은 어떡하고 이러고 있어? 밥이라도 사 먹고 신발이라도 사 신었어야지. 왜 이러고 있는 거야?”
그녀는 불쑥 화가 났다.
“내게도 그 돈은 큰돈이야. 큰 맘먹고 너에게 준 건데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잃어버릴 수가 있니? 그러면서 또 이렇게 나타나면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한참을 조용히 바라보던 아이가 말했다.
“난 너의 동정심을 바라지 않아.”
“뭐?”
“동정심을 바라지 않는다고. 나는 너에게 명령하는 존재야.”
“무엇을 말이야?”
“도움을.”
“왜 하필 나한테만 그래? 이렇게나 지나가는 사람들이 많은데.”
“모두에게는 각자의 ‘타자’가 존재하니까. 나는 너의 ‘타자’야.”
그 순간 그녀는 세상이 기우뚱해지며 박제되었던 그녀의 시간이 다시 천천히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꿈과 현실의 경계에 있던 그녀가 다시 현실세계로 들어온 것처럼 정말 오랜만에 그녀는 정신이 또렷해졌다.
“어떻게 도와주면 돼?”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줘.”
그녀는 자신의 신발을 벗어서 아이에게 신게 하고 편의점에서 슬리퍼를 구입했다. 자신의 외투를 아이에게 벗어주어도 신기하게도 하나도 춥지 않았다. 그녀는 아이를 이끌고 한 블록을 걸어가 마침 일찍 문을 연 어느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주문을 하고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앨리스는 자신이 걸치고 있는 의복이며 장신구들이 너무 번쩍거리고 날카로워서 아이를 다치게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괜찮아.”
아이는 그녀의 마음을 꿰뚫고 있었다.
“어차피 그건 네 것이 아니야.”
“무슨 말이야? 내가 갖고 있는 것들이 다 내 것이 아니란 말이야?”
“응. ‘타자의 몫’까지 가진 거니까.”
그제야 그녀는 이해가 되었다. 10살 남짓한 아이의 몸에 자신의 신발과 옷이 꼭 맞았던 것이.
아이는 오래 굶은 사람 같지 않게 천천히 음식들을 음미하며 식사시간을 즐겼다.

아이와 헤어지고 버스정류장으로 돌아왔을 때 한 시간 가까이 흐른 뒤였다. 수업은 이미 물 건너갔지만 왠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학교로 가는 버스를 탔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도착한 강의실 앞에서 그녀는 크게 숨을 한 번 고르고 문손잡이를 돌렸다. 철컥하는 소리를 예상했는데 스르륵 손잡이가 돌아가며 강의실 문이 열렸다. 강단에는 레비나스 교수가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어서 오게, 앨리스 학생. 이제 막 수업이 시작되려던 참이었어."
두근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자리를 잡고 앉아서 강의실을 둘러보았다. 칠판에 오늘 수업 주제가 적혀 있었다.
‘’ 타자‘의 등장으로 비로소 미래가 온다.’
그녀의 눈에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

“째깍째깍째깍”
익숙한 시계 소리에 눈을 떴다. 그녀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어제는 불면의 밤을 지새우지 않았던 것이다. 오늘은 토끼가 뭐라고 답을 할지 설레며 긴장되었다. 저기 토끼가 온다.

“바쁘다 바빠.”
“지금은 언제죠?”
“지금은 오늘이야.”
토끼는 여느 때보다 짧은 대사를 마치고 사라졌다.

앨리스는 서둘러 휴대폰으로 뉴스를 검색했다. 사회면 어디에도 굶어 죽은 아이 기사가 없었다.
등교 준비를 하는 앨리스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녀의 불면의 밤은 끝이 나고 마침내 ‘오늘’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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