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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유미 Jun 10. 2023

매력적인 말씨


얼마 전 아이와 비등하게 어쩌면 아이보다 더 거친 내 언사를 일부 까발린 글에 글 이웃인 노송님께서 달아주신 댓글을 읽다 깔깔 웃었다. 위트가 넘치는 이웃님께서 ‘말씨가 매력적일 것 같아요.’라고 달아놓으셨기 때문이다.

신이 공평하다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디 한 군데라도 숨겨놓은 매력이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스스로를 샅샅이 톺아보기를 사십 년이 넘었지만 수색은 여전히 진행단계에 머물러 있어 누구에게 매력적이다는 말을 들어보기는 처음이다. 어쩌다 보니 결혼까지 했지만 뭐, 남편이야 자기 손으로 덮어쓴 콩깍지니까 이제와 우는 소리 해도 소용없는 일이고.


내친김에 내 말씨가 어떤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오늘 누구라도 나와 함께 차 한 잔 나눌 만큼의 시간이라도 갖는다면 개그 소재로 하도 써먹어 너절하게 느껴지는 중년 아줌마의 전형을, 요즘 세련미 끝내주는 중년 아줌마들이 들으면 코웃음도 안 칠 일이지만, 아마도 볼 수 있을 것이다.(차는 제가 삽니다. 한 잔 하실 분~)


일단 경상도 사투리를 쓰기 때문에 기본값이 강하게 설정돼 있다. 거기다 목소리가 커서 식당에서 밥 먹을 때 종종 짜고 달다며 음식 품평을 혼잣말로 중얼거리면 아이에게 여지없이 목소리 낮추라는 지적을 받는다. 그렇다고 아이가 옆 빈 테이블을 흘깃거리는 건 일행이 아닌 척하고 싶은 무의식적 행동이라고 오해를 할 정도로 속이 좁지는 않다.


언젠가 아이가 ‘엄마는 난폭하고 폭력적이야.’라고 하길래 너한테만 그렇다고 응수한 일이 있는데 실상이 그러하다. 길가에 꽃도 아까워서 못 꺾으면서 아이 귀밑머리는 한 움큼 뽑을 작정으로 쥐어흔들기도 하고, 그마저 어느 날부터 아이가 미용실에서 구레나룻을 바리캉으로 밀고오기 시작하면서 그 재미도 잃게 되었지만, 또 표준몸무게로 치자면 저체중에 해당하는 몸으로 평생 어디 아픈 사람으로 오해를 사는 주제에 무모하게 씨름선수 같은 사춘기 남자 다리를 걷어 차댄다. 그래봤자 타격은 차는 사람이 더 크게 받을 뿐이지만 그 성질이라도 내야겠으니 어쩌겠는가.


이런 일도 있다. 혼자 쇼핑을 간 날, 물건을 고르는 중에 아이에게서 전화가 와서 잠시 통화를 했다. 통화가 끝나자 멀찍이 서있던 점원이 가까이 다가와서 하는 말이, 입 다물고 있을 때는 전혀 그렇게 안보이던데 말하는 거 들으니까 영락없이 아들 엄마라나. 굳이 사족을 붙이지 않더라도 사회적 통념상 ‘아들 엄마’가 어떤 이미지인지 알 수 있다. 그게 내 현재 모습이다.


언사가 거친 것은 효율적인 면에서, 특히 아들에게, 뛰어나다는 이유도 있다. 사전적 단어들로만 말을 하는 것보다 욕으로 방점을 찍어주는 것이 결과적으로 훨씬 내 에너지를 적게 쓰기 때문에 나날이 언사가 그 방향으로 진보하게 된 것이다.

지금이야 이런, 띠기럴을 추임새로 쓰고 시사팟캐스트의 사회자가 씨발!이라고 외칠 때 함께 입을 모으며 카타르시스를 느낄 정도로 사용 언어 범위가 넓어졌지만, 그런 시절이 있었나 싶게 까마득히 ‘미친 거 아니야’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욕일 때가 있었다.


원래부터 이래 생겨먹었냐면 전혀 아니올시다. 누구를 불편하게 하느니 내가 불편해 죽는 게 낫다고 여기는 쪽이어서 평생 얌전하다는 소리를 들었고 지금도 나를 향한 시어머님의 최고의 평가이기도 하다.

어딜 가나 병풍처럼 조용히 자리하다 닌자처럼 소리 없이 사라지기를 선호하던 사람이 왜 정체성을 바꿔 끼웠냐고 따져 묻는다면 거 왜, 영화에서 빌런의 서사를 거슬러 따라가다 보면 마냥 욕할 수가 없이 미운 정이 생기게 되지 않냐고, 그렇게 내 서사의 짠함을 알아달라고 읍소하고 싶다.

정말 이런 뻔한 말 하고 싶지 않지만 –예전에 모든 클리셰들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귀를 듣는 용도로 쓰지 않는 사람 둘과 오랜 기간 살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못 듣는 것 같으니 목소리를 키워야 되고 못 알아듣는 것 같으니 설명을 계속해서 길게 할 수밖에 없는 일상이 쌓이고 쌓여 급기야 한 사람의 인간성을 바꿔놓은 것이다. 일상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가.


더욱이 요즘엔 행동뿐만 아니라 생각도 비포장도로를 마구 달려댄다.


얼마 전 어느 작가의 글을 읽었는데 나이가 들수록 어렵고 힘든 환경에 처해있는, 특히 아이들의 이야기를 접하는 게 불편해서 잘 보지 않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한때 나도 인생에서 선량한 주인공이었을 때가 있었던지라 작가의 마음이 잘 이해가 되었다. 이제 나이 들며 점점 흑화 해가고 있는 주인공은 그런 소식에 화부터 난다.


아프리카 아이들이 오염된 식수를 울며 겨자 먹기로 먹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있다는, 동정심을 박박 긁으려는 의도를 굳이 숨기지도 않는 후원독려 광고를 보면 그 나라의 정치지도자들의 무능력과 뿌리 깊은 부패와 그런 역사를 쓰게 한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과 자기 입맛대로 그 나라를 씹어 먹고 뜯어먹은 근현대 강대국들에까지 욕을 한 바가지씩 퍼붓는다.


고작 열 살 남짓 아이가 아픈 엄마를 돌보며 집에 쌀이 없어 굶는다는 이야기 끝에 자기 소원이 엄마가 아프지 않은 거라는 내레이션을 깔며 아이 얼굴을 클로즈업할 때는 화면을 부숴버리고 싶어 진다. 어떤 무능해빠진 정부가 아이가 엄마를 돌보는 기막힌 역할전도 상황을 시민들이 도와줘야지 않겠냐며 뻔뻔하게 책임을 전가하는 걸까. 매일 밤 꿈을 갈아치우며 하고 싶은 일, 신나는 일을 상상하기만으로도 벅차고 아까울 나이에 누가 먹고살고 죽는 걱정을 하게 했을까. 띠기럴.

세상 모든 약자들은 복지 정책의 우산을 쓸 권리가 있다.


말하다 보니 흥분해서 글이 딴 길로 샜다. 잘 조리되어야 훌륭한 음식으로 쳐주겠지만 가끔 오늘처럼 거친 음식을 먹고 싶은 날이 있다. 이 글은 애써도 잘 다듬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아함은 꾸밀 수도 흉내 낼 수도 없고 자연히 배어 나온다는 한 인문학자의 말이 기억난다.

고상하게 늙기는 텄구먼.

그 인문학자가 매력에 대해서 정의를 하지 않은 것에 안도한다. 매력은 실로 무궁무진하다. 우리는 모두 매력적인 존재이다.

마흔 훌쩍 넘어 난폭하고 폭력적인 존재도 자신의 매력이 어딘가에 숨어 있을 거란 신념을 가슴속에 품고 살고 있으니, 보다 젊은 독자분들은 가만히 있어도 스스로 매력이 철철 넘치는 존재라는 너무 당연한 사실을 까먹지 말길 바란다.


먼 훗날 아이가 내 무덤 옆에 와서 엄마 손맛이 그립다고 울 리는 없고 엄마의 거친 언사를 그리워는 장면을 그려보니 좀 난처하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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