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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유미 Sep 20. 2023

마지막 내담자



마지막 내담자를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상담을 시작한 지 17년 째나는 오래된 내담자인 그는 그녀에게 꽤 골치 아픈 환자에 속한다. 자기 통제력이 부족해 소란을 일으키기도 하고 경미한 알콜성 기억상실증후군을 앓고 있어 우여곡절이 많은 환자이다. 그의 도착을 알리는 알림이 뜨고서야 그녀는 내내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오늘 완전 끝장났어.”


그는 여느 때와 똑같이 말문을 열었다. 그의 첫 문장은 토씨마저 매번 똑같은데 그 말처럼 일이 일어났다면 지금까지 남아날 직장이나 상사들은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약을 어느 정도 처방해야 할지 유심히 관찰했다. 오늘 그의 병상을 봤을 때 한 병 정도가 적절해 보였다. 그렇다고 그가 처방에 있어 상대방의 허락을 구한다는 뜻은 아니다. 이미 탁자 위에 C2H5OH 한 병과 잔이 그의 앞에 놓여있었다. 그녀는 일단 뇌세포의 흥분상태를 가라앉히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흥분하지 말고 천천히 말해봐.”

“어, 응.”


그가 순응하는 반응을 보이자 그녀는 오늘 야간진료가 길지는 않겠다는 다행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도로포장을 먼저 하고 나중에 관을 묻자는데 나 원 기가 막혀서.”

“위를 덮고 아래를 파는 그런 신기한 기술이 어딨어?”

“거봐! 이렇게 일반인도 상식적인 질문을 하는데 기술자라는 놈들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그런 귀신도 탄복할 공법을 개발하면 상 줘야 되는 거 아니야?”

“글치! 맞아.”


과일을 깎아 내주며 슬며시 살펴보니 위험단계에 있던 그의 표정이 정상수치에 들어오는 듯했다.


“게다가 일한 만큼 돈을 줘야지 서류에 맞춰 주겠다며 장난질을 치는데 뚜껑이 안 열리겠냐고.”

“개사기꾼이네.”

“어! 어! 그래.”

“왜 그렇게까지 발주처 비위를 맞추는 건데?”

“그러니까 말이야.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 일까지 그러니까 일이 안 돼.”

“도대체 어떤 배를 타고 있는 거야?”

“어?”

“다 같이 한 방향으로 노를 저어야 할 거 아냐. 한 사무실에서 각자 다른 배를 탄 것처럼 굴고 있으니 배가 산으로 가지.”

“그 말이 딱 맞아! 딱!”


그가 신바람을 내며 맞장구를 치는 걸로 보아 상담을 마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참, 오늘 축구하던데. 아시안게임 예선일걸?”

“어, 그래? 어디?”


그가 리모컨을 집어 들자 그녀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시간가량 걸린 상담이 그럭저럭 잘 마무리된 듯했다.


사실 그가 가끔 분을 못 참거나 필름이 끊기는 등의 행동을 보이는 건 표면문제에 그칠 뿐이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그의 직업윤리적 양심이 현실과 어긋나기 때문에 생기는 자괴감이다. 이타적 원칙주의자인 그는 각자도생이 판치는 현장에서 제 배 부르려고 남의 밥을 훔쳐 먹다 못해 그릇까지 깨부수는 행위를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녀는 긴 시간에 걸쳐 그의 고통을 이해했고 그의 양심좀 더 타협적인 회색지대로 옮겨보기 위해 무수히 노력했지만 그런 처방은 그때뿐이라 그를 이기적인 인간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정체성갈아 끼울 방법이 없으니 그녀에게 그는 실패한 환자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위한 야간진료를 계속할 수밖에 없는 건 그가 직장에서 꾸역꾸역 삼키다가 체한 말을 토할 수 있도록 등을 두드려 주는 것만이 그녀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치료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처방해 줄 수 있는 약 한 병과 더불어.

(솔직히 그녀는 이 탄소분자덩어리가 그의 마음을 진정시켜 주는 메커니즘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의 손에 들려 치워 지는 빈 병을 향해 그의 아쉬운 눈길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상담시간이 끝났다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을 받아들이며  순순히 잠을 청하러 갔다.


골치 아픈 내담자의 상담이 끝이 나고 그녀의 주방에도 불이 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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