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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유미 Sep 15. 2023

육퇴



나는 오늘 사춘기 아이에게 육퇴를 선언했다. 흔히 쓰듯이 육아퇴근의 줄임말로 써가 아니라 ‘육아은퇴’를 의미하는 말이었다.


올해 15살이 된 아이는 마치 때가 되었다는 듯이 지난겨울부터 자연스레 진화를 시작했다. 제6의 손가락, 스마트폰을 갖고 태어난다는 진화종 포노사피엔스로 탈바꿈을 꾀했다. 호모사피엔스에서 갈라져 나왔지만 두 종간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최재붕 교수는 스마트폰을 도구로 사용하는 인간과 신체의 일부로 인식하는 인간은 아예 다른 종으로 접근하는 편이 서로 이해하기가 낫다고 말할 정도이다.

호모사피엔스는 포노사피엔스 손에 하루 종일 들러붙어있는 도구를 빼앗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종종 느꼈고 그때마다 이 진화종은 손가락이 잘리는 듯한 공포와 분노를 느꼈다. 게다가 문제는 도구가 휴대폰뿐만이 아니어서 컴퓨터, 태블릿 PC, TV까지 골고루 돌려가며 쓰는 탓에 하나의 도구를 빼앗는 정도로는 눈도 깜빡하게 만들 수 없었다.


아이는 자신의 세상을 현실에서 점점 화면 속으로 옮겨갔고 그 속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실제 생활은 엉망이 되거나 텅 비어갔다. 과격한 언행이나 돌발행동을 해서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대신 전혀 말이 통하지 않았다. 번번이 약속들을 어겼고 한번 움직이게 하려면 입이 쓰도록 말을 해야 하거나 제지 따위를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에 내 컨트롤 타워가 고장 나 분노조절기능을 상실하기 일쑤였다. 특히 자신을 채워가야 할 때에 스스로를 빈 깡통으로 만드는 모습을 참아내기가 괴로웠다. 매일 저녁 게임 때문에 식탁에서 식고 있는 아이 저녁밥을 지켜보는 것도.


이제 아이는 질풍노도의 한가운데 들어섰다. 이때를 대비해 그간 얼마나 많은 전문가들의 강의를 찾아 듣고 남의 집 자식들을 타산지석을 삼으려고 노력했었던가. 나는 잘 싸울 준비가 되어있다고 순진한 착각을 했었다. 권법서를 달달 외웠다고 실전에서 내 주먹이 고수의 주먹이 되는 건 아닌데 말이다.

정작 우리 집 아이 차례가 오자 그간의 노력들은 무용지물이었다는 사실만 깨닫고 있는 요즘이다.


부서지고 고쳐 쓰기를 반복하던 내 컨트롤 타워가 얼마 전 아예 박살이 나고 말았다. 조절능력제어가 가장 안 된다는 사춘기적 특징을 어이없게도 내가 드러내보였다. 마구잡이로 쏟아지는 감정을 어쩌지 못해 누구에게랄 거 없이 거친 말을 퍼부었다. 난사하는 말 폭격을 피하려는 심정이었는지 지난 주말 남편이 아이를 데리고 둘이서만 여행을 다녀왔다. 홀로 남아 숨통이 트이자 머리에 붙은 불길이 차차 잦아들었다.

아이의 컨트롤타워에 큰 불이 나지 않기를 노심초사하다가 정작 내 전두엽이 끝장난 듯했다. 돌이켜보니 아이는 자신의 속도대로 잘 성장하고 있는데 오히려 역행하고 있는 것은 나 자신이 아닐까 하는 불안한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며칠 전 꿀꿀한 기분으로 들른 미용실에서 나눈 대화를 곱씹어보았다.


“아들이 사춘기를 심하게 겪고 있나 봐요?”

“딱 잘라 말하기가 애매한데 심각하게 문제행동을 하진 않아요.”

“대답은 잘해요?”

“완전 잘하죠. 대답만 하는 기계 같아요.”

“그럼 지극히 정상인데요. 잘하고 있어요.”


젊은 남성 미용사는 심지어 아이를 칭찬해 황당하기 그지없는 대화였다.


두 남자가 여행에서 돌아오고 다시 한 주가 시작되고 가급적 아이와 대면을 피하며 내 컨트롤타워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며칠간 시운전을 해보았다. 아이는 남편이 뭐라고 부추겼길래 마음을 고쳐먹은 건지 그간 스트레스의 원흉이었던 평일 밤 시간 게임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아이에게 휴대폰 사용과 게임시간에 관한 잔소리 못지않게 큰 불만 중 하나는 엄마가 자기 일을 웬만해선 거들어주지 않는 것과 심지어 집안일은 엄마 할 일이면서 배워야 한다는 명분으로 자기에게 자꾸 떠넘긴다는 것이다. 내게 있어 교육의 영역에 있는 일을 아이는 엄마의 직무유기라고 여기니 서로 입장차를 좀체 좁힐 수가 없어 집안일의 분담은 늘 분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내 컨트롤타워에서 오류가 나지 않는다는 확신이 든 오늘 아이에게 육아은퇴에 대해 말했다.


‘엄마는 그간 육아와 교육, 집안일을 전담해 왔다. 지난 10년은 전적으로 너에게 쏟은 시간이다. 특히 유치원 가기 전 4살까지 퇴근이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그 3년간의 노동 강도는 어떤 직종에 비해도 무척 센 편이었다. 그런 힘든 시기들을 잘 보내고 이제 네 손발로 네 일을 해결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으니 엄마는 남들보다 조금 일찍 은퇴를 하고자 한다. 쉽지 않겠지만 앞으로도 지금처럼 네 할 일은 알아서 잘해주리라 믿는다.’


대략 이런 맥락으로 차분히 이야기하자 아이가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요즘 잘해? 똑같이 하는데?”


나 혼자 북 치고 장구치고 불내고 불 끄고 생난리를 피웠구나. 역행하는 자는 나 자신이었다는 진실을 직면하고 조금 비참한 기분마저 들었다.


아무도, 물론 남편조차도 몰라주는 사춘기 아이 육아은퇴를 하는 나에게 스스로 상을 주고 싶다.


감사패

최민기의 모 하유미

[귀하는 15년간 맡은 바 육아직무를 성실히 수행하였기에 그 공로를 인정하여 감사패를 수여합니다. 특히 신입초기 만 3년간 퇴근이 없는 24시간 근무라는 극악무도한 노동환경에서도 불평 한 번 없이 묵묵히 맡은 바 소임을 해낸 것에 크게 칭찬합니다. 제 손으로 씻고 먹고 공부할 수 있도록 하나의 인격체를 키워내는 어려운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목표한 성과를 이루어 낸 것을 축하드립니다. 이제 귀하에게는 떠날 준비를 하는 손님을 배웅하는 일만 남았음을 알려드립니다. 모쪼록 귀빈께서 자신의 길을 잘 떠나실 수 있도록 귀하께서는 흔들림 없는 사랑과 큰 격려와 지지를 보내주시길 당부드립니다.]


진정한 휴식과 자유시간은 은퇴 후에 가질 수 있는 법이다. 그러니 은퇴에 임박해 추가 업무가 발생하지 않도록 매 순간 내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해치워야 하겠다. 지금 내가 할 일은 컨트롤타워가 박살이 나도록 싸우거나 돌볼 것이 전혀 없는 아이를 살피는 것이 아니라 중년의 삶으로 깊이 들어가고 있는 나 자신을 돌봐야 하는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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