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집에는 세 사람이 산다.
AM 6:30 여자가 일어난다. 여자는 거실로 나와 가장 먼저 수족관에 불을 켜고 물고기 밥을 준다. 창문 블라인드를 열어젖히고 욕실에 들어갔다 나온다. 주방에서 잠시 머물다 큰 남자를 깨우러 간다.
AM 7:00 큰 남자가 일어난다. 큰 남자의 행동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간결하다. 매일 반복된다. 욕실과 옷 방을 차례로 이용하고 텀블러를 챙긴다.
AM 7:30 여자가 작은 남자를 깨운다. 먼저 일어난 두 사람과는 다르게 작은 남자는 여러 번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가 일어난다.
AM 9:00 큰 남자, 작은 남자, 여자까지 차례로 나가고 집이 빈다. 이제 내가 아침을 점검하는 시간이다. 여자는 대게 1시간 만에 돌아오기 때문에 신속 정확하게 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체크 목록은 환기, 채광, 먼지이다.
오늘 환기 항목은 ‘주의’이다. 창문을 활짝 열어 밤새 갇혀있던 공기를 내보낸 것 까지는 좋았는데 여자가 외출하면서 창문을 열어둔 채 그대로 나갔다. 여자는 가끔 오후 늦게 돌아오기도 한다. 더구나 오늘 오후에는 비가 예고돼 있다. 언젠가처럼 마루가 물바다가 되는 일이 발생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두 번째 항목 채광은 ‘좋음’이다. 오후 4시가 되면 햇빛이 강렬하게 쏟아져 들어오기 때문에 블라인드를 밖으로 45도 돌려놓아야 한다. 다행인지 오늘은 날씨가 흐려서 지금처럼 계속 활짝 젖혀놓아도 문제가 없을 듯하다.
세 번째 먼지 항목은 ‘경고’이다. 여자가 걸레질을 하지 않은지 3주째다. 거실 장식장, TV 대, 소파 밑에는 벌써부터 먼지 뭉치가 굴러다니고 있다. 뭉치들이 날마다 더 커지고 있는 걸 여자는 모르는 것 같다. 오늘은 하루 종일 공기청정기에 먼지 경고등을 시뻘겋게 켜 둬야겠다.
대충 오전 점검이 끝났다. 그럭저럭 양호한 편이다. 혹시 비가 오거나 여자가 오후 늦게 돌아올까 봐 불안한 것만 빼면.
PM 3:00 정말 부주의한 여자다! 우려했던 일은 모두 다 일어났다. 비는 쏟아지고 있는데 여자가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는 바람에 마루가 흠뻑 젖고 있다. 나무 바닥으로 물이 스며들어 축축하다. 잘 말려주지 않으면 썩어 들어갈 텐데...... 그런데 창가 쪽만 문제인 게 아니다. 여자도 없는데 작은 남자가 돌아왔다.
내가 좋아하는 세 사람의 복귀 순서는 여자, 작은 남자, 큰 남자 순이다. 큰 남자, 작은 남자, 여자 순도 나쁘지 않다. 가장 좋지 않은 경우는 셋 중 작은 남자가 가장 먼저 돌아왔을 때인데 오늘이 그런 최악의 경우이다. 작은 남자는 손에 들고 있는 우산이 무색하게 왕창 젖어왔다. 장화 안에 물을 담아 와서 (젖은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물을 담아온 것이다.) 현관도 홍수 사태가 났다. 물이 줄줄 흐르는 옷가지들을 욕실 앞에다 벗어 둔 바람에 그쪽 마루도 젖고 있다.
씻고 나온 작은 남자가 돌아다닌다. 손에 들고 있는 타월이 무색하게 디딛는 발걸음마다 물자국이 찍힌다. 너무나 불안하다. 갑자기 작은 남자를 처음 만난 날이 떠오른다. 그때는 아직 걷지 못하고 기어 다닐 때였다. 이사 온 바로 다음날, 짐 정리도 다되지 않은 거실 한복판에 밀가루를 쏟아붓고 작은 남자는 그 위에서 뒹굴었다. 마룻장 틈새마다 하얗게 끼이는 가루들. 그때 내가 받은 충격은 트라우마처럼 남아있다. 그날 이후로 작은 남자는 당연히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그 뒤로도 작은 남자는 온갖 다양한 것들을 마루에 쏟고 뒹굴어서 내 신경을 곤두세웠다.
PM 4:00 마침내 여자가 돌아왔다. 괘씸한 생각에 전에처럼 여자를 한 번 놀라게 해줄까 하는 고약한 마음이 들었다. 몇 년 전에 큰 지진이 난 후로 여자는 멀쩡히 잘 있다가도 집이 흔들리는 것 같다며 한동안 호들갑을 떨었다. 한 번은 그 냥 조 금 놀려주고 싶어서 살 짝 바닥을 흔들어 봤는데 여자가 너무 요란스레 놀라는 바람에 미안한 적이 있었다. 그날처럼 혼쭐을 내줄까 싶었지만 다행히 여자가 재빨리 집 상황을 파악하고 수습하고 있기 때문에 화난 마음을 가라앉히기로 했다.
PM 5:00 집은 원상복구가 됐다.
지금부터 서너 시간 동안은 하루 중 가장 활기찬 시간이다. 집안 가득 음식 냄새가 가득하고 TV 소리, 음악소리, 대화 소리로 집이 시끌벅적하다. 여자가 함께 있기 때문에 작은 남자에 대한 경계심도 한결 풀어진다.
여자는 가끔 작은 남자를 주방으로 불러서 같이 요리를 할 때도 있는데 다행히 바쁜지 오늘은 그런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는다. 작은 남자가 주방에 있는 날에는 당연히 계란은 바닥에서 깨지고, 깨는 쏟기고, 두부 조각은 밟혀 으깨지고, 꿀병은 넘어져 마루가 온통 끈적끈적한 걸로 뒤덮이고...... 등등. 여자가 지쳐서 그만 나가라고 할 때까지 온갖 만행을 계속 저질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