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시청 앞에 있는 디케상은 눈을 가리지 않고 있다. 한 손에는 저울을 다른 손에는 칼을 든 전사의 모습으로 광장 한가운데서 의회 건물을 바라보고 서있다. 시민의 눈으로 의회가 공정하고 정당하게 일을 해나가는지 지켜보겠다는 의미이다.
우리나라 대법원 앞의 디케상도 눈을 가리지 않았는데 한 손에 칼 대신 법전을 든 점이 다르다. 또 두루마기를 걸친 온화한 표정의 그 상은 법원이 아니라 시민들을 향해 서있다.
몰랐었는데 대법원 디케상을 두고 왈가왈부 말들이 많단다. 우리나라 사법계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상이라나. 가리지 않은 두 눈은 누구보다 빠르게 누구의 눈치를 보기 위한 것이니 제발 동상이라도 눈을 가리자는 원성이 우스갯소리처럼 자자하단다.
법전을 들고 시민들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대법원 디케상은 어딘가 훈장님을 연상시킨다. 우매한 시민들을 법이라는 잣대로 가르치고 제재하려고 드는. 늘어뜨린 두루마기 자락 속 어딘가 회초리를 숨겨놓았을 듯한 분위기이다.
법은 정의를 첫 줄에 못 박았지만 아주 자주 특권층을 위해 사용된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정의라는 명목하에 만들어진 그 책은 너무나 세세하고 두툼해서 일반 시민은 읽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게 만들어놓았다.
게다가 그 책은 두 가지 버전으로 존재한다. 오늘날 디케는 눈을 크게 뜨고 법전을 읽으러 온 이를 구분해 낸 뒤 누군가에게는 요리조리 빠져나갈 구멍이 성긴 버전을, 누구에게는 촘촘하게 옭아매어 바늘 한 군데 꽂을 수 없을 것 같은 버전을 펼쳐 보인다.
나는 독일 디케상이 마음에 든다. 요물처럼 변신해 대는 법전이 아니라 칼을 든 것도 좋지만 바라보고 서있는 방향이 전하는 메시지가 좋다. 민주공화정의 궁극적인 힘은 시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는 엄중한 메시지.
고대의 정의는 복수에서 시작됐다. 원초적이면서 말초적인 복수의 상징물인 칼을 들고 죄지은 자 누구라도 공평하게 응징해 줄 것 같은 디케상을 직접 보고 싶어 지게 만드는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