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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유미 Oct 24. 2023

고리오 영감



그가 눈에 띄기 시작한 건 며칠 전부터이다.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그는 잘 보려고 하면 오히려 사라져 버리는 비문증처럼 내 주위를 희미하게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저만치 앞에서 골목길 모퉁이를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을 볼 때도 있었고 어느 날은 계산을 하고 나오는 과일가게 앞에서 스치기고 어떨 땐 횡단보도를 건너오는 맞은편 인파 속에서 그를 발견하기도 했다.

하루는 집 앞마당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지나가는 그를 마침내 붙들었다.


“저기, 무슨 사연이 있어서 이리 맴도시는 겁니까?”


스스로를 잉여인간이라고 칭하는 이가 대답했다.


“오데사로 가는 길을 찾고 있소. 혹시 아시오?”

“거기가 어딘지 모르지만 무엇 때문에 거길 가려고 하시는데요?”

“전분 때문이오. 내 거기서 전분을 만들어 수입하기만 하면 수백만 프랑쯤 버는 건 떼놓은 당상이오.”


오데사니 전분이니 늘어놓는 소리를 들어보니 온전한 정신이 아닌 듯했다.

가까이서 보니 그는 생각보다 나이가 든 노인이었다. 백발이 성성하고 짓무른 눈가에는 주름이 깊게 패었다. 남루한 행색에 절박한 얼굴을 보니 짠한 마음이 절로 들었다. 길을 잃은 노인이 분명한데 애타게 찾고 있을 가족에게 얼른 연락을 해야겠다 싶었다. 또다시 어디로 사라질까봐 그를 마당 벤치에 앉히고 차를 한잔 내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등에 메고 있는 건 뭡니까?”


스스로를 부성의 그리스도라 칭하는 이가 대답했다.


“아, 그것이 눈에 보이오? 십자가요. 내 딸들은 평생토록 보지 못한 것을 어떻게 당신은 알아본단 말이오?”

“그 무거운 걸 왜 메고 다니십니까? 잠시라도 내려놓으세요.”

“이건 사형집행인이 내게 지운 것이오. 딸들의 탐욕이 커갈수록 십자가는 더욱 무거워진다오. 거기다 견뎌내야 할 내 몫의 경멸과 모욕의 무게까지 더 얹어졌소. 양쪽 어깨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무게를 견디지 못해 등은 휘어버렸지. 딸들에게 헌신한 대가로 받은 저주요. 아, 아니오. 내가 정신이 나갔구먼. 무슨 말을 하는 게야. 딸들은 내 천사, 하느님이고 말고. 그 애들을 위해서라면 이까짓 짐이야 깃털보다 가볍다오.”


확실히 노인의 정신은 오락가락해 보였다. 가족들에게 한시바삐 인수인계할 필요가 있었다.

노인의 목에 메달이 걸려있는 게 보였다. 거기에 혹시 연락처가 적혀 있을지도 몰랐다.


“목에 걸고 있는 메달 안에 무엇이 있나요?”


스스로를 이 프랑짜리 왕자의 삶이라 칭하는 이가 대답했다.


“한번 보시려나?”


그가 목에서 빼내 열어 보여 준 메달 안에는 어린아이의 것처럼 보이는 보드라운 머리카락이 들어있었다. 머리카락을 담아 목에 걸고 다니는 노인이라니...... 어쩌면 병원에 먼저 연락을 취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와중에 메달 겉 한쪽에 아나스타지라고 적혀 있는 것이 보였다. 다른 쪽엔 델핀이라 적힌 걸로 보아 아까부터 얘기하는 두 딸의 이름인 듯했다. 그렇다면 노인의 말이 완전 허언인 것은 아닌 셈이다.


“딸들에게 연락할 방법이 없나요?”


스스로를 슬픔을 삼킨 자라 칭하는 이가 대답했다.


“연락할 수도 없거니와 내가 곧 죽는다고 한들 오지 않을 것이오.”


그리고 그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한 번 닫힌 입은 그의 말마따나 슬픔으로 막혀버린 것인지 어떤 말에도 다시 열릴 줄 몰랐다.

그의 가족에게 연락할 방법을 찾지 못해 곤란에 빠져 있을 때 경찰이 나타났다.


“아니, 영감님. 여기 있으면 어떡합니까! 한참 찾았잖아요.”


그는 자기를 알아보는 경찰을 보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신은 점점 더 먼데로 가는 듯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어휴, 보호해 주셔서 다행입니다. 까딱하다간 오데사까지 찾으러 갈 뻔했지 뭡니까.”


젊은 경찰은 행방불명자를 찾아 안도해서인지 말끝에 농담을 흘렸다.


“사정을 아는 분인가 봐요?”

“네. 저기 보케 양로원에 사는 노인인데 틈만 나면 몰래 밖으로 빠져나와서 골치가 아파 죽겠어요. 노인주제에 탈출솜씨가 아주 귀신같단 말이죠.”

“딸들이 있나 보던데 연락할 방법이 없나요?”

“어딘가 있긴 있겠죠. 보케 양로원에 두 딸이 직접 데려왔다고 하니깐. 그 뒤로 누구도 본 적이 없어요. 들리는 이야기로는 저 영감이 젊었을 때 엄청난 부자였다고 하더라고요. 무슨 국수사업을 했다나. 고리오 영감이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대요."

"하여튼 어마어마하게 돈이 많았는데 아내가 일찍 죽는 바람에 딸 둘한테만 목을 매고 키웠대요. 나중에 둘이 시집갈 때 전 재산을 헐어 상속을 해주지만 않았어도 저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텐데...... 자기는 두 딸 집을 오가며 대접받을 줄 알았겠죠. 그런데 첫째 딸은 바람이 나 빚까지 지고 둘째 딸은 웬 사기꾼 놈에게 시집을 갔던지 무일푼이 됐대요. 딸들에게 버림받은 걸로 모자라 병까지 걸려 겨우 죽다 살아났는데 믿었던 딸들에게 배신당했다는 것뿐만 아니라  자식들의 불행한 처지까지 알게 되자 충격이 컸던지 그만 정신이 돌아버린 거예요.”


경청해 주는 사람이 있어 말할 맛이 났던지 경찰은 입맛까지 다셔가며 노인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제가 아는 사람이 보케 양로원에서 일하는데 말이죠, 작년 겨울에 영감상태가 영 좋지 않았대요. 양로원 쪽에서 어째 어째 힘들게 작은 딸에게 연락이 닿은 모양이에요. 전화로 영감상태를 알리려니까 그 악랄한 자식이 뭐라고 한지 아세요? 글쎄, 자기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말라는 겁니다. 아버지의 안부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듣지 않겠다고 했대요. 그게 자식이 아니, 사람이 할 소립니까? 그 요양보호사가 저한테 그러더군요. ‘세련되게 아버지를 죽이는 딸’이라고 말입니다. 불쌍한 영감이에요.”


경찰은 더 털어낼 이야기가 없어지자 빠트린 이삿짐을 챙겨가듯이 그를 데리고 사라졌다.


노인이 앉아있던 벤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거기에 그가 고 간 회초리꽃 한 송이가 놓여있었다.


[다시 회초리를 들어 사는 게 왜 그 모양이냐고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피가 나도록 제 종아리를 때려주세요

간절히 소리쳐도 어머니는 보이지 않는다]


-정호승 회초리꽃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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