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두 번째 지혜 학부모 학교가 열렸다. 오전부터 오후까지 이어진 학교 울력으로 온몸이 쑤시는데, 저녁까지 배부르게 먹고 델포이(강당)에 앉아 있으니 강의 시작 전부터 졸음이 쏟아졌다.
이번 강의는 철학자 김상봉 님의 ‘시민과 거류민과 씨알’이란 주제로 진행되었다.
강의 초반 선생님의 열강과 별개로 나 홀로 졸음과의 사투를 벌였다. 지금 우리는...지도 없는 낯선...길에...각자의 세계에...고립...세계와 세계를...잇는...새로운 길...길...... 눈을 반쯤 감은 채 선생님의 목소리를 따라 길을 헤매고 있을 때 귀로 사정없이 회초리가 날아들어 눈이 번쩍 뜨였다.
“이 사회는 희망이 없습니다. 지금 젊은 세대는 생존공포에 질식된 생존노예로 전락했습니다.”
낮에 흘린 땀이 식은 탓일까, 등골이 서늘했다.
“공정과 정의만으로는 침몰하는 공동체를 구할 수가 없습니다. 공정과 정의, 그건 자신이 부당하게 손해 보기 싫다는 거류민의 마음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거류민에게는 책임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시민은 없고 오직 거류민들만 넘쳐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시민국가의 종말입니다.”
“노동력의 재사용을 위해서만 임금을 지불하는 자본사회, 살아서 내일 일터로 나올 수 있는 노동력을 유지하는 데만 관심을 갖는 사회입니다. 극단적으로 반인간적이고 반생명적인 행태이지요.”
잠이 확 달아났다.
존롤즈가 말하는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이해하기 위해 발버둥을 쳤던 두 달이란 시간이 한순간에 분리수거장에 버려지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공들여봤자 낡고 철 지난 옷가지는 수거함행이 최선이라고 못을 박는 듯했다.
졸지에 지도 없는 낯선 길에 들어선 인류가 돼버린 우리에게 지난 시대의 도구로는 한발 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말씀이었다.
그럼 난 뭐 하러 소용없는 낡은 담론을 한 자 한 자 뜯어먹는데 시간을 쏟고 있는 걸까 맥이 빠졌다.
그리고 왜 정의론을 읽을 때면 자꾸 속이 부글거리는 건지 궁금함이 도졌다.
“한국은 역사적으로 정치적 민주화에는 성공했지만 경제적 민주화는 실패했습니다. 형식적 민주주의 껍데기만 남고 실질적 계급사회로 진입해 버린 것입니다.”
저거다, 실질적 계급사회. 그동안 배배 꼬였던 속이 뻥 뚫렸다.
지금 내 발은 분명한 계급 위에 있는 게 확실한데 평등한 자유가 가능한 것처럼 책에서 온갖 공학적 논리를 지어내는 것이 어설픈 소리 같았다.
어제 정의론 10절에서 이와 연관된 구절을 읽었다.
‘형식적 정의만 있어도 대단한 부정의는 존재할 수가 없다.’
‘형식적 정의나 체제에의 복종을 어느 정도 강력히 주장할 수 있는지는 그 제도의 실질적 정의나 그 개혁 가능성에 달려있다’
알고 보면 형식적 정의의 탈을 갖춰 쓴 실질적 정의의 부재가 더 위험한 것 아닐까?
형식적 정의를 정치적 민주주의로, 실질적 정의를 경제적 민주주의로 바꿔 읽으면 이런 질문으로 바뀐다.
정치적 민주주의의 탈을 갖춰 쓴 경제적 민주주의의 부재가 더 위험한 것 아닐까?
대놓고 성질 나쁜 사람과 겉과 속이 다른 사람 중 누가 더 위험한가. 전자는 대놓고 욕을 먹기 때문에 겁낼 필요가 없다. 후자는 은밀히 일을 꾸미는데 능하기 때문에 쥐도 새도 모르게 당할 수 있다. 과연 누가 더 위험한가.
투표장에서만 자유시민일 뿐 일상에서는 임금노예로 살아가는 현대인이 고대 노예들보다 진정으로 자유롭다 할 수 있을까.
그나마 고대, 중세 사람들은 공동체에 속해 안정된 소속감이라도 가질 수 있었다. 지금 현대 사회에서 개인은 모래알을 넘어서 원자화까지 파편화돼 고립된 상태에 놓여있다.
이제 강의는 말미로 이어졌다.
“새로운 주체는 시민이 아니라 씨알이어야 합니다. 씨알이란 전체의 뜻을 자기 속에 품어 사명감을 가진 적극적인 주체를 말합니다. 씨알들이 모여 개방하는 새로운 세계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게 이 시대에 필요한 교육입니다. 시민교육, 공동체적 덕성교육은 끝났습니다. 구한말의 교육운동과 같은 마음으로 씨알을 길러내는 교육을 해야 합니다.”
이 대목에서 교장선생님이 눈물을 훔쳤다. 항상 아이들을 보듬어야 하는 입장에서 지혜학교에 뿌리를 내리고 생활하고 있는 백여 명의 아이들, 나아가 이 시대의 상처받은 수많은 아이들을 떠올렸으리라 짐작된다. 새로운 세상을 열 씨알들을 길러내야 하는 교육자로서의 무게감을 생각하니 덩달아 숙연해졌다.
원래 철학자들이란 친절하게 말하는 법을 모르는 이들이다. 시대를 통찰하는 날카로움으로 휘두들기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다. 그 대상은 자신일 수도, 타인일 수도 혹은 세계일 수도 있다. 오늘은 내가 그 상대가 되어 두 시간이 넘도록 얻어맞았더니 정신이 혼미하다.
철학자들의 말은 늘 따끔하고 그 깊이는 잘 못 빠지면 살아 나오지 못할 정도로 깊다.
희망만큼이나 절망을 이야기하는 것이 그들의 생리이다. 절망을 직시해야 창조가 일어나고 새로운 길이 열린다. 그러니 그들이 절망을 부르짖을 때 그것이 얼마나 간절한 희망의 언어인지 이해해야 한다.
영성은 사전적 의미로 고귀하고 높고 선한 것을 추구하는 삶의 실제이다.
김상봉 선생님은 그것을 세계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받아들이는 정신의 능력이라고 설명하셨다.
지금 세상에는 영성적 인간은커녕 자신의 고통조차도 무시하며 살아내기에 급급한 젊은이들이 많다. 생존에의 공포는 무기력함을 안기고 아픔에 무감각해지면 결국 큰 병이 난다. 우울증을 앓는 사회가 된 이유이다.
최소한의 양심이라도 있는 거류민이 되기 위해 공정과 정의를 이해해보려고 가랑이가 찢어지는 입장에서 영성이라는 거대담론을 다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내 아이가 새로운 길을 여는데 하나의 씨알이 되어 함께하는 역할로 자라면 좋겠지만 지금 내 아이에게 솔직하게 하고 싶은 부탁은 따로 있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고 살길.
‘자아의 경계는 고통의 경계와 같다. 자신의 피부가 자기가 느끼는 고통의 경계인 사람에게는, 자신의 신체가 곧 자아의 전부이다. 그러나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낄 때, 내가 느끼는 고통의 범위가 확장되는 만큼 나의 자아도 확장된다.’(영성 없는 진보-김상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