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출의 기억
카페 사장님과 한창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손님 두 명이 들어왔다. 시각 정보를 처리하던 뇌가 잠깐 버퍼링이 걸렸다. 몇 초 후에야 그들이 카페 손님이 아니라 내 손님이란 걸 알아차렸다.
아침에 눈을 뜨니 밤새 소동은 마치 없었던 일인 듯했다. 카톡에는 어머님께서 하루에도 몇 번씩 보내는 좋은 말씀이 세 통이나 들어와 있고 숙소에 있는 남편으로부터 밤에 휴대폰을 진동으로 해놓고 잠들어서 전화소리를 못 들었다며 오늘 저녁에는 집으로 퇴근한다는 전달사항이 도착해 있었다. 모두가 다시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간 아침에 비딱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 다들 괜찮아?’
앱을 열어 시외버스터미널의 시간표를 확인했다.
경주행 버스가 고속도로를 달리자 집을 떠났다는 게 실감 났다. 숙소를 예약할 때만 해도 반반이었던 마음이 길을 따라 점점 경주로 향했다. 친구와 단둘이 떠났던 여행지의 기억이 하나 둘 살아났다.
숙소에 도착해 가방을 던져두고 그대로 웅크려 잠이 들었다. 지난밤 술에 취해 연락이 두절된 남편을 온 가족이 찾아 나섰던 소란했던 생각이 가라앉으며 까무룩 잠에 빠졌다. 한 시간쯤 잤을까, 휴대폰 전원을 꺼버려서 시간 확인이 되지 않았다. 내일 집에 돌아갈 때까지 휴대폰을 켜지 않을 계획이다.
밖은 비가 잦아들었고 거리를 걷다 보니 해가 비쳤다. 저녁을 해결하려 가게들을 기웃거리다 금관총 입구에 있는 갤러리 겸 기념품 판매점이 눈에 띄었다. 들어가 구경을 하다가 사장님의 안내로 뒤편 건물의 전시회까지 둘러보게 되었다. 한산한 가게에 홀로 온 객이 작품을 요모조모 들여다보는데 신이 났던 주인은 작품 하나하나마다 설명을 아끼지 않았다.
긴 시간 특별한 경험을 선사해 준 것도 모자라 달랑 엽서 두 장 사는 손에게 선물로 덤까지 주며 보내는 주인장의 인정에 단단히 꼬였던 마음이 살며시 풀리는 기분이었다.
근처에서 간단히 저녁을 먹고 커피를 마실 곳을 찾았다. 번화한 대로를 살짝 벗어난 골목 안쪽에 갤러리 카페가 보였다. 자연스레 발길이 그쪽을 향했다.
안쪽은 창밖에서 볼 때보다 공간이 넓어 마치 전시장 한가운데서 커피를 마시는 기분을 낼 수 있었다. 다양한 화풍의 그림이 벽면을 채우고 있었다. 커피는 뒷전이고 이리저리 다니며 구경을 하고 있으니까 사장님이 다가와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보라며 말을 걸었다.
“각각 다른 작가의 작품인가요?”
“아니요, 다 제가 그렸어요.”
“네에?!”
그때부터 그림주인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작가가 직접 진행하는 개인 도슨트라니, 너무 영광이라 살짝 소름이 돋았던 관람객은 작품을 다 둘러본 뒤에 흥분한 탓인지 마음이 열려버린 탓인지 자신이 경주여행을 홀로 오게 된 사정을 털어놓고 있는 참이었다. 남편과 동생이 가게로 들어왔을 때.
데리러 왔다는 남편에게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내일 천마총에 가볼 거야.”
친구랑 갔었던 곳인 걸 남편이 모를 리 없다. 남편은 돌아가고 동생이 남기로 했다.
“어떻게 찾았어? 휴대폰도 끄고 일부러 체크카드만 썼는데.”
“도망자들이 왜 현금만 쓰겠어. 내역을 다 볼 수가 있는데. 형부가 은행계좌 비밀번호를 알던데 뭐.”
“용의주도하게 계산했는데.”
“언니는 가출마저 코미디야.”
울다 웃다 하는 나를 바라보는 동생의 시선이 맥주잔 너머로 느껴졌다.
“경주인 거 알고 형부가 그러더라. 예전에...... 언니 친구랑 갔었던 데라고.”
그 말에 다시 칵테일 잔이 뿌옇게 흐려졌다.
“낮에 사람이 사라져도 이렇게 걱정이 되는데 언니가 오죽하면 집을 나갔겠냐고 형부한테 잔소리했어.”
편들어주는 동생이 든든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함께 천마총을 구경하고 공원을 걸어준 동생이 있어 덜 외로웠다. 혼자 이곳을 걸었다면 뙤약볕아래서 또 나만 서늘해졌을지도 모른다.
집에 돌아가 남편이 차려준 저녁을 먹었다. 남편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고 나는 다시 일상 속 제자리로 돌아왔다.
예전에 친구가 집을 나와 며칠 차박을 감행해 거기로 놀러 갔던 기억이 났다. 그때 ‘다음에 너 가출하고 싶으면 나한테 와.’라고 했었던 멋진 친구가 이제 내가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어서 삶의 한 곳이 움푹 파였다. 거기에 걸려 아직도 한 번씩 넘어지는 중이다.
우여곡절 일탈이었지만 와중에 뜻하지 않게 숨겨진 보물을 찾았다. 카페 사장님의 10월에 열릴 전시회에 초대를 받고, 언제든 이야기보따리를 풀어줄 테니 경주에 오면 들르라는 갤러리 사장님을 알게 되었다.
작별할 새 없이 들이닥친 이별로 혼자 남겨진 친구가 눈에 밟혀 경주까지 데려와 만나게 해 준 인연이라는 생각에 파인 마음에 그리움이 고인다. 언제든 그리운 곳일 테다 경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