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어머니께서 돌아가셔서 장례식장에 갔다. 몇 년씩 못 봤던 반가운 얼굴도 보여 장소가 무색하게 화기애애했다. 돌아올 때 집이 같은 방향인 친구 세 명이 한 차를 타고 왔다. 뒷좌석에 앉은 나는 앞의 두 명이 나누는 말소리가 간간이 끊어지며 들렸다. 대충 학교 다닐 때 이야기를 나누는 눈치였다. 한 명을 언급하면 또 다른 누군가가 콩 줄기처럼 달려 나오는 식의 이야기는 주렁주렁 이어졌다. 마치 어제까지도 등교를 했던 사람처럼 생생하게 기억하는 친구를 마냥 신기해하며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내가 엮여 나가는 바람에 어벙해졌다.
“뭐라고?”
“너는 그때 사귀었던 애 생각 안 나냐고.”
얼마 전 가출지에서 전혀 생각지 못했던 남편과 동생을 만났을 때 시각 정보를 처리하는 뇌가 버퍼링이 걸리는 걸 경험했는데, 차 안에서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이번엔 뇌가 청각 정보를 처리하며 버벅대서 저 말뜻을 해석하는데 시간이 잠깐 걸렸다.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왜 한 번씩 그립지 않아?”
“그래? 주변에서 그렇게 말하는 여자를 본 적 있어?”
독신 남자의 독특한 무드가 아닐까 내심 넘겨짚었다.
“있는데.”
“희한하네. 내 주변엔 한 명도 없는데.”
대상을 바꿔 조수석에 앉은 애 둘 아빠에게 물어봤다.
“너도 그래?”
“꼭 상대가 그립다기보다 그 시절이 생각나지. 술 한 잔 하면서 한창 젊었던 시절을 떠올리면 아쉬워서 눈물도 나고. 넌 안 그래?”
“그런 일로는 눈물이 전혀 안 나.”
“야, 너 T야? 확실하네.”
아쉽게도 난 F이다. 그래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의외로 잘 운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손흥민 선수의 PL 고별전 영상을 찾아보며 내내 울었다. 가끔씩 남보다 못한 남편이 서운해서 울고, 차마 남처럼 여기지 못하는 아이를 향한 애타는 마음이 눈물로 쏟아지기도 한다. 지난겨울 국회의사당을 마주 보고 울었고, 눈을 덮어쓴 키세스단 사진을 보며 울었다.
단지 그런 쪽, 두 친구가 말하는 추억이나 낭만을 곱씹어서는 눈물을 한 방울도 만들어내지 못할 뿐이다.
“넌 현재가 만족스러운가 보다.”
“그런가......”
그렇다고 두 친구가 현재를 도피해서 과거로 가는 것은 아닐 테다. 그들에게 젊은 시절은 현실에 지쳤을 때 잠시 가서 쉴 수 있는 쉼터 같은 곳일 것이다.
내게 쉼터는 어떤 곳일까 생각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과거 속에 있지는 않다. 과거의 나는 훨씬 불안정했고 육아를 하며 아이를 향한 사랑으로 세상을 가득 채웠던 시절조차도 박제된 기억에 머무를 뿐 현실의 자신은 그곳에서 이방인 같다.
각자에게 자신만의 쉼터가 달리 있다. 나의 쉼터는 내가 상처받고 힘든 지금 여기에 있다. 일상 여기저기에 다른 사람에게 방해받지 않을 방공호를 열심히 파는 데는 일가견이 있다.
아침 주방에서 밤새 잘 마른 그릇들을 제자리에 차곡차곡 쌓을 때마다 나는 경쾌한 소리, 로봇청소기가 구석구석 청소를 다 마치고 자기 집으로 귀환하는 귀여운 뒷모습, 아이가 야식으로 수박을 꺼내먹고 초파리가 끓을까 봐 껍질을 모아 덮어둔 그릇, 선뜻 지르지 못해 애달프게 눈 구경만 계속 중인 십팔만 원짜리 마티스 포스터 그림, 볼 때마다 감탄이 터지는 양요섭의 공연 영상, <철학은 날씨를 바꾼다> 책 속 한 구절에서 나는 쉰다.
드물게 쉼터를 누군가와 함께 만들기도 한다. 친구와 오랫동안 함께 만들었던 다정했던 쉼터를 이제 쓸 수 없게 되어 그 앞을 종종 배회할 때도 있다.
인간에게 노동이 어떤 의미인지, 왜 노동인간으로 진화했는지 그런 철학적 질문의 답은 아직 모르겠지만 노동이 있다면 쉼도 있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노동이 의무라면 쉼도 의무여야 한다. 일상이 쉼터를 가꾸고 쉼에의 문턱을 낮추려는 행위의 연속일 때 나아가 삶의 날씨를 바꿀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