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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검중

멀티버스의 수많은 에블린

by 하유미



어떻게 또 이 시간이 왔다. 200편의 글을 쓰고 네 번째 글쓰기를 돌아보는 시간이다. 50편씩 글이 쌓이면 점검의 시간을 갖는 원칙을 지키고 있다. 평가받지 않는 글을 쓰다 보니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제자리에서 맴도는 글이 되기 십상이다. 한 발짝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려면 정기적인 셀프서비스라도 받아야 한다.


초창기에 쓴 글에 친구로부터 ‘네 글은 상처가 느껴져서 좋아’라는 평을 들었다. 당시를 돌아보면 글을 썼다기보다 생각을 정리하고 적는 행위를 통해 마음을 치유하는 과정이었단 말이 더 어울린다.

오랫동안 내 삶을 지배하던 부정적인 감정들을 글을 통해 깊이 들여다보고 나서 화단에 묻어주었다. 울타리를 치고 접근주의 팻말을 달았다. 이제 내 상처는 불특정다수에게 공개되어 오히려 이해를 받을 수 있게 되었고 스스로에게 위로가 되었다.


아직 자신을 완전히 마주할 용기는 없다. 니체식의 자기 전복을 할 수 있는 인간은 못되지만 글과 책을 양손에 쥐고 조금씩 자신을 깎아 모양을 만들어가는 정도는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서툰 손길에 망치와 끌이 엇박이 나 제대로 된 형태를 만들지 못할 확률이 높겠지만 망설이기만 하다 돌덩이로 남기보다는 덜 깎였거나 더 깎였거나 어떤 모양이라도 만드는 편이 낫다고 믿는다.


최근에 오래 내 글을 읽어온 분과 갓 읽기 시작한 분에게서 비슷한 느낌의 반응을 받았다.

‘글이 편안해졌다.’와 ‘글이 편안하다.’

아직 자신과 분리된 글을 쓸 실력이 못되니 저 말은 ‘사람이 편안해졌다.’라고 해석한다고 해도 무리는 아닐 테다.

뾰족하고 마음이 가난했던 자신을 남모르게 글 속에서 다듬고 채워 나간 걸 알아주니 기쁘면서 한편으로 속을 들킨 기분이 들어 부끄럽다. 정말 자신이 안녕한 사람이 되어서 누구에게나 자연스럽게 읽힐 글을 쓸 날은 아직 멀었다. 어쩌면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에서 주인공은 왜 하필 자신이 우주의 파괴를 막을 사람으로 선택됐는지 묻는다. 동료가 설명한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포기를 할 때마다 새로운 우주가 생겨나는데 주인공은 너무나 많은 포기를 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누구보다 많은 다중우주의 자신을 갖게 되었다고. 멀티버스를 점프해 수많은 자신의 능력을 빌려온다면 최강이 될 테니까. 동료가 말한다.


“내가 만나본 에블린 중에 네가 가장 형편없어. 그건 정말 굉장한 일이지.”


현생의 하유미는 가장 형편없음이 확실하다. 그렇지만 멀티버스의 수많은 자신의 능력을 빌려올 수 있는 글과 책이란 점프대를 손에서 놓지만 않는다면 최강이 될 수도 있단다.

삶은 항상 나의 모 위에 서있고 내겐 그런 숨겨놓은 모서리가 여전히 많다. 모난 자리마다 글을 피우며 다중우주의 또 다른 자신을 만날 수 있다는 상상을 하면 굉장히 멋지다.


내 글이 좋은 글이 되지 못한다면 그건 내가 끝내 좋은 사람이 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일상의 점프대를 쓸고 닦기를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하겠다. 현생의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자.

그럼, 다음 점검 때까지 이만.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 제 글을 관심있게 읽어주시는 독자분들께 항상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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