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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place

자리, 사람이나 물건이 차지하고 있는 공간

by 하유미


기억의 생리는 점점 희미해지다 결국 잊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만 보아도 이제 듬성듬성 남은 어릴 적 아빠와의 기억은 흐릿해져 눈을 가늘게 떠야지만 제대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아니 에르노는 기억의 본성을 거스른다. 기억의 끊어짐조차 문단 사이의 여백으로 표시할 정도로 치열하게 복기한다. 그녀는 기억을 보는 자신의 시력에 딱 맞는 안경을 찾기 위해 렌즈를 계속 갈아 끼운다. 아버지의 자리, 자신의 자리, ‘우리’의 자리를 바라보는 초점이 객관적으로 맞춰졌을 때만 한 단어씩 천천히 써 내려간다.


소설을 절반가량 읽었을 즘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물고 늘어질 일인가?’

그때 마치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아니 에르노가 답했다.


‘이제 와서 이 세세한 것들의 의미 해석을 꼭 필요한 일 이상으로 스스로에게 강요하는 것은, 그것이 무시해도 좋은 것이라고 확신하며 거부했었기 때문이다. (중략) 아래에 있던 세계의 추억을 마치 저급한 취향의 어떤 것처럼 잊게 하려고 애쓰는 세계,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욕망 앞에 무릎을 꿇었던 것이다.’(p.59)


아니 에르노의 글은 이리저리 돌려도 어느 쪽으로도 이가 맞지 않는 퍼즐조각처럼 자전적 소설이란 범주에 쏙 들어가지 않았다. ‘소설은 아버지에 대한 일종의 배신’이라며 처절할 정도로 건조하게 써 내려간 글은 고백 혹은 반성문 같은 느낌을 주었다.


‘어쩌면 우리가 서로에게는 더 이상 할 말이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에’ 아니 에르노는 글을 쓰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다르게 말하는 법’을 몰랐던 어린 시절을 지나 사춘기에 이르러 아버지의 언어와 분리된 ‘나’의 언어로는 대화를 나눌 수 없고 오로지 쓰는 것만 가능했으리라 짐작해 본다.

그렇게 그녀는 자기가 떠나온 자리를 부끄러워했던 자신을, 이제는 ‘우리’가 될 수 없는 그와의 기억을, 지난날 무릎을 꿇었던, 이제 자신의 자리가 된 세계에서 적어 내려갔다.


아니 에르노는 계속해서 아버지를 배웅하기에 더 적합한 장소를 찾아 헤맨다. '자신이 부르주아의 세상으로 들어가며 어릴 적 유산을 두고 가야 했던, 문턱'까지 내려간다. 문턱 언저리 이쪽의 ‘나’의 자리는 너머 저쪽에 있는 아버지의 자리를 바라보기에 최선의 자리였다. 가장 가까이 아버지를 만나는 곳이지만 이제 스스로 되넘어 갈 수 없는 경계선, 거기에서 그녀는 다시 아버지의 언어로 글을 쓴다.


‘삶이 문학이 되기 위해 꾸며야 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는 옮긴이의 말을 읽으며 아니 에르노의 가늠할 수 없는 용기에 압도되었다. 그건 자기 전복을 할 수 있는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마음이다. 나아가 개인적인 것, 내면적인 것은 사회적이라는 자신의 말을 몸소 실천한 사회운동가의 면모이다.


나는 일상을 소설로 쓴다. 삶에 문학 한 스푼을 섞지 않고는 그 쓴 맛을 온전히 감당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가장 외면하고 싶은 것은 내면의 부끄러움이다.

‘그에게 바캉스를 보내 주지 않는다고 비난했다면 나 자신이 부끄러웠을 테지만, 그의 태도를 바꿔 주려고 했던 것이라 정당하다고 확신했다.’

얼굴이 붉어져 차마 읽기가 주저되는 문장을 그녀는 어떤 오해에도 기대지 않고 확실하게 적었다.

이런 식의 글쓰기라면 난 단 한 줄도 쓰지 못할 것이다.


열여섯 살의 나는 어땠는지, 그 시절 아빠의 취향은 어떤 것이었는지 단편적으로 기억을 더듬을 뿐이다. 도시로 고등학교 유학을 계획하고 있었던 그때 집은 내가 떠날 자리로 여겨졌다. 부모님의 불화도 좁은 동네의 숙명 같은 입방아도 그래서 견딜만했는지 더욱 견딜 수 없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확실한 건 그 세계는 내가 일말의 교집합을 남기지 않고 완전히 떠나온 세계가 됐다는 것이다.

아니 에르노는 더 상위계층으로 올라가며 아버지의 세계와 자연스레 단절이 됐지만 낙오한 나는 결혼으로 뛰어내릴 때까지 부러진 사다리에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오랫동안 매달린 채로 있었다.


허구를 벗은 기억 속에 소설보다 더 큰 삶이 있다는 옮긴이의 말 맺음에서 아니 에르노의 다음 책을 읽을 자신이 없어진다. 문학을 덜어낸 삶의 민낯을 직시할 마음의 준비가 아직 되지 않았다.

언젠가 젊은 시절 벼랑 끝에 대롱대롱 매달렸던 삶의 공포와 수치를 아니 에르노식으로 고백할 수 있다면 어쩌면 나도 작가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마법과 같은 용기가 샘솟는 일이 일어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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